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8628
"김구는 죽을 만하며..." 미국대사가 보낸 보고서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김구 선생 서거 70주년
19.06.26 08:58 l 최종 업데이트 19.06.26 13:48 l 김종성(qqqkim2000)
▲ 김구 암살 현장인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암살된 백범 김구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보수적 관점에 치우쳐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독립운동을 올바로 평가하지 않았다거나, 주로 암살 등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 때문에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있다.
한편, 그에 대해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가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통일운동가이기도 했다는 점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김구의 삶은 1945년 일제 패망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역사적 의의가 높았다. 해방 뒤에 반탁운동을 주도한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남북분단을 막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그가 독립투사를 넘어 통일투사로 거듭났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독립운동이나 반탁운동으로 생겨난 그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 시선을 털어내고도 남을 만했다. 이는 그가 시대 상황의 변천에 따라 자신의 과제를 맞춰나갔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시대 과제에 충실하다 보니, 그가 피할 수 없었던 결정적 불이익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미움을 샀다는 점이다.
미국은 김구를 싫어하기 이전에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임시정부의 역량이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86년에 브루스 커밍스 워싱턴대 교수가 집필하고 김자동 전 조선일보 기자가 번역해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에는 이렇게 나온다.
"국무성은 임정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야심적이며 어느 정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지지자의 수가 망명자들 사이에서도 제한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 경교장. ⓒ 김종성
김구가 미국의 무시에 이어 미움까지 샀다는 점은 <월간조선> 1984년 7월호 및 8월호에 연재된 '안두희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이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자 안두희는 이렇게 말했다. 아래의 '서청'은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의 약칭이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 정보원으로 서청원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
미국이 김구를 싫어했다는 점은, 백범 암살 2주 뒤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 문서에서도 알 수 있다.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논문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에 따르면 이 비밀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주중 한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는 6월 26일 오후 12시 20분 한국군 장교가 미제 권총으로 쏜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애국자로서 그의 명성은 무명의 일본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이 문서에 나온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말은 김구의 독립운동 방식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1932년에 이봉창 의사를 파견해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했다가 미수로 그치고, 같은 해에 윤봉길 의사를 보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장군과 일본 외교관에게 폭탄을 던진 일을 계기로 김구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독립운동 지도자로 급부상한 사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마당에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문건이 주한미국대사관과 국무부 사이에서 교환됐다는 것은 평소 미국이 김구를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김구를 저평가하는 비밀 보고서를 국무부에 제출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John J. Muccio,1900~1989)가 원래부터 김구와 악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윤봉길 의거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국대사
▲ 김구 암살 2개월 전인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사진을 증정하는 존 무초(왼쪽). 위키백과 ⓒ 김종성
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무초는 본래 이탈리아인이었다. 21세 때인 1921년 미국인으로 귀화해 브라운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24년부터 독일 함부르크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1926년에 영국령 홍콩에 파견됐다가 1931년 상하이에 파견됐다.
바로 그 이듬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왕 생일 및 상하이 점령 기념식에 참석한 무초는 하마터면 31세를 일기로 인생을 끝마칠 뻔했다. 한국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다.
무초도 일본 장군들과 함께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무초도 윤봉길의 폭탄에 죽을 뻔했던 것이다. 만약 무초의 신변에까지 이상이 생겼다면, 윤봉길 의거의 의미가 어느 정도 퇴색되는 것은 물론이고 김구의 위상에도 일정 정도 부정적 영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악연이 있었으니, 무초 입장에서는 윤봉길 배후의 김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구 암살 뒤 김구에 관한 부정적 보고서를 작성한 데는 그런 악연도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무초는 김구를 폄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좌파와 연결짓기까지 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사회주의에 매료된 청년들을 상대로 "청년들은 정신 좀 차릴지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 정도로 사회주의를 싫어했던 김구를, 무초는 좌파와 연결지어 본국에 보고했다. 무초의 증오심은 8월 9일자 비밀문서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절정에 달한다.
"김구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죽을 만하며, 안 소위는 그 결과 영웅으로 석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일련의 조작된 감정뿐만 아니라 현재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상당한 진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김구 시해 소식을 듣고 경교장에 달려와 통곡하는 서울시민들(1949. 6. 26.) ⓒ 백범기념관
무초만 김구 암살을 그렇게 봤던 것은 아니다.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실리 보고서'로 약칭되는 1949년 6월 29일자 '김구 암살 관련 배경 정보'에서 김구 암살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보고서에서 실리는 김구가 반(反)이승만파 군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었다고 말했다. 김구 암살로 인해 그런 위험성이 사라졌으므로 미국의 남한 관리가 편해졌음을 강조하는 보고서였다.
이처럼 김구는 어느 정도는 미국의 조소와 '환영' 속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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