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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뒤엔 '친박 비대위' 대신 '친삼성 비대위' 뜰 수도
미국식 금권정치 직행하는 한나라 '당쇄신안'
문형구 기자 munhyungu@daum.net  입력 2012-01-25 21:51:08 l 수정 2012-01-26 08:10:09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돈봉투 파문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미국식 원내정당화를 당 쇄신 해법으로 내놨다. 정치쇄신분과 위원장인 이상돈 비상대책위원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전국위 체제로 당을 바꾸면서 당 대표와 최고위원직을 없애고 의회는 원내대표 중심으로 하는 방안을 이번주 비대위에서 공론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쇄신안이 "미국식 정당체제로 가는 것"이라고 확인했다. 

비대위의 당 쇄신안이 이상돈 비대위원의 말처럼 '획기적인' 내용이라 볼 수는 없다. 지난해 11월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도 부자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저비용 미국식 정당시스템' 도입을 언급한 바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식 정당모델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의 집권당이던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에서도 검토된 바 있다. 당시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3천3백억의 비자금을 '정당운영비'로 사용했다는 검찰 수사결과가 나오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한국의 집권세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출시했던 단골 메뉴가 '미국식 정당모델'인 셈이다. 때문에 미국식 모델의 도입이 '돈봉투' 같은 구태정치 청산을 위한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이상돈 비대위원의 경우 2006년 9월 열린우리당의 오픈 프라이머리(정당이 선거 후보를 정하는 예비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당원에 국한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것) 추진을 비난하며, 오픈 프라이머리가 "헌법에 보장하는 정치적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선거법 개정과 '한사람이 여러 정당의 프라이머리에 참여할 수 없도록 검증하는 장치'가 없는 과도한 오픈 프라이머리는 "사기극"이고 "헌법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픈 프라이머리 없는 미국식 정당모델은 가능하지 않은데다(미국식 정당모델이 아니라도 오픈 프라이머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한나라당은 다가오는 총선 공천에서 지역구의 80%를 개방형 경선으로 치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미국식 정당체제? '1%'의 잔치로 전락한 미국 선거

미국에만 독특한 이 정당모델은 또한 미국에만 독특한 '금권정치'와 밀접히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미국에만 독특한 이 정당모델은 또한 미국에만 독특한 '금권정치'와 밀접히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자료사진

'재탕삼탕' 방송이라는 점을 논외로 하면, 미국식 정당모델 자체는 '돈봉투'에 대한 해법이 될 수는 있다. 미국엔 한국이나 유럽국가들과 같은 개념의 당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당대회에 당원들을 동원하기 위한 '돈봉투'도 당연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미국에만 독특한 이 정당모델은 또한 미국에만 독특한 '금권정치'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상돈 비대위원이 '획기적인' 모델이라 일컫는 미국식 정당의 내용은 무엇일까? 

미국은 상·하원 의원들로 이뤄지는 의회정당과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선거정당, 즉 '전국위원회'가 분리돼있다. 전국위원회는 말 그대로 선거 정당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당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선거시기에만 일시적으로 모여드는 지지자들, 즉 임시 당원이 있을 뿐이다. 또한 전국위원회의 목적은 상대진영보다 많은 기부금을 모아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므로, 일상적으로 자신의 비용과 노력을 들여 정치에 참여하는 당원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꾸준히 당비를 내는 실체적인 당원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식 원내정당화는 기부금에 의존한 선거를 전제하는 것으로, 유럽식의 선거공영제와는 반대방향에 놓여있다. 남경필, 임해규 등 소위 '쇄신파'의원들이, 선거공영제의 주요 기둥인 국고보조금 폐지 주장을 시작한 것은 현재 한나라당이 구상중인 '정당 개혁'의 미래를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미국식 정당체제 도입의 결과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 상·하원의원 선거는 철저하게 '1%'의 잔치이며 금권정치 그 자체다. 미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동안 월가의 금융가에서 상·하원의원 등에게 후원된 돈은 50억 달러(약 5조 7000억원)였다. 2008년 한 해에만 월가의 전체 후원금은 2억2500만달러(약 2560억원)에 달했고 그 74%는 상·하원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에서는 칼라일, 골드만삭스, JP모건, 화이자 같은 거대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합법적으로 유착한다. 선거제도조차 '자유방임'인 미국에선 후보자들의 재력 만큼 TV광고를 비롯한 유료매체(Paid Media) 이용이 가능하므로, 모금 규모로 당락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한국에서도 정치인과 재벌기업의 유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삼성이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1000여개를 만들고 정치권에 비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난 것처럼, 한국의 재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치권을 포획하고 요구사항을 관철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유착'이 은밀하고 불법적인 것이었다면, 미국식 정당제도의 도입은 이를 제도로서 공식화하고 처벌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나라당 비대위의 구상에서, '친이계·친박계' 대신 '친삼성계·친현대계'라는 계파가 등장할 미래를 보는 것은 지나친 우려일까? 

문형구 기자 munhyung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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