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팔국 - 사천시사

가야 2019. 10. 13. 18:32

출처 : http://bit.ly/1EYHa36


포상팔국

삼한시대와 유사한 시기 또는 삼한시대의 중기부터 포상팔국(浦上八國)이 나타난다. 대략 기원전 42년 가락건국(駕洛建國)을 즈음하여 육가야(六伽倻)와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모습이 보다 분명하여졌다고 보여 진다. 포상팔국의 태동은 기원전 108년 한(漢)에게 멸망되었던 고조선의 유민, 그들이 사용하였던 철기문화, 그리고 중국문물의 교역통로인 해안교역통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 포상팔국은 대략 기원전 42년 가락건국 시점으로부터 포상팔국의 전쟁에서 신라ㆍ가야 연합국에게 패배한 212년까지 해안연안의 소국가로 융성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포상팔국은 지금의 한려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남 중서부에서 전남 동부 남해안에 위치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포상팔국의 시대적 상황과 지정학적 위상은 동쪽 변한의 서진과 서쪽 마한세력의 동진이 쌍방에서 뻗어와 마주치는 세력권의 중심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동쪽에 있는 변한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제각기 국가의 모습을 가진 여러 나라들이 가야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마한이 백제권을 통일하여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변한과 마한은 모두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농경문화의 특질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포상팔국은 연합된 세력이 아니라 각자의 독자성을 가진 소국으로 남해연안에 하나의 해양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농경중심이라기 보다는 어류채취와 교역 중심의 생활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농경문화 중심의 두 세력권과 해양문화 중심의 하나의 세력권이 상호 인접하여 있으면서 교역과 갈등의 마찰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상세력의 별 읍 여덟 개 나라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 골포국(骨浦國)-마산과 창원을 중심, ② 칠포국(柒浦國)- 칠원 또는 진동만을 중심, ③ 고사포국(古史浦國)-고성(곤양 하동), ④ 보라국, ⑤ 고자국(古自國) -고성 통영지방, ⑥ 사물국(史勿國)-사천 삼천포 중심 등이 거론되고 있다. 포상팔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머지 포상국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포상팔국이라는 용어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나중에 신라 경덕왕(서기 742~765)이 골포를 합포로 개칭하였는데, 여기에 나타나 있는 포상팔국의 이름으로만 보면 포상팔국의 위치는 대부분 현재 사천시에서 창원시 사이에 있었으리라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현재의 전남 동부ㆍ남해ㆍ금남ㆍ하동ㆍ곤양까지의 지역이 포상팔국에 포함되었는지 여부는 문헌상 확인이 곤란하다. 다만 곤양이 포상팔국의 한 국가라는 설에 대하여 실재여부의 증명은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포상팔국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곤양이 포상팔국 중 하나라는 설은 곤양지역이 삼한시대 때에 이미 곤(군)미국이라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안교역통로의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에 바로 접해 있고, 국가교역 지형과 여건이 해상교역로상에서 도저히 제외시킬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유력하다. 또한 나중에 곤양지역의 지명도 포촌현(浦村縣, 삼국시대), 하읍현(河邑縣, 통일신라시대), 생량현(省良縣, 통일신라시대), 철성(鐵城, 통일신라시대 이후), 곤명현(昆明縣, 고려 태조 23년 서기 940년), 곤산(昆山, 조선초기), 곤남군(昆南郡, 서기 1419년 세종 1년 ~ 1437년 세종 19년), 곤양군(昆陽郡, 1437년 ~ 1914년 477년간)으로 바뀌어졌는데, 바로 삼국시대에 포촌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졌다는 점도 곤양지역이 포상팔국의 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즉 곤양지역은 삼한시대의 곤(군)미국의 정치체제에 더하여 연안 해상세력권의 포상팔국에 포함될 수 있는 지리적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포상팔국 중 고사포국(古史浦國)을 고성지역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미 고자국(古自國)이 고성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또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 고성지역임을 감안 할 때, 한 지역에 두 개의 국가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본다. 고사포국(古史浦國)이라는 지명에 나타난 것과 같이 사(史)자가 사천지역의 사물국(史勿國)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라 때 곤양지역을 포촌현(浦村縣)으로 명칭한 것을 보면 곤양지역이 포(浦)로서의 기능과 명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고사포국(古史浦國)이 곤양ㆍ금남ㆍ하동ㆍ남해의 해안연안을 지칭할 수도 있다고 보여 진다. 또 <여유당전서> 강역고에는 포상팔국23)의 위치 비정을 ‘동쪽의 창원에서 서쪽의 곤양에 이르기까지의 8읍’이라 하였고, 또 <한국사대사전>24) 에는 동환록(東渶錄)을 인용하여 ‘곤미국(昆彌國)은 포상팔국의 하나로 변한의 곤(군)미국이다.’라고 쓰여 있음을 고려할 때 곤양이 포상팔국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여기서 동환록은 어느 시기에 나온 문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곤(군)미국’의 표현은 변한 12국(13국)의 하나인 ‘변군미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되며 변군미국은 곤양지역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25) 
  
그리고 포상팔국의 위치도 해안을 따라서 먼 곳에 위치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접한 일정 지역에 다닥다닥 붙어서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중에 금관가야(金官伽倻,김해)와 아라국(阿羅國, 함안)을 침공할 때에도 포상팔국이 연합하여 침공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연합군의 연락 및 공격 공조체제유지 필요 등의 여건과, 대규모 병력 이동이 아닌 한, 포상팔국의 각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각자 흩어져 존재하여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왕자 내음(股音)이 지휘하는 6부(部) 군사를 동원해서 포상팔국 팔만의 군사를 격퇴시켰다는 기록에서 미루어 보아도 포상팔국의 각 나라에서 추출된 군사는 소규모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소규모의 군사 차출은 인접한 국가 간의 연합협공일 때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골포국(현재 마산 창원지역) 옆에 칠포국(진동만 지역)이 있고, 칠포국 바로 곁에 고자국(고성 통영 지역)이 있으며, 고자국에 이어서 사물국(사천 삼천포 지역)이 있다고 한다면, 사물국 곁에 또 다른 국가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물국에 인접한 포상팔국 중의 하나가 고사포국(古史浦國)이라는 판단이고, 바로 현재의 하동 남해 금남 곤양지역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여 본다. 또한 포상팔국은 상호 연합하면서 독자적 체제를 가진 기동성 있는 별개의 세력으로 저마다 강력하게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포상팔국의 지역은 가야 세력권 밖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지정학적인 측면 뿐 아니라, 한 군현이나 왜국을 상대로 했던 해상교역에서 가야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교역통로로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에는 3세기 당시 황해도 근방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가 기록되어 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는 항로 26)가 그것이다. 이 항로는 당시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 문물이 이동하던 경로이기도 하다. 한려수도를 중심으로 늑도(勒島)의 교역항을 비롯하여 남해에 인접해 있던 여러 나라들은 이러한 선진 문물 이동로의 관문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남해안 해변 통로국의 하나였던 곤(군)미국인 곤양지역도 이런 측면에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반도 내륙의 어떤 지역보다 앞서 있었다고 추정된다. 
  
동시에 곤양지역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부자도 되고 황제도 되었다는 전설 등은 이 지역이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통로 중의 하나였음을 나타내는 흔적이라 할 수 있고, 동시에 곤양지역의 사람들이 꼭 중국의 문물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였던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해안 교역통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으로 진출해 성공하였다는 능동성을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근거는 곤양지역의 전설 중에 유독 중국과 관련된 전설27)이 많은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주석

23)포상팔국 포상팔국의 위치비정은 대체로 정약용의 견해에 지금까지 별다른 이견이 없다.
  “鏞案旣云浦上不云海中則今巨濟南海不在計也今浦上之地東自昌原西至昆陽恰爲八邑而咸安固城本有加耶之名骨浦漆浦已著新羅之史八邑之爲浦上八國無疑縱有沿革不甚相違也” <與猶堂全書> 6 集彊域考
 
24)<韓國史大事典> 敎育出版公社, 1981, 126쪽.

25)사천시사편찬위원회, 사천시사(상), 2003, 340쪽.

26)“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瀚海.” <三國志>

27)예컨대 목단이라는 이름의 유래, 곽가등 전설, 중국 명나라를 세워 첫 황제가 된 주원장(朱元璋)의 부모가 묻혔다는 제방의 전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곤양지역에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와 지명 등이 많은 것은 조선시대의 유교숭배정책의 수동적 영향이 아니라,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과 활발하게 전개된 문물교역의 능동적 영향 탓이 아닌가 한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