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1543
김부식의 의자왕 죽이기... <계백>도 당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여섯 번째 이야기
11.10.17 15:35l최종 업데이트 11.10.17 15:35l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계백>. 의자왕(조재현 분)과 계백(이서진 분). ⓒ MBC
MBC <계백>은 계백 장군을 통해 백제 역사를 재조명하겠다는 취지를 표방한 드라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계백 장군도 올바로 조명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제사를 올바로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선 현재, 이 드라마는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계백 띄우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도리어 백제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백 띄우기'가 '의자왕 죽이기'로, 나아가 '백제사 죽이기'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계백>의 '의자왕 죽이기'는, 의자왕의 핵심 업적 중 하나를 계백의 업적으로 바꿔치기한 데서도 드러난다. 의자왕의 핵심 업적이란 즉위 이듬해인 642년에 선덕여왕을 상대로 40여 개의 신라 성(城)을 한 번에 빼앗은 사건을 말한다.
드라마에서는 계백이 이미 무왕(의자왕의 아버지) 때부터 대(對)신라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이 됐다고 설정했다. 특히 의자왕 즉위 이후에는 약 40개의 신라 성을 연속으로 공략하는 일대 성과를 이룩했다. 이로 인해 드라마 속의 백제인들은 통일의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다. 계백은 군신(軍神) 마르스에 비견될 만한 '전쟁의 신' 그 자체다.
신하의 업적은 임금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신하가 세운 전공이 임금의 전공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642년에 의자왕이 거둔 업적이 실은 부하 장수의 업적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서는 의자왕 2년 7월(642.8.1~8.30)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가을 7월, 왕이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신라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했다"고 말했다. 40여 개의 신라 성을 빼앗은 주역이 의자왕의 부하 장수가 아니라 의자왕 자신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르스'는 계백이 아니라 의자왕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의자왕을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런 김부식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로, 의자왕은 군사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개월 사이에 40여 성을 점령하는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진기록이다.
전쟁에만 신경을 쓰는 직업 군인이었다면 모를까, 자신이 수도를 비운 사이에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통치자가 최전방에서 그런 대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드라마 <계백>에서는 부하의 업적이 의자왕의 업적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했지만, 의자왕은 그런 전공을 세울 만한 역량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변변한 전공 없는 계백, 왜 김부식의 총아가 됐나
▲ 백제왕의 어좌.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백제문화단지 안에 있다. ⓒ 김종성
그에 비해 계백은 어떠한가? <삼국사기> 어디를 봐도, 황산벌 전투 이전에 계백이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계백을 전문적으로 다룬 <삼국사기> '계백 열전'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계백 열전'의 서두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계백은 백제인이다. 벼슬길에 나서서 달솔이 되었다. 당 현경 5년 경인년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사령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도록 하니, 계백은 장군이 되어 ……"
이에 따르면, 계백이 전쟁 무대에 데뷔한 것은 660년 백제 최후의 날이었다. 이처럼 그는 황산벌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역사에서는 객관적인 실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만약 계백이 황산벌 전투 이전에 전공을 세운 일이 있다면, 김부식은 그 점을 어떻게든 부각시켰을 것이다. 하다못해 전쟁에서 석패한 기록만 있었더라도, 김부식은 그것을 부풀리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부식은 어떻게든 계백을 띄워야 했기 때문이다. '무능한 임금'만 달랑 제시하는 것보다는, '무능한 임금과 유능한 신하'를 함께 제시하면 임금의 무능함이 한층 더 부각된다. 그래서 김부식은 의자왕과 대비될 만한 인물을 물색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계백 띄우기'다.
김부식이 '계백 위인전'인 '계백 열전'을 만든 것은, 그가 계백 띄우기에 혈안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계백 띄우기라 할 수 있는 것은, 계백이 그에 걸맞은 객관적 업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율 1할 밖에 올리지 못한 패전 팀 타자에게 '열심히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포스트시즌 MVP를 수여한다면, 이런 시상에 대해 공감할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1등만 기억하는 ○○○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그런 시상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김부식이 계백을 위인으로 만든 것은 '1등만 기억하는 ○○○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는 계백을 살림으로써 의자왕을 죽이고 나아가 백제 역사를 죽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계백 살리기는 실은 백제 죽이기였던 것이다.
▲ 계백 장군의 자택(복원물). 백제문화단지 안에 있다. ⓒ 김종성
김부식의 '백제사' 죽이기, 도 지나쳤다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 즉 위인전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만들었는지는 '효녀 지은 열전'과 '설씨 여인 열전'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열전 목록에 들어간 여성은 이들 2명뿐이다.
지은은 결혼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셨다는 이유로, 설씨 여인은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를 위해 6년간이나 기다렸다는 이유로 <삼국사기> 열전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2명의 여성으로 꼽힐 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김부식의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여성들일 뿐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문제점에 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수백 년간 조선인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영랑·술랑·안랑·남랑 등 네 대성(大聖)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학생인 최치원만 시시콜콜하게 서술하였다."
영랑 등은 신선교 인물들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신선교 인물들을 배제하고 일개 유학생에 불과한 최치원 같은 사람들만 한껏 띄운 김부식의 자의성에서도 드러나듯이, <삼국사기> 열전에 소개된 인물들의 상당수는 김부식의 취향에 부합하는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그렇게 제멋대로 편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진을 주장하는 자주파 묘청을 꺾은 뒤에 <삼국사기>를 기록했기에, 그런 압도적 분위기 속에서 사대파 김부식은 마음 놓고 역사를 왜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노라면, 김부식이 '계백 열전'을 만든 데에도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계백 같은 '훌륭한' 신하를 두고도 나라를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의자왕이 무능했으니 신라가 그런 백제를 '접수'한 것은 정당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운 계백은 진정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칭송에 걸맞은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김부식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한 근거도 없이 계백을 한껏 띄우는 것은 백제 역사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백제 역사를 한층 더 죽이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도 없이 계백을 부풀리는 것은, 계백이 뜨면 의자왕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고안해 놓은 김부식의 의도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백제사를 살리겠다고 나선 드라마 <계백>이 김부식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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