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의 다양한 견해와 일본에 건너간 가야인들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5.01.07 11:58:47
1. 임나일본부의 실체
가야와 왜의 관계사에서 한일 학계간에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던 것이 임나일본부의 문제였다. 임나일본부의 실체가 무엇인가르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연구를 대별해 보면, ① 출선기관설, ② 분국설, ③ 가야의 왜인설 ④ 백제군사령부설, ⑤ 외교사절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출선기관설은 고대 일본이 기원 후 4~6세기 동안 한반도 남부를 근대의 식민지와 같이 지배하였고, 그 중심적 통치 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설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을 거쳐 1960년대 말에는 이미 일본학계에서도 부정되었으나, 일본이나 서양의 역사교과서에는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② 분국설은 1960년대 중반에 북한의 김석형이 제시하였는데, 현재도 북한학계의 통설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야요이 시대 이래 변한과 가야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이주하여, 현재의 오카야마현 일대에 가야계 분국의 임나국을 건설하였는데, 4세기 중엽 경에 야마토가 이 임나국을 정복하고 세운 통치 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고 보는 설이다. 즉 임나일본부의 문제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에서 일어났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③ 가야의 왜인설은 분국설의 영향에서 파생된 일본학계의 자체적 수정론으로 이노우에 히데오가 제시하였다. 한반도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한 것처럼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거주하였고, 야마토왕권과 관계 없이 가야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자치적 행정 기관이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하였다.
가야지역에서 왜인들의 집단적 거주를 증명할 만한 고고학 자료가 검출되지 않으며, 문자기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지적되면서 현재는 한, 일 양국에서 부정되고 있다.
④ 백제군사령부설은 일본서기에 가야 정벌의 주체로 기록된 왜가 원래는 백제였던 것을 8세기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바꿔 쓴 것에 불과하므로, 4세기 가야정벌의 주체는 백제였고, 임나일본부는 6세기에 백제가 가야제국-임나르 군사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세운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었다고 보는 설이다.
⑤ 외교사절설은 위의 학설과는 달리 임나일본부가 관청이나 군사령부가 아니라 왜에서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로 파악한 연구로, 현재 한, 일 양국의 학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의 기록에서 왜의 정치적 압박이나 백제의 군사적 강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활동은 외교에 국한되고 있다. 셋째, 일본부의 외교활동은 전반의 친 백제, 반 신라 노선에서 후반의 친 신라, 반 백제 노선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가야 제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다.
넷째, 일본부는 가야왕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가야인에게, 간접적으로는 아라국왕(함안)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다섯째, 일본부와 왜왕의 관계는 점차 멀어져 갔고, 뒤에는 왜왕의 명령이 백제와 신라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여섯째, 일본부인 가와치노 아타히와 기비노오미는 일본열도로 이주하였던 가야계 도래씨족의 일원이었다.
일곱째, 가야제국은 일본부를 신라와 백제의 침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2. 가야인들의 일본 열도 진출
가야는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최초로 인식한 외국이었고, 전쟁과 정치적 변동을 피하여 주기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한 가야인들은 고대일본의 문화 발전과 국가 형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일본열도에서 가야인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소수 재일동포사학자들에서 시작되었으나, 현재의 한국인 조상의 흔적 찾기 일본투어에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열도로 이주한 가야인들의 흔적은 형질자료, 문헌자료, 고고학자료, 지명과 전승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① 형질자료는 가야와 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인골의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② 문헌자료상의 흔적은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국조본기, 풍토기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③ 고고학 자료는 후쿠오카현 아마기시의 이케노카미 유적처럼 출토유물의 70퍼센트 이상이 가야계 유물로 밝혀지는 예도 있으며, 토기, 철기, 갑옷, 마구, 부뚜막, 산성 등과 같이 야요이 시대에서 고분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종류의 유물에서 가야계 주민의 이주가 상정될 수 있다.
④ 지명과 전승자료로는 가야계 제철집단의 거주에서 유래된 다타라, 기비의 가야쿠니노미야쓰코가 8세기까지 지배하던 가야군, 아스카 가야노모리의 가야나루미신사, 가와치의 가라쿠니노무라지가 주신으로 모셔지는 가라쿠니신사, 오우미의 아라신사 등이 저명한데, 일본열도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조상신을 모시고 숭배하던 신사와 지명은 수없이 확인된다.
속일본기는 772년 당시 야마토국 다케이치군에 거주하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한(韓) 계통의 도래인들이었으며 이마키군(今來郡)으로 불려렸다고 한다. 즉, ‘지금 온 사람’을 의미하며 백제계가 그 주류였으나, 그 전에 왔던 후루키(古來), 즉 ‘예전에 온 사람’의 집단은 가야인들이었다.
근년 한국학계에서 고대 일본의 핵심부에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내렸던 가야인들의 모습을 되살리는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연구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사학자들이 내세웠던 일선동조론이나 북한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분국론과 같이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내셔널리즘이 되어서는 곤란하며, 현대적 국가의식의 과잉으로 투영된 고대 한일관계사의 복원은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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