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555546


은근슬쩍 친일 숨기고... 조용필도 부른 대표 가곡의 '배신'

[친일 작곡가, 그 실체 ③] 민족을 기만한 <선구자> 작곡자 조두남

김종성(qqqkim2000) 19.07.26 08:30 최종업데이트 19.08.01 14:54 


'애국가'와 '고향의 봄', 그리고 '가고파'까지. 아이와 어른 모두 무심코 흥얼거리는 이 노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친일 작곡가, 그 실체'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친일 음악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편집자말]


☞이전기사 : 나훈아도 규현도 부른 이 노래의 비극, 친일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선구자>는 어느 자리에서든 무난한 노래였다. 무슨 노래 부를까 고민될 때 이걸 부른 사람들이 많았다. 가곡 부를 자리가 아닌 데서도 이 노래는 편하게 불려졌다.

 

<선구자>를 부르면, 잘 부르든 못 부르든, 뭐라 하는 이도 별로 없었다. 그런 점에서 '믿고 부를 만한 노래'였다. 10여년 전에 이 노래가 친일파 작품이라는 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이전만 해도 이 노래는 전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 가곡이었다.

 

<선구자>가 얼마나 광범위한 사랑을 받았는가는 이 노래를 녹음한 가수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조용필·조영남·윤형주 같은 대중가요 가수는 물론이고 테너 엄정행 같은 성악가도 이 노래를 음반으로 내놓았다.

 

작곡자뿐 아니라 작사자까지 친일파

 

▲조두남ⓒ 경남도민일보


이 가곡은 작곡자 조두남뿐 아니라 작사자 윤해영까지 친일파라는 점에서 대단한 문제작이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조두남이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까지 했다는 점이다. 이 노래를 독립투사를 위한 노래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친일을 숨기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는 대담한 행동까지 했다.

 

조두남은 1912년 10월 9일 평양에서 출생하고,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급)를 졸업했다. 그 뒤 10대 중반부터 교회 부흥회를 무대로 음악 실력을 발휘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조두남이 "1928년을 전후해 평양의 산정현장로교회·중앙교회·남문외교회·연화동교회·명천교회·기양교회 등 여러 교회 부흥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찬송가 지도자로 활동했다"면서 "1930년에 서양의 유명 선율에 기독교의 찬송시로 엮은 성가집 <영가집>을 출간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기 영역을 기독교 음악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 새로운 무대로 눈길을 돌렸다. 열아홉 살 때인 1931년, 만주에서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목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바로 이 해에 조두남은 압록강을 건너 북상했다. "1932년에 만주 펑톈(奉天)과 하얼빈(哈爾濱) 등지로 이주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 뒤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작사·작곡도 하고 음악 지도도 하고 연주 활동도 하던 그는 1943년(31세) 일본제국주의의 파트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1943년 3월 만주국 예문(藝文)지도요강의 취지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중략)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만주와 오족협화(오족은 조선·중국·만주·일본·몽고를 말함)로써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작곡해 보급했다."

 

노골적 친일 가요에도 곡을 붙여준 조두남


그는 아주 노골적인 친일 가요에도 곡을 붙여주었다. 1942년 9월 11일자 <만선일보>에 발표된 김영삼 작사의 <징병령 만세>를 위해서도 음률을 창안해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으뜸 젊은이여 넘치는 열혈

징병제의 광영에 솟아 올라

자 - 힘차게 완수하는 큰 사명

징병령 만세 만만세

싸우는 젊은이여 남북 전선에

우리들 성군(聖軍)으로 선택되어

동동아-대공영권을 내처 세워

징병령 만세 만만세

 

그가 상당히 지나쳤다는 점은 아리랑을 소재로도 친일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다. 1941년 만선일보사 신춘현상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된 윤해영의 <아리랑 만주>에도 음율을 부여해줬던 것이다. 윤해영은 <선구자>의 원곡인 <룡정의 노래>의 작사자다.

 

<아리랑 만주>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중국·만주·몽고의 오족을 위한 낙원(낙토)를 만주에 건설하자는 노래다.

 

1.

흥안령 마루에 서운이 핀다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

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拓士)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2.

송화강 천리에 어름이 풀려

기름진 대지에 새 봄이 온다

얼럴럴 상사야 밧들야 갈자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3.

기곡제 북소래 가을도 깊퍼

기러기 환(還)고향 님 소식 가네

얼럴럴 상사야 풍년이로다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한민족의 애환이 깃들인 아리랑을 소재로 일본제국주의를 찬미한 노래다. 이런 노래에 곡을 붙여줬던 것이다. 작사자, 작곡자 둘 다 도를 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2년 창작? 그건 근거 없는 이야기"

 

▲ 시민단체 '조두남' 친일의혹 규명 촉구지난 2003년 6월 경남지역 30여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마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작곡가 조두남 선생의 친일 의혹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룡정의 노래>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해방 1년 전에 창작된 노래다. 해방 뒤에 그는 이 노래의 가사를 바꾼 뒤 제목도 <선구자>로 바꾸었다. 별로 아는 이가 없었던 이 노래가 국민적 애창곡이 된 계기는 5·16 쿠데타 2년 뒤인 1963년에 찾아왔다.

 

전년도인 1962년에 객지인 남한 땅에서 한국예총 지부장이 된 그는 <선구자>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는 계기를 1963년에 맞이한다. 2002년 11월호 월간 <말>에 실린 연변 작가 류연산의 기고문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 그 사연이 소개돼 있다.

 

"1963년 12월 30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불러 유명해졌다고 하고, 그 뒤로 기독교방송국에서 '정든 우리 가곡'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간 방송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구자>가 유명해지자 그는 창작 동기를 독립운동과 연관시켰다.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일례로 2015년 12월 발행된 <관훈저널> 제137호 같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관훈저널>은 그의 거짓말을 최초로 실은 간행물이 아니라, 이전에 숱하게 회자되던 그의 창작담을 옮겨놓은 간행물에 불과하다. 이 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32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당시 목단강변에 살고 있던 그를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이름은 윤해영. 그 청년은 시를 한 편 내밀고는 작곡을 부탁하고 떠났다. 제목은 <룡정의 노래>였다."

 

<관훈저널>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조두남은 1968년 기독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룡정의 노래> 즉 <선구자>의 창작 동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만주로 많이 망명하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바쳐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왜적의 총칼 아래 무참히도 쓰러져 가지 않았습니까? 이 쓰러져 간 독립투사들을 조상(弔喪)하며 만든 것이 <선구자>입니다."

 

1932년에 작사자 윤해영이 가사만 남겨놓고 사라진 뒤에 자신이 곡을 붙여 <선구자>를 만들었으며, 이 노래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작품이었다는 게 조두남의 설명이다.

 

이 말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앞서 소개한 그의 프로필에서 드러난다. 그는 윤해영이 1932년에 가사만 남긴 채 사라진 뒤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해영은 1941년에 <아리랑 만주>를 작사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2년 뒤 이 노래에 조두남이 곡을 붙였다. 이는 1941년 이후에 두 사람이 연락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두남은 1932년경에 <선구자>의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게 거짓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2년 동안에 조두남은 물론이고 윤해영과도 음악 활동을 함께한 김종화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인터뷰는 요녕민족출판사가 펴낸 <두만강> 4집에 소개돼 있다.


김종화는 조두남과 윤해영의 노래를 기타로 연주한 음악가다. 두 사람의 음악에 대해 상당히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종화의 증언과 관련해 1996년 11월 27일자 <한겨레신문>은 "항일 독립의 기상을 표현한 가곡 <선구자>의 원 제목은 '룡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의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그는 '룡정의 노래'가 44년 봄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시 인근의 닝안(영안)에서 열린 조두남씨의 신곡 발표 공연에서 첫 선을 보였다면서 당시 가사에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따위의 구절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같은 유랑민의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돌아봤다."

 

김종화는 기타로 <룡정의 노래>를 연주했다. 그런 그가 '<룡정의 노래>와 <선구자>는 곡조는 같지만 가사는 다르다'고 증언했다. 독립운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노래였다고 증언한 것이다.

 

위의 월간 <말>에도 김종화의 인터뷰가 소개돼 있다. <말>에서도 그는 "한국의 책을 보면 <선구자>는 1932년에 창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라면서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라고 증언했다.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한 노래 '선구자'

  

▲2003년 5월 30일 개관식 이후 시민단체 등의 항의로 인해 폐쇄됐던 조두남기념관은 이후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오마이뉴스 윤성효


<선구자>와 관련해 조두남은 중요한 부분들에서 거짓말을 했다. 친일파인 자신이 독립투사를 위해 작곡을 했다고 말했다. 윤해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라면, 조두남의 말에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김종화의 증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조두남의 말이 신빙성이 낮다고 볼 때, 그가 '룡정의 노래'의 발표 시점을 1944년이 아닌 1932년으로 앞당긴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44년은 조두남이 한창 친일 활동을 할 때였다. 그래서 1944년에 지은 노래는 친일을 위한 작품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독립운동과 무관한 작품으로 추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을 막고자, 자신이 만주에 이주한 첫 해인 1932년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친일활동을 하기 이전에 지은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을 수 있다.

 

이처럼 <선구자>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한 노래다. 작사자 윤해영뿐 아니라 작곡자 조두남도 친일파인데다가, 조두남은 창작 경위와 관련해 거짓말을 많이 했다. 이 작품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기까지 했다. 친일을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는 '더 큰 악'을 범한 것이다.

 

이 고약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긴 조두남은 오랫동안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1982년 10월 18일자 <경향신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선구자>는 대통령이 등장하는 행사에서 배경 음악이 되기도 했다.

 

조두남은 <선구자>를 자신의 등장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전두환의 보살핌도 받았다. 1982년 3월 3일자 <경향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조두남은 전두환을 통해 생활비 및 의료비 지원도 받았다. 조두남은 1984년 11월 9일 죽었다. 사망 직후 전두환은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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