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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단위 지방통치제

고구려 지방제도


6세기 이후에는 지방행정조직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그 일면을 전하는 기사가《隋書》고려전의 “內評外評五部褥薩”이란 기사이다.28) 이를 內評․外評․五部로 나누어 내평을 경기, 외평을 지방, 5부를 왕도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29) 내평 5부와 외평 5부로 나누어 내평은 왕도, 외평은 지방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0) 내평과 외평의 구분은 당시 왕도와 지방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였음을 보여준다. 도성제로서는 3京制가 마련되었다. 수도인 평양성과 國內城․漢城을 3京이라 하였는데,31) 이들 도성의 행정구역은 上部(동부)․下部(서부)․前部(남부)․後部(북부)․中部(내부) 등 5부로 나뉘었다.32) 특히 수도의 행정구역은 內評으로 불리웠으며, 내평 5부에는 褥薩(욕살)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33) 이들 3경에는 지배층들이 주로 거주하였으며, 3경의 주민은 일반 평민이라 하더라도 지방민보다는 우대받았을 것이다. 3경의 평민들은 지방민과 마찬가지로 조세의 부담을 졌으며, 5부병의 군사조직으로 편제되었다.


지방은 外評이라하여 역시 5부로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되나,34) 구체적인 통치구역은 알 수 없다. 고구려 멸망기에 전국에는 176개의 성이 있었는데, 지방행정조직은 이들 성을 단위로 하여 중층적으로 편제하여 구성하였다. 구체적인 행정단위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지방관을 중심으로 볼 때에는 褥薩(욕살)―處閭近支/道使(처려근지/도사)―可邏達(가라달)․婁肖(누초)의 3단계로 구성되었다.35)


지방통치의 중심지인 大城에는 최고 지방관인 욕살이 파견되었다. 욕살은 당의 지방관인 都督에 비견되는데,〈고자묘지〉에 高量(고량)이 三品柵城都督位頭大兄(삼품책성도독위두대형)을 역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도독으로 부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36) 이 욕살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대체로 제5위인 위두대형 이상이었다.37)


욕살은 5세기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고,《주서》고려전에 최하위 관등명으로 처음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지방관명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수서》고려전에는 내평과 외평의 5부에 욕살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6세기의 사정을 전하는 史書에 욕살의 명칭이 처음 등장함을 보면, 욕살의 설치는 6세기 무렵으로 짐작된다.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의 등장은 광역의 행정구역이 설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6세기에 들어 지방통치제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결과이다. 욕살은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 행정단위에 전달하고 또 이를 통솔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욕살 아래의 지방관은 처려근지로서 일명 도사라고도 하였다. 5세기의 지방관인 수사에 해당하며, 7위인 대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되었다. 당의 지방관인 刺史(자사)에 비견되는 존재로, 휘하에 여러 小城(소성)들을 거느렸다. 당과의 전쟁시에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안시성․백암성․개모성․건안성․부여성․비사성 등의 성주가 바로 처려근지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처려근지의 치소는 ‘備(비)’라고 불리었다.


최하위의 지방관은 可邏達(가라달)과 婁肖(누초)였다. 당의 長史(장사)(에 비견되는 가라달은 욕살이나 처려근지의 직할지를 관장하는 막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38) 그리고 당의 현령에 비견되는 누초는 일반 최하위 소성에 파견된 지방관이었다. 즉 가라달과 누초는 동급의 지방관으로, 대개 소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역임하였을 것이다.39)


지방관이 파견되는 최하위 행정단위는 城이었으나, 성 내부에는 4․5세기와 마찬가지로 村이라는 말단 행정단위가 편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체로 호구의 파악이나 조세와 노동력의 징발 등 수취 부담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단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6․7세기의 지방조직은 욕살․처려근지․누초를 지방관으로 하는 3단계 구조였기 때문에, 당대 중국 사서에서는 이를 唐(당)의 都督府(도독부)―州(주)―縣(현)의 구조에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방조직의 구조는 당과는 전혀 달랐다.


먼저 욕살이 관장하는 통치 구역은 5부로 추정되는데, 사료상으로는 욕살이 파견된 성으로 柵城(책성)과 烏骨城(오골성)이 확인된다. 책성은 두만강 하구지역인 琿春(훈춘) 일대로서 고구려 초기부터 동북방의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며, 오골성은 오늘날의 요동 봉황성으로서 요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요동지역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들 책성과 오골성은 5부의 치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욕살이 파견된 성이 반드시 다섯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新唐書(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의 州縣(주현)을 60성이라 하였는데,《舊唐書(구당서)》 고려전에 의하면 멸망후 고구려 지방 성의 총수는 176성이었다. 따라서 60여성은 고구려 지방행정단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대략 처려근지가 파견되는 행정단위 이상의 성으로 짐작되며, 나머지 110여 성이 누초급이 관장하는 성이 될 것이다. 그러면 성과 소성의 비율은 대략 1 : 2가 되는데, 이는《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는 고구려의 군과 현의 비율과도 일치하고 있다.40) 따라서 지방행정의 통속관계를 보면, 5부의 욕살은 휘하에 처려근지가 다스리는 10여 성을 거느리고, 처려근지는 누초가 파견된 2~3개 소성을 통솔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현재로서는 각 지방행정단위의 명칭은 알 수 없다.41)


그런데 상하 지방행정단위는 모두 독자적인 통치영역을 갖고 있었다.42) 상위 행정단위라 하더라도 관할구역을 모두 직접 관장한 것은 아니고, 명령수수계통에 있어서만 하위 행정단위를 통솔하고, 행정․군사적으로는 직할지만을 관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지방관은 행정조직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할 지방군의 지휘관의 역할도 겸하였다. 당태종의 침입시에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부 욕살 高延壽(고연수)와 남부 욕살 高惠眞(고혜진)이 15만 고구려군을 이끌고 출정한 사실이나,43) 수․당과의 전쟁에서 각 성의 城主(성주)가 곧 군지휘관으로 활동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주석


28)《隋書(수서)》권 81, 列傳 46, 高麗.


29) 武田幸男(다케다 유키오),〈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4―朝鮮三國と倭國, 學生社, 1980), 38~40쪽.


30) 山尾幸久(야마오 유키히사(),〈朝鮮三國の軍區組織〉(《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1974), 155쪽. 林起煥, 앞의 책(1995), 152~153쪽.


31) 漢城(한성)은 黃海道(황해도) 新院郡(신원군) 峨洋里(아양리) 일대로 비정된다. 이 일대에서는 고구려시대의 대규모 건축지와 고분군이 확인되고 있다. 또 북쪽 1.5km 떨어진 곳에는 장수산성이 있다(손영종,《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175~187쪽).


32)〈平壤城石刻(평양성석각)〉에 ‘漢城下後部(한성하후부)’가 보임으로써, 한성과 국내성에도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5부의 행정구역제를 실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33) 국내성과 한성에도 5부제를 실시하였음을 보면, 3경 모두에 內評(내평)의 5부 욕살을 두었을 가능성도 크다.


34) 지방 통치구역으로서의 5部(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으나,《舊唐書(구당서)》 권 199 下, 列傳 149, 高麗傳(고려전)의 “高麗國(고려국)은 5部(부)로 나누어 176城(성)과 69만 7천 戶(호)가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5部(부)를 지방 통치구역으로 볼 수 있다.


35)《翰苑(한원)》에 인용된〈高麗記(고려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그 諸大城(제대성)에는 傉薩(욕살) 을 두는데 都督(도독)에 비견되고, 諸城(제성)에는 處閭(近支)(처려근지)를 두는데 刺史(자사)에 비견되며 道使(도사)라고도 한다. 諸小城(제소성)에는 可邏達(가라달)을 두는데 長史(장사)에 비견되며, 또 城(성)에는 婁肖(누초)를 두는데 縣令(현령)에 비견된다” 위 기사에 의한 지방통치구조는 褥薩(욕살)―道使(도사)―可邏達(가라달)―婁肖(누초)의 4단계로 파악되기도 하고(盧重國,〈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東方學志》21, 1979, 147~149쪽), 褥薩(욕살)(―可邏達/가라달)―道使(도사)(―可邏達/가라달)―婁肖(누초)의 3단계로파악되기도 한다(武田幸男,〈朝鮮三國の國家形成〉,《朝鮮史硏究會論文集》17, 1980,41~43쪽).


36)〈德興里古墳(덕흥리고분) 墨書銘(묵서명)〉에도 ‘中裏都督(중리도독)’이란 명칭이 보인다.


37)《冊府元龜(책부원귀)》권 170, 帝王部來遠條(제왕부래원조)의 “高麗位頭大兄里大夫後部軍主高延壽(고려위두대형리대부후부군주고연수), 大兄前部軍主高惠眞(대형전부군주고혜진)”이라는 기사에서 욕살인 高延壽(고연수)의 관등이 位頭大兄(위두대형)임을 알 수 있다.


38) 長史(장사)는 ‘遼東城長史(요동성장사)’의 1예가 보이는데(《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4년), 요동성은 요동지역의 요충지로서, 褥薩(욕살)이나 적어도 道使(도사)급 이상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동성 長史(장사)는 遼東城主(요동성주)가 아니라 그의 막료일 것이다.


39)〈平壤城石刻(평양성석각)〉에 보이는 축성책임자가 上位使者(상위도사)나 小兄(소형)임에서 추론할 수 있다.


40)《三國史記》권 35, 雜志(잡지) 4, 地理(질) 2의 漢州(한주)․朔州(삭주)․溟州條(명주조)에서 고구려 영역이었던 지역의 郡(군)은 51개(州포함), 縣(현)은 95개로서 대략 1 : 2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비율은 地理志(지리지)에 나타난 통일신라시대 전영역의 군현 비율과 별반 차이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州郡의 총수는 129개, 縣은 304개로 대략 1 : 2.3의 비율이다.


41) 처려근지와 누초가 파견된 성을 郡(군)․縣(현)으로 칭하였을 가능성은 있다.《三國史記》권 35, 雜志 2, 地理 2에는 고구려의 지방행정명을 군과 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군․현의 칭호를 단순히 후대 신라의 군현조직이 소급 부가된 기록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또 고구려 무관명인 末客(말객)은 ‘郡頭(군두)’라고도 불리었는데, 지방행정조직과 지방군사조직이 동일체계로 편제되었음을 고려하면 郡頭(군두)는 일종의 郡(군)단위 지방관명으로도 볼 수 있다. 또 고구려 율령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라에서 郡(군)이라는 지방행정단위가 시행된 점과 백제에서 郡(군)(郡長/군장)의 행정단위가 설정된 점도 고구려에서 최소한 郡(군)이란 행정단위가 설정되었을 개연성을 높여준다.


42) 이는〈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의 수묘인연호조에서 상급단위의 성이나 하급단위의 성의 구분없이 모두 수취체제의 단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林起煥, 앞의 책, 1995, 146쪽). 통일신라의 州郡縣制(주군현제)에서도 州(주)․郡(군)은 소영역으로서의 독자적인 지배영역이 설정되어 있었다(姜鳳龍,《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207~209쪽).


43)《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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