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229.22020193720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5>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고구려사신들
고구려 마지막 사신의 모습이 아프라시압 궁궐벽화에
아프라시압 : 우즈베키스탄 역사도시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2-28 19:56:27 | 본지 20면
- 서기 7~9세기까지 실크로드 교역지 사마르칸드는 중앙아시아 소그드왕국 수도
- 1965년 발굴 벽화서 머리 깃 꽂고 관 쓴 고구려 사신 추정 인물 두 명 발견
- 최근 학계에서는 연개소문 특사 가능성도 제기
- 고구려 이후 발해도 교류 증거들 나와
- 우리 선조들의 중앙亞 진출 루트 생생하게 증명
아프라시압 궁궐 유적 벽화의 개념도. 오른쪽 끝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선명하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동서 문명의 십자로-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문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올해 11월 16일 시작해 2010년 9월 26일까지 열린다. 지난 주에 이 특별전을 보고온 필자의 느낌은 참 각별했다. 왜냐하면 러시아 유학시절에 중앙아시아의 유물을 보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독립이 되어서 새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해 결국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기 힘들었던 중앙아시아의 문화유산이 우리나라에서 전시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화적 포용력이 넓어졌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이 전시회에는 한국 고대사의 쟁점 중 하나였던 한 벽화의 모사도가 전시되고 있었다. 바로 아프라시압의 궁전벽화다. 1965년에 처음 발견된 이 벽화에는 고구려의 사신이 묘사된 것으로 유명하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우리에게는 동떨어진 공산주의 국가 이미지가 강했다.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발굴자료는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한국의 고대사학계를 흥분시켰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도시인 사마르칸드는 서기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실크로드의 교역으로 유명한 소그드국(소그디아나)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서는 20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교외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지역은 당시 소그디아나의 중심지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아프라시압이란 사마르칸드 북쪽을 관통하는 시아브강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인데, 1965년에 건설공사를 하다 우연히 소그디아나 왕인 와흐르만(중국어로는 불호만·拂呼縵 이라 썼다)의 궁전이 발굴되었다.
■깃을 꽂은 사진, 신라인가 고구려인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궐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오른쪽 끝의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벽화는 서기 7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교역국가 소그드왕국 수도였다.
사마르칸드라는 역사도시에서 궁전이 발견되는 정도는 어찌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아프라시압의 궁궐벽화에는 당시 왕을 방문한 수르한다리야의 귀족 챠가니안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만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8세기 초엽 아라비아인들의 침입으로 정작 왕의 모습은 파괴되었지만, 이 연회를 기록한 명문과 함께 당시 사신들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있어 서기 7~8세기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된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L.I. 알바움은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을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중 동쪽 벽화의 가장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두 명의 인물들에 주목했다. 젊은 청년같이 생긴 이 두 명은 머리에 깃을 꽂은 관을 쓰고 윗도리는 좌임(왼쪽으로 옷을 묶음), 그리고 고리로 된 긴 칼을 차고 있었다. 알바움이 알고 있는 한 중앙아시아에서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자료를 뒤지던 중 평양에서 1958년에 출판된 '고구려벽화고분연구'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관에 깃을 꽂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벽화가 발견된지 10여 년 후 출판된 정식보고서인 '아프라시압의 벽화'에서 알바움은 고구려의 여러 자료를 비교분석하여 이 사신들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결론지었다.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는 이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알려지면서 고대사학계는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지만, 여기에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이 궁전벽화는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지 통일신라인지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소그디아나는 8세기 초에 아라비아인의 침략을 받았다. 또 벽화에 새겨진 여러 복장이나 역사기록을 참고할 때에 벽화의 제작 연대는 7세기 중후반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연도가 668년이니 이 사신의 주인공이 통일신라시대의 신라사람인지 아니면 고구려사람인지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신라인이라는 근거는 아프라시압 벽화의 그림이 신라에서도 보이며, 전형적인 고구려의 복장과는 다소 다르다는 데 근거한다.
사실 정확한 명문자료가 나와있지 않은 상황이니 결론은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통일을 한 후에 당나라의 간섭을 뿌리치기 위해 국가적인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중앙아시아와 교류했었던 증거는 없다. 그러니 통일을 이루는 혼란기에 굳이 이역만리에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은 별로 없고, 고구려 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 최근 학계에서는 고구려 사신들이 연개소문의 특사로 군사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고 본다.
■벽화 속에는 중국옷을 입은 여인들도
소그드왕국의 인물상(왼쪽 그림)과 발해에서 출토된 인물상(오른쪽 실물). 형태가 유사해 두 지역의 교류 흔적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본다면 그러한 설명이 매우 합당하다. 마치 대한제국 시절에 헤이그로 파견된 고종의 밀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혹시 소그디아나의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화려한 잔치의 끝자리에 의젓하게 서있는 두 사신의 모습이 약간은 슬퍼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와흐르만의 잔치에 초대된 고구려 사신들은 맨 끝줄에 서있다. 아마 땅끝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는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고구려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 사신을 파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소그디아나는 고구려에게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소그디아나는 당나라와도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학계에서는 고구려인의 벽화에만 주목하지만, 아프라시압 벽화의 다른 부분에는 중국옷을 입은 여인들이 배를 타고 노니는 장면이 있다.
중국계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왕의 후궁들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당시 비슷한 옷은 중국 이외에도 고구려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와흐르만왕은 고구려뿐 아니라 중국과도 친선관계를 맺고 있어서 중국의 벼슬을 받아 강거도독을 자처했다. 소그드인들은 타고난 장사꾼으로 실크로드를 경제적으로 장악한 사람들이었다. 장사꾼답게 고구려뿐 아니라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는 능수능란함이 이 벽화에도 잘 나와있다. 고구려 사신이 어렵사리 도착한 소그디아나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중국인 후궁들과 사신을 보고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와흐르만 통치 이후 소그디아나는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되어 종교를 이슬람으로 바꾸었다. 이후 압바스 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 당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구려의 유이민(流移民)인 고선지는 소그디아나를 정복한 아라비아군과 맞서 탈라스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아라비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당시 중국군 포로 중에는 종이기술자가 있었다. 이 전쟁은 서양에 종이가 전파가 된 계기가 된 중요한 전쟁이었다.
■중앙亞-고구려 교류, 발해로 이어져
고구려의 중앙아시아 루트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에서도 소그드인과 교류한 증거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해주 노브고르데예프카 성지에서는 소그드의 은화가 발견되었고, 네스토리우스파(기독교의 한 분파)가 전래한 것으로 보이는 석제 십자가도 출토되었다. 고구려에서 아프라시압까지 오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 테니, 아마 사신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고구려는 이미 망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고구려는 당시 발달된 개마기술을 갖고 있었으니, 소그디아나에서 장군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새로 건국된 발해와의 교역루트를 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우즈베키스탄은 한국과의 공동조사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사신들의 그후 운명을 밝혀줄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여성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은 한국 다문화코드의 한 상징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그에 따라 단일민족의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적응하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아프라시압의 벽화에서 보듯이 중앙아시아는 단순한 결혼교류 이전에 수천년을 이어온 문화교류의 핵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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