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20_0010_0010


(1) 초기의 지방통치제

고구려 지방제도


초기 고구려 국가의 통치체제는 那部(나부)의 자치성에 기초한 나부체제였기 때문에, 지방통치 역시 재지수장층인 (諸加(제가)들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계루부왕권은 나부 관원의 명단을 보고받는 등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였지만, 나부 내부의 일은 제가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처리되었다.543)


그런데 나부는 그 내부에 다수의 단위집단을 포괄하고 있었다.≪三國志≫ 고구려전에 보이는 ‘邑落(읍락)’이 그것이다.544) 그런데 이 읍락은≪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는 谷(곡)집단으로 나타난다.545)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原澤(원택)이 없으므로 山谷(산곡)을 따라 거주한다”라는 기록처럼 압록강·동가강 유역의 지리적 조건 속에서, 곡은 고구려의 보편적인 취락군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이 곡집단은 고구려연맹체를 형성하기 이전부터 지역별로 성장해온 단위정치체로서, 나부체제 아래에서도 자치권을 갖는 기본적인 단위집단으로 존재하였다. 신대왕대 국상 明臨答夫(명림답부)에게 坐原·質山(좌원,질산)이 식읍으로 주어지고, 또 동천왕대에 공을 세운 密友(밀우)와 劉屋句(유옥구)에게 巨谷·靑木谷·鴨淥杜納河原(거곡,청목곡,압록두납하원) 등이 식읍으로 주어진 예에서546) 3세기 중엽까지도 인민·토지 등을 포함하는 곡집단이 지배나 수취의 기본적인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곡집단은 그 내부에 다수의 소집단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주몽세력에 흡수될 당시의 毛屯谷(모둔곡)은 再思·武骨·黙居(재사,무골,묵거)로 대표되는 3개의 소집단으로 구성되어,547) 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재사집단이 영도하는 곡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곡 내부의 소집단은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지는 못하였다.548)


그런데 이 곡집단의 존재 형태나 세력기반은 다양하였다. 그 중에는 다른 곡집단을 통솔하면서 나부의 중심세력을 형성한 세력도 있었다. 나부 내의 部內部(부내부)를 구성하는 나집단의 존재가 그것이다.549)


이러한 나부 내 단위집단의 존재에서 보듯이, 나부통치체제 아래에서 지방통치는 나집단이나 곡집단을 세력기반으로 갖는 재지수장층인 諸加(제가)세력의 자치권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大加(대가)들은 휘하의 관료인 사자·조의·선인을 매개로 조세수취 등의 자치권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 이들 단위집단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통치체제는 성립되지 않았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보면 초기기록에는 이러한 단위집단을 谷·原·澤·川·水(곡,원,택,천,수) 등 지형적 명칭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행정적인 편제단위가 마련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한편 고구려는 초기부터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여 정복지를 확대해 갔다. 압록강·혼강 유역의 경제적 기반은 고구려의 지속적인 성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못되었고,550) 따라서 고구려는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북옥저·동옥저·양맥·동예 등 주변세력을 복속시켜 안정된 수취기반을 확대해 가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정복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역지배는 실시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반자치적, 경제적으로 공납적 지배를 통한 간접적인 집단지배를 실시하였다.


예컨대 3세기 중엽 고구려는 동옥저의 읍락사회를 해체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동옥저의 大人(대인)을 使者(사자)로 삼아 자치권을 주어 통솔케 하는 한편 고구려의 大加(대가)로 하여금 조세 등 공납물의 수취와 노동력의 동원을 감독케 하였다.551) 이는 당시에 행해진 간접적 속민지배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북옥저와 양맥도 동옥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배되고 있었다. 북옥저의 경우 중심 읍락인 東海谷(동해곡)에서 3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공납을 바치고 있었고,552) 양맥부락도 서천왕대까지 대가세력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553) 당시 대가세력이 각 속민집단으로부터의 공물수취와 분배에 참여함은 속민집단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대가의 군사력이 동원된 결과였다.


그런데 연맹체의 외곽에 존재하는 이들 속민집단은 그 사회의 독자성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재지수장층을 통한 간접지배였기 떄문에, 고구려의 지배력 약화 내지 중국군현의 세력침투를 계기로 고구려 세력권에서 쉽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컸다. 예컨대 동천왕대 毋丘儉(모구검)의 침입시 동예가 이탈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554) 따라서 고구려왕은 수시로 이들 지역에 대한 巡狩(순수)를 행하여 그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태조왕대의 柵城(책성) 순수와 서천왕대의 新城(신성) 순수는 북옥저를 비롯한 두만강 유역에 대한 통치권의 확인이며, 태조왕의 南海(남해) 순수는 동옥저에 대한 지배권의 확인이었다.555) 즉 고구려 초기에 왕의 변경 순수는 당시 속민집단에 대한 지배의 미숙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행해졌다.




543) 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13쪽.

544)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邑落(읍락)은≪三國志≫에서 인식하는 동이족 사회의 보편적 존재로서, 고구려만이 아니라 韓·沃沮·東濊·夫餘·邑樓(한,옥저,도예,부여,읍루) 등 여러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즉≪三國志≫東夷傳(동이전)의 邑落(읍락)은 한반도나 만주 각 지역의 취락집단 일반에 대한 명칭으로서, 이는 어떤 일정지역 내에서 혈연적 유대를 바탕으로 통일적인 기능을 행사하는 단위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다(李賢惠,<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8쪽).


545) 林起煥,<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체제>(≪朴性鳳敎授回甲紀念論叢≫, 1987), 32∼37쪽.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는 谷(곡) 이외에도 原·川·澤·野·水(원,천,택,야,수) 등의 지명 어미를 갖는 지역집단들이 보이는데, 이들도 기본적으로는 谷(곡)집단으로 포괄할 수 있다.


546)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8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20년.

547)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

548) 林起煥, 앞의 글, 40쪽.

549) 部內部(부내부)에 대해서는 盧泰敦, 앞의 글, 25∼34쪽 참조. 부내부를 다수의 곡집단이 결합된 那(부)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林起煥, 앞의 글, 46쪽). 부내부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15년조의 ‘三沸流部長’과≪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2년조의 ‘四椽那’이다.


550)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傳의 “좋은 田地(전지)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충분하지 못하다”라는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551)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552) ≪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민중왕 4년·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55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19년·서천왕 19년.


553)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서천왕 11년.

554)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555) 金瑛河,<高句麗의 巡狩制>(≪歷史學報≫106, 1985), 6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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