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0426


MB는 이 사람 닮은 꼴? 절절히 기도하십시오

[게릴라칼럼] 신라 말기 임금 헌강왕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15.02.10 13:57 l 최종 업데이트 15.02.10 13:57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퇴임 후 상왕이 되어 회고록을 썼다면, 자화자찬 일색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비웃음을 샀을 임금이 있다. 신라 말기의 임금이자 진성여왕의 오빠인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헌강왕 시대의 동아시아인들이 보기에는 당나라가 세계 최강이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세계 최강 당나라에서 시작된 '글로벌 위기'가 전파되고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개인파산·경제파탄·민란의 혼란상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황소의 난(875~884년)을 겪고 있었다. 


황소의 난으로 인한 체제 위기가 각국에 전파된 결과로, 9세기 초 동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로 이행했다. 헌강왕은 바로 그 황소의 난이 시작된 해에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발(發) 위기가 주변으로 번지는 시점에서 신라왕이 되었던 것이다. 


헌강왕이 죽은 지 3년 뒤인 889년, 신라는 결정적인 재정위기에 직면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진성여왕이 임금이던 그 해에 신라는 "국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해지는 위기를 겪었다. 국고가 빈 것은 세금이 걷히지 않아서였고, 세금이 안 걷힌 것은 민간경제가 파탄 났기 때문이다. 신라의 최대 동맹국이자 최대 무역 파트너인 당나라의 위기가 신라에서도 명확히 재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헌강왕이 죽은 지 3년 뒤에 신라가 재정위기를 당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원인은 헌강왕 때부터 이미 축적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런 경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889년의 위기는 헌강왕이 죽은 886년 이전부터 축적되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민심이 어수선했던 신라 헌강왕 시대


▲  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헌강왕릉. 이 사진은 서울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것이다. ⓒ 김종성


헌강왕 시대에 이미 위기가 증폭되고 있었다는 점은, 민심이 어수선하고 군사반란이 발생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편에 따르면, 880년에 헌강왕이 경주 동쪽 지역을 순행하자 '모습이 해괴하고 옷차림이 이상한' 네 사람이 임금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산과 바다의 정령들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해괴한 차림으로 임금의 순행을 방해하고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왕의 지지 세력이었을 리는 없다. 그들이 왕의 지지 세력이었다면 그들을 해괴하고 이상한 사람들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을 두고 백성들은 '자연의 정령들이 나타났다'고 수군댔다.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롭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민심이 흉흉해질 수 있다는 징표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을 보면 헌강왕이 민심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문이 퍼진 다음 달에 중간직 공직자인 신홍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보면, 그 네 명의 출현이 민심을 교란하는 데 기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당나라에서 시작된 체제 위기가 신라에도 전파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 바람이 순조롭습니다"


그렇다면, 헌강왕은 그런 위기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었을까? 그는 신라가 조만간 재정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그의 상황 판단이 어땠는지가 위의 헌강왕 편에 나타난다.  


때는 음력으로 헌강왕 6년 9월 9일이다. 양력으로는 881년 10월 5일이었다. 헌강왕은 측근들을 대동하고 월상루라는 누각에 올라갔다. 거기서 경주 시내를 바라보니, 즐비한 기와집이 눈에 들어오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헌강왕은 그 광경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시중(총리급)인 민공을 바라보며 "듣자 하니, 지금 백성들은 지붕을 덮을 때 기와를 쓰면 썼지 짚을 쓰지는 않는다던데"라면서 "밥을 지을 때도 숯을 쓰면 썼지 나무를 때지는 않는다던데, 정말로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때 헌강왕은 스무 살 전후였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는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반말을 했을지라도 비공식적 자리에서는 존댓말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그의 질문을 위와 같이 구성했다. 


헌강왕의 말을 들은 민공은 맞장구를 치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로 음양이 고르고 비바람이 순조롭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게 넉넉하여 국경은 평온하고 민간은 안락합니다"라면서 "이는 모두 거룩하신 덕의 결과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이 기뻐했다"고 헌강왕 편은 말한다. 


헌강왕이 본 것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 강남의 풍경이었다. 강남구 논현동쯤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 대다수가 헌강왕이 본 것처럼 기와집에서 살고 숯으로 불을 땠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헌강왕은 신라 전체가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 시중 민공의 반응에도 만족을 느꼈다. 


그런 헌강왕이 만약에 퇴임 후에 상왕이 됐다면, 그는 '논현동'에서 본 풍경을 토대로 회고록을 썼을지도 모른다. 당나라발 위기가 신라에 서서히 전이되고 있으며 그것이 몇 년 뒤 신라를 일대 위기로 몰아갈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거나 혹은 무시한 채 말이다. 


헌강왕의 상황 판단,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그것과 닮았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 있는 한 대형서점 진열되어 있다. ⓒ 이희훈


헌강왕의 상황 판단은 최근 회고록을 출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을 읽다 보면, 그가 퇴임한 지 3년째인 현재 대한민국 경제가 이토록 어려운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회고록에 적힌 대로라면, 대한민국 경제가 지금 이렇지 않아야 할 게 아닌가.


이 전 대통령도 헌강왕처럼 '시중 민공'의 달콤한 말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실적을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회고록 169쪽과 170쪽에 적혀 있다. 여기에는 2012년 10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한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의 언급이 소개되어 있다. 고든 브라운이 역임한 총리 직책은 신라로 치면 시중 직책이다. 


"한국 경제는 매우 건실합니다. 어떻게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하는지 이 대통령께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 한 가지는 한국의 국제적인 명성이 대통령님 지도력 하에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에 대해 한국 국민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일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할 때 저는 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시중 민공은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로 음양이 고르고 비바람이 순조롭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게 넉넉하여 국경은 평온하고 민간은 안락합니다"라면서 "이는 모두 거룩하신 덕의 결과입니다"라며 헌강왕을 치켜세웠다. 고든 브라운 전 '시중'도 그런 식의 말을 이 전 대통령의 귀에 넣어주었다. 물론 고든 브라운의 말은 립서비스였을 것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될 칭찬을 회고록에 자세히 소개했다는 것 자체가, 이 전 대통령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고록을 썼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국민 앞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쓴 게 아니라, 귓전을 맴도는 달콤한 말에 취해 회고록을 썼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점은 181쪽에 써넣은 경제 성적의 총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5년간의 경제 실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GDP 기준으로 세계경제의 61퍼센트에 달하는 45개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경제 영토는 세계 3위 수준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 2010년 우리는 세계 7대 수출대국으로 발돋움했고, 2011년 12월에는 마침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연간 무역액 1조 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매진한 결과였다."


지금 대한민국 서민들 중에 저런 총평에 공감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전 대통령이 언급한 수치를 '쾌거'라고 느끼며 가정경제에 만족할 서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처럼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대한민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강해졌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런데 그는 막상 구체적인 경제 상황을 언급할 때는 어딘가가 좀 막혔던 모양이다. '내가 전반적으로 잘한 건 확실한데, 이 분야는 왜 이렇게 된 걸까?'라는 의문을 본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듯하다. 자신이 경제 전반을 잘 이끌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실업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구체적 현안에서는 '이걸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라는 곤혹을 느낀 것 같다. 


일례로, 회고록 679쪽에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선방했다"고 자평한 뒤 "CEO 출신 대통령에게 걸었던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지만, 두 차례 세계경제위기의 파장을 상쇄하기는 힘겨웠다"고 말했다. 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재임 중의 세계경제위기 때문이었다고 얼버무린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부동산 및 주택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방면에서도 자신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게 잘했다면, 지금 상태가 이 모양이냐?"라는 비판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 670쪽에서 "그 과정에서 전세물량 부족 등 피해갈 수 없는 많은 부작용이 파생된 것도 사실"이라며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충격을 최소화하고 주택시장의 연착륙을 유도하는 것이 향후 정부의 과제라 할 것이다"라고 매듭지었다. 전세물량 부족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며 이런 문제는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떠넘긴 것이다.  


헌강왕처럼 되지 않도록, 절절히 기도해야


이처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한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아졌다며 자화자찬해놓고서도, 막상 구체적인 대목에서는 '이 문제는 불가항력적인 이유 때문에 해결할 수 없었다'느니 '이 문제는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었다'느니 '이 문제는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느니 하며 얼버무렸다. '전 시중' 고든 브라운의 칭찬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 그로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제3의 요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 대통령은 19세기 중반부터 세계를 지배해온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흔들리고 있고, 이로 인한 체제 위기가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에 동맹국인 대한민국에 끊임없이 전이되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에 슬픈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회고록이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헌강왕은 시중 민공의 칭찬에 가슴이 들떠 당나라에서 불어오는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지 3년 뒤에 신라는 국고가 텅 비는 재정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자 국가권력이 흔들리면서 민란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새 시대의 기치를 내건 인물들이 견훤·기훤·양길·궁예 등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업적을 과대 포장할 게 아니라, 자신이 헌강왕 같은 인물이 되지 않기를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