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4581


윤봉길 의사 시신을 인도 밑에... 국권을 지키지 못한 슬픔

[가나자와 편②] 암장묘비와 순국비

19.05.11 12:35 l 최종 업데이트 19.05.11 14:37 l 김보예(kr1004jp)


▲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 입구 ⓒ 조현준(사진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

     

윤봉길 의사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1930년 3월 6일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하기 전에 남긴 말로, 조국독립이라는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가 담겨있다. 그의 염원은 생전 이루지 못했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지난 편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생애 마지막 밤을 지새운 가나자와성 (구)육군 위수구금소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했다(관련 기사 : 공중화장실이 되어버린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자리). 이번 편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윤봉길 의사의 암장묘비와 순국비

 

▲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전경 ⓒ 조현준(사진가)


가나자와성에서 차로 16분 정도 떨어진 곳에 조성된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石川県戦没者墓苑)'에는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암장묘비)가 있다. '전몰자 묘원'은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한 공동묘지이다.

             

암장지적비는 재일 교포와 일본 시민 단체의 성금으로 세워진 추도비인데, 방문자의 찬조금으로 묘비를 관리하고 있다. 암장지적비에 바로 앞에는 찬조금함과 자료고를 두었다. 자료고 안에는 '방문자 기록 명단서 겸 추도 노트'와 '윤봉길 의사에 관한 자료집'이 들어 있다.

           

윤봉길 의사는 암장지적비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있는 육군 제9사단의 연병장(현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시 27분 순국했다. 가나자와에는 별도로 사형장이 없었기에 육군 연병장(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윤봉길 의사는 10m 근접거리에서 '엎드려 쏴' 사격 자세로 총살당했으며, 첫발이 눈썹 사이에 박혔다. 형장의 이슬이 된 그의 나이, 25세였다.

 

▲  윤봉길 의사 순국하시기 전, 목재 십자가 사형대에 묶여있는 모습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일본군은 신문에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의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에 암장했다. 윤봉길 의사가 암장된 통행로는 일반인들이 도보로 다닐 수 있는 평범한 길이었다. 일본군이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통행로에 암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일 학자들은 대체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짓밟고자 했던 일제의 잔혹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권을 지키지 못해, 순국한 동지의 유해조차 거두지 못했던 슬픔이 서린 역사다.


윤봉길 의사가 암장된 통행로가 소각장 옆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더 아픈 진실이 숨어있다. 바로 그 통행로는 1932년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上海事件陣歿者合葬碑)'로 가는 길이었다. '진몰자'는 '전몰자' '전사자'와 같은 의미다. 지금은 새로 큰 길이 만들어져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로 갈 때 사람들이 그쪽으로 다니지만, 당시에는 윤봉길 의사가 암장된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가 유일한 길이었다.

                   

상해사변은 중국 상해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중국과 일제가 무력충돌을 한 사건이다. 일제는 중국과의 충돌에서 이겼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윤봉길 의사가 채소를 파는 상인으로 변장해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 의사가 처형되기 이틀 전인 12월 17일, 윤봉길 의사의 폭탄으로 다리 한쪽을 잃은 제9사단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를 설립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  윤봉길 의사를 암장할 당시의 옛날 통행로 ⓒ 조현준(사진가)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가나자와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매년 봄가을마다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을 청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아이들은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를 비롯해 여러 전물자 기념비가 있는 묘원의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소각장에 불태웠는데, 그러려면 윤봉길 의사가 묻힌 길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 청소 경험이 있었던 박인조씨(구 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 초대 회장)는 윤봉길 의사를 밟고 지나다녔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 관리에 헌신했다. 현재는 그의 조카인 박현택씨(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와 월진회 일본지부 회장)가 그 뜻을 이어 받들고 있다. 

           

조국을 향한 윤봉길 의사의 염원


암장지적비와는 달리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는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세워졌다. 윤봉길 의사는 두 아들에게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

- 유촉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중

 

▲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 ⓒ 조현준(사진가)


유촉시에서마저 느껴지는 조국을 향한 그의 염원을 따르고자 순국기념비는 대한민국 방향을 향해 세웠다. 순국기념비에 사용된 돌 또한 대한민국의 돌로 만들어졌다. 순국기념비는 서울에서 제작해 부산을 거쳐 일본 가나자와로 왔다.

        

상해헌병대(상해파견군) 육군사법 청취서를 보면, 윤봉길 의사의 시를 짓는 소양에 대해 언급하는 질문이 있다. 옥중 취조에 언급될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문학적 소양은 상당히 높았다.


조선이 무지한 탓에 일본의 식민지에 놓였다고 생각한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야학과 농촌계몽에 힘쓰며 '월진회'를 창립했다. 그가 농촌계몽 운동에 힘쏟을 당시에 '자유'라는 시를 지었다.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 농촌계몽 시 '자유' 중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배움이 부족한 자를 일컫는다. 인생의 자유를 위해 떠난 당신의 여행에 늘 배움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  암장지적비에 놓인 카네이션 ⓒ 조현준(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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