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811184200118
목소리 커진 '미들파워' 아세안..日에 맞설 우군으로
안정훈 입력 2019.08.11. 18:42 수정 2019.08.11. 20:33
인프라 등 집중 투자한 日 현지 개발이익도 독차지, 아세안 국가들 불만 커져
'함께 발전하는' 투자모델로 경제·정치 새 협력 필요
對아세안 투자 베트남 집중, 메콩강 유역 국가들과 묶어 교통·물류 공동개발 나서야
◆ 日 극복 액션플랜 ⑤ / 日과 차별화된 전략 필요 ◆
"싱가포르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방금 처음 알았다. 지역 경제 통합을 위해 화이트리스트를 확대해야지, 축소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지난 2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한·중·일 외교장관회담에서 나온 비비언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작심 발언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를 비판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발언에 "한국도 다른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다. 어떤 이유로 불만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이례적으로 즉각 반박에 나섰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시장경제뿐 아니라 외교적인 우방으로서 아세안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고성장 개발도상국이 몰려 있는 아세안은 중국에 이은 '세계의 공장'이다. 한국과의 제조업 분업 궁합도 좋고 정치적 갈등 소지도 적어 다양한 측면에서 최적의 파트너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아세안은 국제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외교력도 발휘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아세안 관련 정상·고위급 회의에는 아세안 국가들 말고도 미·중·일·러 등 4대 강국은 물론 남북한과 유엔, 유럽연합(EU) 고위급 인사가 앞다퉈 참석한다.
문재인정부도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동남아 국가와의 경제·외교적 유대 관계를 격상시키는 '신남방정책'을 공언했다. 정부는 대통령 비서실 경제보좌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를 꾸려 아세안과의 다양한 협력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또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차관급으로 격상해 대(對)아세안 외교의 격을 높이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아세안은 특히 최근 정부가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극일(克日)을 위한 핵심 파트너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일본과 유대가 깊은 아세안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전략과 정책으로 일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먼저 다자주의·규칙 기반 질서(rules-based order) 수호에 정부가 더 목소리를 냄으로써 역내 리더십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아세안 국가 대부분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수출 지향적 국가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과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으로 자유무역 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우려도 높다. 한일 외교장관 간 설전에서 아세안 국가들이 이례적으로 한국 편을 든 것도 일본의 보복 조치로 인해 이러한 질서가 무너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2018년 발효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주도하며 역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별도의 다자무역체제를 주도하기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이에 김대중정부 당시 '동아시아비전그룹' '동아시아스터디그룹(EASG)' 등의 결성을 주도하며 남방 외교 정책을 시행한 사례 등을 참고해 다양한 리더십 제고 방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역 친화적인 한·아세안 투자협력 모델을 개발해 일본과의 프로젝트 수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최근 아세안 국가들이 일본·중국 등 큰손들의 자국 중심적 투자에 이골이 났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세안 지역 전문가인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보통 아세안 국가에 인프라스트럭처와 관련된 차관을 줄 때 '일본 기업이 공사를 수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단다"며 "최근 일대일로로 투자 대상국 부채를 크게 늘린 중국도 그렇고, 투자 수혜를 일본과 중국이 다 가져가는 데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아세안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한 역사가 없으며 K팝 등 소프트파워를 갖춘 한국은 아세안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할 수 있는 여지가 다양하다는 평가다. 이 연구위원은 "해당국 기업과 합작 투자를 하는 등 상생 협력을 추구하면 '한국이 훨씬 우리를 배려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선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확장하는 등 정부와 기업 간 전략적 제휴가 필요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한국의 대아세안 공여 ODA는 4억9702만달러(약 6010억원)로, 일본의 33억3087만달러(약 4조280억원) 대비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경제 규모 차이 등을 고려하면 대등한 수준을 바라기 어렵지만 우호 협력을 증진한다는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규모를 늘려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베트남에 편중된 대아세안 투자 비율도 새로운 시장 개척과 우군 확보 차원에서 점차 다른 나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수출입은행 집계에 따르면 베트남은 지난해 1~9월 한국의 대아세안 투자에서 52.6%를 가져갔다. 또 지난해 아세안에 진출한 한국 신규 법인 956곳 가운데 베트남에 둥지를 튼 회사가 611곳으로 무려 63.9%를 차지했다.
베트남이 근면한 노동력과 임금 경쟁력, 한국과 같은 유교문화권 등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다른 아세안 국가와 비교해 이 정도로 투자를 '올인'할 정도인지에 대해선 의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된 평가다. 이미 오래전부터 중견 개발도상국이었던 말레이시아·태국 등에 일본과 중국 자본이 깊이 침투해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었던 반면, 베트남은 한국과 1992년 수교할 때에 맞춰 경제성장이 시작됐기에 한국이 투자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덕이 컸다는 것이다.
이에 잠재력이 높은 국가로 평가되는 미얀마·라오스 등도 '제2의 베트남'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베트남으로의 경로 의존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장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임성남 주아세안 대사는 "한국으로서는 이런 불균형 상태를 시정하기 위해 제2, 제3의 베트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면서 "메콩강 유역 국가들(태국·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대사는 "아세안은 중국과 일본처럼 큰 나라보다 중견국인 한국에 더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국가 간 관계도 사람 간 관계와 같다. 한국이 편안한 파트너이면서 겸손한 파트너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아세안은 한국을 최적의 파트너로 여기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한 고위급 외교 당국자도 "한국이 아세안에 진출할 때에는 아세안 국가 간 교통·물류망을 감안해 베트남 등 한 나라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예를 들어 '베트남+1' '태국+1'과 같은 전략을 짜는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당국자는 "복수의 아세안 국가들을 하나의 밸류체인(가치사슬)으로 엮어낼 수 있다면 아세안 진출의 경제·외교적 효과가 더욱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솜낏 짜뚜스리삐딱 태국 경제부총리는 지난해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태국은 아세안의 중심 국가"라며 "한국에서 경제사절단이 온다면 태국의 강점을 알리고 한국 기업에도 좋은 투자 기회를 제시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안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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