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4_0030_0020_0030


3)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위만이 기원전 4∼3세기 이래 초기국가로서 존재해오던 濊貊朝鮮(예맥조선)(종래의 箕子朝鮮/기자조선)을 攻滅(공멸)하고, 강력한 정복국가인 위만조선을 수립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그런데 이 위만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右渠(우거)대에 와서 발달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위만조선은 주위의 변방 정치집단들의 對漢交易(대한교역)을 매개함으로써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그들의 대한무역로를 차단할 것을 기도하였다. 이는 주변 정치집단뿐만 아니라 한나라에게도 위만조선이 하나의 위협세력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바로 이 무렵에 우거가 한 무제의 정치·군사적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匈奴(흉노)와 일종의 군사적 제휴를 모색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 이러한 우거275) 치하의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제반 이해관계에서 충돌하게 된 상황이 한 무제로 하여금 조선정벌을 단행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전해지고 손자인 右渠(우거)에게 이르렀는데 漢(한)의 亡人(망인)들을 꾀어 모은 자가 자못 많았고 또 일찍이 天子(천자)에게 입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眞番(진번) 옆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코자 하여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史記/사기≫권 115, 列傳/열전 55, 朝鮮/조선).276)


위의 사료는 한과 위만조선이 갈등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위만조선이 주변 정치세력을 장악한 패자로 등장한 데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 동안의 위만조선은 주변 정치세력의 중국내왕을 보장하는 漢(한)의 外臣(외신)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같은 형식적 복속과 中繼者(중계자)로서의 위치를 거부하고 실질적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만조선이 단순한 중계무역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치·군사적 패자로서 한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은 匈奴(흉노)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여 河西四郡(하서사군)을 설치하고, 위만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涉河(섭하)를 사신으로 파견하였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한이 전송하던 朝鮮 裨王(조선 비왕)을 살해하고 귀국한 섭하를 遼東東部都衛(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여 위만조선측을 자극하자, 위만조선은 한을 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으므로 양측간에 전면전이 개시되게 되었다.277)


한은 흉노와 南越(남월)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된 뒤 기원전 110년부터 전쟁준비에 착수하여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樓船將軍 楊僕(누선장군 양복)은 齊兵(제병) 7천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渤海(발해)를 건너 王險城(왕검성)으로 공격하여 들어왔고 左將軍 荀彘(좌장군 순체) 는 요동지역의 병사 5만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한의 水軍(수군)은 주력군인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 위해 列口(열구)에서 기다리기로 하였으나 육군의 진격이 늦어져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 조선의 수군에게 패하였다. 육로군도 요동병이 먼저 국경인 패수방면에서 위만조선군에게 격파되었으며 본진도 浿水西軍(패수서군)에게 격퇴되어 교착상태에서 양국간에 화의가 추진되었다. 한무제는 衛山(위산)을 파견하여 화의를 타결코자 하였으나 화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상호불신과 이에 따른 위만조선의 강경자세, 그리고 위산의 소극적 태도로 인하여 화의는 결렬되었다. 그러자 한은 齊南太守 公孫遂(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여 위만조선을 다시 공격하였다. 이후 계속된 1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위만조선은 결국 지배층의 분열과 右渠王(우거왕)의 피살 및 主和勢力(주화세력)의 망명 등에 의해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최후까지 항전하였던 大臣 成己(대신 성기) 등의 노력도 성과없이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붕괴되고 말았다.278)


그런데≪史記≫朝鮮傳(사기 조선전)에 나타나 있는 전쟁 이후의 관련자 처리내용을 살펴보면 한 무제의 위만조선 공략은 사실상 遠征(원정)이 실패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정사령관 가운데 수군을 지휘한 누선장군 양복은 초기 전투에서의 실패와 불성실한 행위로 인하여 斬刑(참형)을 간신히 면하고 庶人(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으며, 육군을 지휘한 좌장군 순체는 공을 다투어 서로 협력치 않고 갈등을 초래하였다 하여 斬(참)하여 저자거리에 시신을 내다버리는 棄市刑(기시형)에 처해졌다. 또한 화의 추진의 책임자였던 위산 역시 일을 그르친 책임을 물어 참형에 처해졌다. 더욱이 마지막에 파견되어 재침공을 주도하였던 제남태수 공손수도 화의를 진행하려던 누선장군을 감금하고 재공격을 하는 도중에 역시 참형을 당하였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司馬遷(사마천)은 위만조선 정벌에 참가한 장군들이 모두 極刑(극형)을 당하였고 兩軍(양군)이 모두 욕을 당해 전투에 참가한 將率(장솔) 가운데 侯(후)에 오른 이가 하나도 없었다라고 하였다.279)


위만조선 원정과 관련된 한나라의 4명의 장군들 가운데 3명이 참형이라는 가장 극악한 형벌을 당하였고 단 1명만이 살아남아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당하는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위만조선이 군사적으로 패배를 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전투과정 및 이후 전개된 상황으로 보아 결코 완전한 패배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부 지휘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우거왕으로 대표되는 주전파세력이 몰락하고, 그 대신에 朝鮮相 路人(조선상 노인)·尼谿相 參(니계상 참)·相 韓陰(상 한음)·將軍 王唊(장군 왕겹)등의 주화파세력이 중국과의 화의를 통해 새로이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중국의 직접적 통제를 위하여 위만조선사회는 ‘四郡’(사군)으로 재편되었지만 사실 그 실상은 기존의 토착세력이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275) 종래에는 우거를 단순히 衛滿(위만)의 손자 이름으로 보아 왔으나, 최근의 언어학적 연구에 의하면 우거는 고조선시대 공동체 혹은 생활 공동체 연합체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거나, 또는 사람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라는 견해도 있다(조승복,<Reflection upon The Ko Tsosen Word/UK>,≪국내외에 있어서 한국학의 현재와 미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276) 이 사료에서는 眞番(진번)과 인접한 국가들을 衆(무리)과 國(나라)의 두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사기≫에서의 衆國(중국)이라는 표현은 다른 사료들, 특히≪한서≫와 ≪자치통감≫에 비추어 보아, 한반도 남부의 진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蓋國과 辰國>)(개국과 진국), 앞의 책, 238∼241쪽). 그러나 진국이라는 나라 하나만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은 해석상 난점이 없지 않으며, 설사 진국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인 진국이지, 옛 삼한땅에 진국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근본적인 문제는 진국이냐 중국이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존재하였던 정치집단의 성격규명에 있는 것이다. 즉 진번 등의 이름이 아울러 나타나는 것은 조선과 衆國(중국) 혹은 진국 뿐만 아니라 진번도 문제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 가운데 하나인 진국으로 해석할 경우 그것은 진번과 대비되는 정치발전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국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본 사료를 진번의 위치비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하고 있고, 또한 진번을 예로 들어 당시의 정치발전 단계를 고려함이 없이 국명으로서 진국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인가 진국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 가운데 하나인 진국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277) 서영수, 앞의 글, 255∼260쪽.

278)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279)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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