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410/1/BBSMSTR_000000010227/view.do


봉선의식 기획한 측천무후… 속내는 ‘권력다지기’

기사입력 2014.04.09 16:49 


<101> 의례행사에 가려진 연개소문의 죽음


당나라 전쟁 미루고 의례행사 통해 국력 과시

연남생 중국에 항복 타진…고구려 내분 조짐 


664년 10월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었다. 22년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누린 절대 권력자, 천하의 당태종을 물리친 그의 죽음은 동아시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664) 10월 조는 이렇게 전한다. “이달에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여러 자식에 유언해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마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이웃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바다 건너 일본 측 기록은 그의 사망 ‘시점’과 유언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인접한 중국 측 기록은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고종은 아버지를 패배시켜 반신불수의 불구자로 만들고 사망에 이르게 한 연개소문, 그의 죽음을 몰랐다는 말인가?


중국 산둥 태산(泰山)의 자락. 평원 가운데 깎아지른 듯한 모습 때문에 이곳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신성한 종교적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됐다. 필자제공


의례의 계절


당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 신경 쓰고 있었다. 665년 2월에 웅진부성, 당나라 칙사 유인원이 보는 앞에서 백마를 잡고 백제의 부여융과 신라의 왕자 김인문이 맹약을 맺었다. 이어 그해 8월 재차 공주의 취리산에서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 부여융이 맹약의식을 거행했다. 유인궤가 지은 축문 일부는 이러하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먼저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공하는 자는 신이 온갖 재앙을 내려 자식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을 끊어지게 할 것이다. 금가루로 쓴 증표를 종묘에 간직하고 자손만대에 어기지 말지어다.”


665년 8월 황제는 신라 왕자 김인문과 고구려 보장왕의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로 소환했다. 666년 정월 초하루 산둥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의식이 행해질 터였다. 하늘과 땅에 바쳐진 봉선은 중국 통치자들이 행할 수 있는 의례행사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무게 있는 것이다. 태산은 광활한 화북평원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발 1545m이며, 주변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태산에 오름으로써 순례자는 세계의 중심에 도달했고 세속을 넘어 신성한 국면으로 들어갔다. 광대무변한 산의 정상은 삼라만상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봉선의례가 후한의 광무제 이후 600년 만에 행해진 것은 그 규모와 절차 준수의 어려움, 그리고 전쟁 때문이었다. 당태종도 641년에 행하려고 했지만 초원의 패자 설연타의 침공 우려 때문에 중지했고, 646년에도 시행하려 했지만 고구려에서 패전의 후유증으로 당태종이 중풍에 걸리는 바람에 중지했다. 그의 마지막 날도 고구려와의 전쟁에 바쳐졌다.


여성이 주도한 봉선


이번 봉선은 측천무후가 기획한 것이었다. 655년부터 황후가 된 그녀는 봉선을 황제에게 은근히 제안해 왔고, 권력을 거의 장악한 659년 그녀의 대변자 허경종에게 그 문제에 대해 토의하도록 지시했다. 660년 후반에 당고종은 중풍으로 고생했는데, 그것은 주기적으로 나타났고 부분적 마비를 가져와 그의 모습을 손상시켰다. 호전되기도 했지만 자주 재발됐다. 황제가 무기력해지자 황후는 쉽게 국정을 처리할 수 있었고, 실질적으로 천하의 통치자가 됐다. 662년 이적과 허경종 등 그녀의 지지자들이 조정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아내로서 황후의 우세한 지위는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유교적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권력은 조정의 관리들에게 은밀한 도전을 받았다. 불안한 측천무후 옆에는 태산의 종교적 숭배에 착안해 그녀의 힘을 고양시키려는 산둥 출신 방사나 유학자들이 많았다. 봉선을 통해서 그녀의 지위를 황제와 동등한 배우자로 만들고, 그녀의 비판자들을 무마시키는 한 방편으로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662년에 공표된 봉선은 느닷없이 취소됐다. 당시 당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고전하고 있었고, 하북평원의 백성들은 피폐해 있었다.


더구나 이듬해인 663년 한반도에서 왜군과 전쟁을 해야 했다. 왜군을 백제에서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664년 7월에 다시 666년 정월에 봉선을 거행키로 결정했다. 측천무후의 절박함이 추진력의 원료였다.


전쟁보다 중요한 의례


664년 10월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당제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그녀는 사건을 공론화시키는 것을 막았으리라. 고구려와의 전쟁은 봉선을 연기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터였다. 665년 2월 장안을 출발한 봉선 행렬이 동도인 낙양에 도착해 8개월간의 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발생했다. 고구려 연개소문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터졌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천남생의 묘지명에는 당시 사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32세 때(665년)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가 되었다. 변경(邊境)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달래려고 밖으로 변방을 순정(巡征)하였다. 그런데 두 아우 천남산(泉男産)과 천남건(泉男建)은 병사를 내어 안에서 저항하였다. 장차 평양을 함락시켜 악(惡)의 근원을 사로잡으려고,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북을 울리면서 나아갔다. 이에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당조정에) 입조(入朝)하여 그 일들을 알리려 하였는데 마침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弗德)은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公)은 현토성(玄?城)에서 수신(修身)하면서, 다시 대형(大兄) 염유(?有)를 보내 정성(精誠)의 효명(效命)을 거듭 알렸다.”


665년 연남생(634∼679)은 대형 염유를 당 조정에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봉선의례를 우선시한 측천무후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묵살했으리라.


봉선을 통한 국제질서 완성


그녀는 황제와 함께 665년 10월 태산으로 향했다. 당고종의 정권 자체가 움직이는 백 리에 달하는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이었다. 수만의 경호원들이 황제를 나타내는 깃발을 펄럭이고 금속병기를 햇빛에 번쩍이며 엄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문무백관 외에도 변방에서 온 이방인들이 있었다. 돌궐·호탄·페르시아·인도·버마·베트남·고구려·백제·신라·왜 등에서 온 지배자나 그 대리인들이었다. 당시 당은 서쪽의 신강, 러시안 투르키스탄, 옥수스 계곡, 천산북쪽 일리계곡, 한반도의 백제 등을 정복했다. 중국의 영역은 한반도에서 황해를 지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전례가 없는 팽창을 이뤘다.


665년 12월 광대한 평원에 깎아지른 듯 우뚝 솟아 있는 산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태산 아래에 도착한 후 의례학자들이 절차를 놓고 회합을 가졌다. 지신(地神)은 여성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졌고, 황후들은 의례행사에서 배위(配位)의 직위를 할당받았다. 당고종은 측천무후가 아헌(亞獻)을 행하고, 여러 왕의 비가 종헌(終獻)을 행하도록 했다. 666년 정월 초하루 건봉(乾封)으로 연호가 바뀐 그날 당고종은 태산 아래 봉의식(封儀式) 제단에서 몸소 의례를 행하고 태산 정상에 올랐다. 다음날 옥책(玉策)을 봉하는 의례를 하고 산을 내려왔다.


셋째 날 황제가 지신(地神)에게 봉선식을 행한 후 측천무후가 후궁들을 거느리고 제단으로 올라갔다. 지신을 위해 여자들이 술잔과 음식접시를 채우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지휘했다. 이 의식을 행하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노력해 왔다. 의식에 여자가 참여하는 광경을 보고 있던 관리들은 몰래 비웃기도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풍성한 연회가 하루 종일 베풀어졌다. 그 자리에서 측천무후는 내란에 휩싸인 고구려를 멸망시켜 공을 세워 권력을 확고히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리라. 그해 5월 동생들에게 밀려 위험해진 연남생이 아들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의 묘지명은 이렇게 전한다. “건봉(乾封) 원년(666) 공(公)은 아들 헌성(獻誠)을 입조(入朝)시켰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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