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58970


"위안부 고통에 반성"... 26년 전 일본은 왜 인정했을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와 고노 담화

19.08.05 08:25 l 최종 업데이트 19.08.05 08:25 l 김종성(qqqkim2000)


26년 전 이맘때, 일본 정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의 전력(前歷)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바로 그것이다.


고노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정부 대변인)은 지난 1일 방콕에서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만난 고노 다로 외무대신의 아버지다. 1993년 8월 4일 그가 발표한 고노 담화는 자유민주당(자민당) 출신인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담화 속에는 아베 신조 총리나 고노 다로 외무대신을 비롯한 일본 우익세력을 화나게 할 만한 문구들이 수두룩하다.

 

▲  고노 요헤이. 2006년 사진. ⓒ 위키백과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담화는 일본 공권력의 개입을 인정한 데 이어, '위안부' 모집 자체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점도 부정하지 않았다. 위 문장의 이어지는 부분이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그렇게 자국의 책임을 시인한 뒤, 이 문제가 여성 인권을 침해한 사안임을 인정하면서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어쨌거나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일본의 사과 발언이 집중된 시기


당시는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미·소 이념대결이 사라지면서, 그간 억제됐던 세계 각 민족들의 이해와 요구가 동시에 폭발했다. 유고 내전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분쟁이 동유럽에서 빈발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담화가 발표된 1993년 8월은 제1차 북·미 핵위기가 발생한 지 5개월 뒤였다. 세계질서가 요동치는 혼란 속에서 뜻밖에도 일본에서 긍정적인 발표가 나왔던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깨트리려 시도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는 뒤엎지 못했다. 한일관계 파탄이 한미일 삼각동맹 균열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견제 때문이었다. 일본 우익이 그처럼 깨트리고 싶어하는 고노 담화가 일본사회당(지금의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아베 신조의 당인 자민당에서 나왔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위안부' 문제는 1991년 8월 14일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본격 제기됐다. 그로부터 약 2년 만에 고노 담화가 나왔다. 강제동원이나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 비해 일본의 사과가 비교적 빨리 나온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노 담화의 당사자인 미야자와 내각뿐 아니라 당시의 일본 내각들은 역사 문제에 대해 유난히 많이 사과를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총리들의 소신표명연설(소신연설)을 분석한 양기웅·안정화의 '탈냉전기 일본 총리의 한반도 및 한일관계 인식 변화(1991-2013): 국회 소신표명연설 분석'은 "소신연설에서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발언이 가이후 총리에서 무라야마 총리 시기에 집중"됐다고 분석한다.


자민당 출신의 가이후 도시키 내각(1989년 8월~1991년 11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1991년 11월~1993년 8월 9일), 일본신당 출신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1993년 8월 9일~1994년 4월), 신생당 출신의 하타 쓰토무 내각(1994년 4월~6월), 일본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이치 내각(1994년 6월~1996년 1월)이 존재했던 시기에 일본 정부의 사죄 발언이 집중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가이후·미야자와 내각은 자민당 단독 내각이고, 호소카와·하타·무라야마 내각은 연립 내각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사죄 표명이 특정 정당이 아니라 여러 정당의 합작품이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정치권이 사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정치대국을 꿈꾼 일본


당시 일본 정치권이 역사문제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도 관련돼 있었다. 1990년대 초반의 세계적 혼란기를 활용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일련의 사죄 발언으로 역사 문제를 털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위 논문은 '일본이 정치대국(상임이사국)이 되고자 과거사를 사과했다'는 가설에 입각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시기의 전향적인 역사 발언은 미야자와 내각부터 본격화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목표와 관련이 있다는 정치대국 가설도 제시할 수 있다. 미야자와 정부는 92년 7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의사를 처음 표명했다. 그리고 92년 6월에는 PKO 협력법을 제정했고, 92년 6월 12일 UN 환경개발회의에서 세계경제 번영과 지구환경 보전 등 현안 해소를 위한 공헌 확대를 약속하면서 92-96년간 개도국 환경 공적개발원조(ODA)를 위한 1조엔 공여 계획을 발표했다." -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2014년 발행한 <한림 일본학> 제25집.

 

▲  미야자와 기이치. 1991년 사진. ⓒ 위키백과


미야자와 내각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출마 의지를 밝힌 1992년 7월 이후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선행'을 많이 쌓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노 다로의 아버지가 '위안부'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 담화가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것이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황 전개라 할 수 있다.


미야자와 내각이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이웃나라들한테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점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 면뿐만 아니라 정치 대화의 기회를 넓혀 정치 면에서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해나가겠습니다"라거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일원으로서 우리나라의 역할을 중시하고 항상 겸허한 자세를 잊지 않고 상호 신뢰를 조성하면서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최대한의 공헌을 실시해 나갈 생각입니다"와 같은 발언을 담은 미야자와 총리의 소신연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이웃나라들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쓰고 기부 활동이나 유엔 평화유지군(PKO) 활동 등에 국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노 담화가 나왔다. 고노 담화와 안보리 상임이사국 문제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상황 전개라고 볼 수 있다.

 

▲  유엔 안보리 회의장. ⓒ 위키백과


고노 담화 뒤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는 급물살을 탔다. 담화 다음 달인 1993년 9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했다.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매듭되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의 거듭된 사과 발언은 일본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도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의 선배들과 정반대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위안부'를 비롯한 역사 문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이웃나라 한국과의 관계도 중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배제해 무역 곤란에 빠트리려고까지 하고 있다. 자신들과 정반대 방식으로 정치대국 일본의 길을 추구하는 아베 신조의 성공 가능성을, 1990년대 초반의 선배들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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