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외교’ 신라 신정권… 고비 넘기고 뿌리 내려
<80>신정권의 운명
2013. 10. 23 18:01 입력
의자왕은 신라의 신정권을 뒤흔들 심산으로 수도와 가까운 김천·성주 지역에 대한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김유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했다. 패전은 신라의 왕경을 위험에 빠트릴 뿐만 아니라 신정권에 불만이 있는 진골 귀족들이 반격할 빌미가 될 수 있다. 다시 내전이 일어나면 신라는 멸망할 것이다.
김유신 틈새 노리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 방어
김춘추 백제와 전쟁 중 방문한 唐과 외교 시도
경주의 월성 모습. 신라 왕궁 반월성의 정문이다. 649년 8월 김유신이 백제군에게 완승을 거두고 개선하자 진덕여왕이 이곳에서 김유신을 맞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647년 10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무주고원의 높고 청명한 하늘 아래 백제군 3000여 명이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라의 무산(茂山)성·감물(甘勿)성·동잠(桐岑)성을 포위했다. 김유신이 이를 구원하기 위해 경산 사단을 이끌고 출격했다. 백제군은 일당백 정예군이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으로 이를 막았는데 백제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지쳤다.”
3배 많은 신라군이 밀렸다. 패배를 몰랐던 김유신에게 충격이었다. 신라 군중에 심리적으로 패색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김유신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전투에서 가장 용감했던 군관 비령자를 불렀다.
군인 비령자
‘삼국사기’는 둘의 대화를 이렇게 전한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비령자가 재배하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지기라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김유신의 막사에서 나온 비령자는 종 합절을 불러 아들 거진과 함께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 집에 돌아가 아내의 마음을 위로하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는 곧 말 위에 올랐고 창을 비껴들고 홀로 적진으로 돌입했다. 사지로 홀로 뛰어드는 장면을 본 병사들은 놀랐다. 비령자는 달려드는 적 두어 명을 죽이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포위된 상태에서 힘껏 싸웠다. 체력이 떨어져 갔고, 이윽고 말에서 떨어진 그는 적의 창과 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신라 병사들의 연민이 그에게 쏟아졌다.
이제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분노에 차 적진에 뛰어들려는 거진과 말 꼬삐를 잡고 이를 말리는 합절에게 집중됐다. “주인어른께서 도련님과 돌아가 마님을 위로하라 하셨어요!”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효자라 할 수 있겠느냐?” 거진은 합절의 팔을 베고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처럼 죽었다. 그러자 합절이 절규했다. “주인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살아 무엇하겠는가!” 합절도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비극의 한 장면이 신라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김유신은 분노에 찬 군대를 돌격시켰다. 백제군들도 신라군 기세에 눌렸다. ‘삼국사기’는 전투의 결과를 이렇게 전한다. “군사들이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적군을 대파하여 3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에 대한 군사적 승리
의자왕은 김유신을 계속 시험했다. 648년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경에 들어와 요거 등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김유신의 협격을 받고 물러났다. 그 이듬해 8월에도 백제 장군 은상이 신라를 침공해 왔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전투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승패를 서로 주고받아 10일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절굿공이가 뜰 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은상은 김유신의 심리전에 속았고, 그의 군대는 전멸당했다. “장군 달솔 정중과 군사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800벌을 노획하였다.” 대승리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왕경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해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김유신은 개선하면서 백제군 포로와 노획한 말을 끌고 왔을 것이고, 백성들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가 기선을 잡았다고 느꼈으리라. 이로써 신라의 신정권은 고비를 넘겼고, 뿌리를 내렸다.
당태종, 신라의 가치 주목하고 우호적
한편 앞서 648년 1월 18일 당나라 사절이 신라왕경에 도착했다. 사절단장은 여왕 승만(勝曼) 앞에 서 당태종의 국서를 읽었다. 황제의 말을 앞에서 듣듯이 여왕은 사신을 향해 공손히 서 있었다. “신라 28대왕 김진덕을 훈관 2품에 해당하는 주국(柱國) 낙랑군왕에 봉한다.”
책봉식 때 여왕 뒤에 서 있던 김춘추가 의례 후 사절단장과 접견했다. 당나라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직전 당태종은 신라의 독자 연호를 문제삼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당과 동맹을 맺는 것이 김춘추의 목적이었다. 당의 견제를 받던 고구려는 잠잠했지만 백제의 침공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해 중반 김춘추와 아들 문왕이 당의 사절을 따라 장안으로 향했다. 당에 도착한 그는 당태종이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태종은 고구려전쟁에 패한 쇼크로 혈압이 크게 올라갔고, 심장에 부담을 주어 성마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장안에 돌아온 그는 구중궁궐 심처에 틀어박혀 야심에 찬 찬탈자들이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꾸민 음모들에 대해 상상했고, 마주(馬周) 등에게 수사를 지시해 숙청이 시작됐다고 한다. 646년 3월 형부상서 장량(張亮)과 정공영(程公潁) 등이 저잣거리에서 참수됐고, 그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이후 당태종은 무척 더위를 타기 시작했고, 그러더니 647년 3월 그의 뇌혈관이 터졌다. ‘자치통감’은 “이달에 황상이 풍질(風疾)을 얻었다”고 전한다.
648년 11월께 김춘추 일행이 장안 교외에 도착했다. 광록경 유형이 마중을 나왔다. 김춘추는 교외 객사에 들어가 그에게 접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당 조정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배한 후 새삼 신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하게 됐고, 그러던 참에 신라에서 결정권을 가진 김춘추가 당을 찾았다. 더욱이 당은 전년인 647년부터 고구려와 지루한 소모전을 시작한 터였다.
당나라의 647년 고구려 침략 논의. “자주 일부 군사 파견해 강역을 시끄럽게 하자”
647년 2월 당 조정에서 고구려 침략 논의가 다시 있었다. ‘자치통감’은 사람들이 당시 공감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만드니 이를 공격하여도 빨리 뽑아버릴 수 없다.”
지구전으로 가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고구려는 산성도 많고 병력동원시스템도 발달돼 있었다. 침공이 있으면 동원령이 내려졌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쟁기를 놓고 자신이 속한 요새에 들어가 군대로 조직됐다. 이러한 것을 역이용하자는 것이다. 재앙적인 패배를 맛보고 고구려전쟁에 대한 발상이 전환됐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자주 일부의 군사를 파견해 그들(고구려)의 강역을 바꾸어 가며 시끄럽게 한다면 쟁기를 놓고 보루(堡壘)로 들어가기를 반복할 것이니 몇 년 사이에 천리 땅은 쓸쓸해지고 인심은 자연히 흩어져서 압록강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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