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501/1/BBSMSTR_000000010227/view.do


‘토번→당→고구려’ 전쟁의 암운은 東으로

기사입력 2014.04.30 16:47 


<104> 토번 섭정 가르동첸의 사망


가르동첸 생존시 당과 무력 충돌 없어

당의 고구려 내전개입…토번의 당 침공


티베트 라싸 근교 5100m 고지의 풍경. 당나라가 삼국통일 전쟁에 개입해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당시 티베트 지역의 강자 토번은 당나라 접경을 침공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필자제공

667년 2월 이적(李勣)의 당나라 대군이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했을 시점이었다. 에메랄드빛을 띠는 청해호(靑海湖)와 멀지 않은 곳에서 어느 남자가 세상을 떴다. 토번의 실권자인 그의 사망을 ‘돈황본토번역사문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토끼해에 이르러(至兎年)재상(大論:blon che) 가르동첸(東贊)이 일포(日布)에서 죽었다(死于).” ‘현자희연(賢者喜宴)’의 역주를 보면 일포는 토욕혼의 어느 지역이라고 한다. 그는 토욕혼 정복을 완료한 후 병을 얻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권력은 그의 아들들에게 상속되었다.


형제 과두정


‘구당서’는 토번에 과두체제가 들어선 것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가르동첸(祿東贊)에게 아들 5명이 있었다. 장남은 가르짠시에랴(贊悉若)인데 일찍 죽었다. 차남은 가르친링(欽陵), 3남은 가르찬파(贊婆), 4남은 가르시도(悉多于), 막내는 가르발룬(勃論)이었다. 가르동첸이 죽자 가르친링이 형제들과 함께 그 나라를 오로지 하였다(專其國)”. 전쟁은 도미노처럼 토번→당→고구려로 서에서 동으로 밀려갔다. 요동에서 남생이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생들과 전쟁을 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하고 있던 그 시점에 티베트고원에서는 가르친링이 동생들을 하나로 묶어 토번제국의 권력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지배 지역을 잠식하고 있었다. 토번은 당이 고구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요동에 전력을 집중한 틈을 이용해 과감하게 실크로드 배후 지역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가르동첸이 연개소문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르동첸의 집안은 토번의 명족 갈이씨(Gar)였다. 가르동첸의 권력 장악은 토번국왕 승쩬깐포의 총애를 두고 이뤄진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는 유력한 정치 라이벌인 양동(羊同) 총독 쥬세(Zutse)를 제거하면서 최고 권력자의 길을 걷게 됐다. 쥬세는 승쩬깐포가 양동을 격파하고 티베트고원을 석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공신이었다.


갈이씨의 권력 장악


양동은 인도의 케시미르 지방 근처의 캐라코람 산맥 쪽에 위치한 국가이며, 티베트고원에서 토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승쩬깐포는 그의 여동생을 양동의 왕 리그미(Ligmi)에게 주고서야 평화를 얻었고 기회를 잡아 일격을 가했다. 644년 양동의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 리그미가 숨파(Sumpa)의 서쪽에 순시를 간 것을 오빠 승쩬깐포에게 알렸다. 도로상에 병사들을 매복시켰고 급습을 가해 리그미를 척살했다. 이로 인해 양동의 군대는 대패했고 승쩬깐포는 티베트고원의 완전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작전을 실전에서 지휘한 자가 쥬세였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양동의 총독이 됐다. 토번의 ‘편년기’를 보면 쥬세가 음모를 꾸민 후 승쩬깐포를 키리봄성(Khri boms)에 은밀히 초대했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가르동첸은 승쩬깐포가 가는 것을 중지케 하고 군대를 거기에 보냈다고 한다. 기다리던 승쩬깐포는 오지 않고 가르동첸의 군대가 키리봄성에 밀어닥쳤다. 이를 알아차린 쥬세는 자살하고 만다. 가르동첸은 문자를 알지 못했지만 군대를 운영하는 능력과 술책에 뛰어났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가르동첸은 라이벌을 제거하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고, 승쩬깐포의 사망 후 그의 가문은 토번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주전(主戰)파 갈이씨


그래도 가르동첸은 당과 인접한 토번의 동북지역 책임자에 불과했다. 승쩬깐포 때 이미 전 국토를 6명의 총독에게 위임해 분할 통치하는 제도가 확립돼 있었던 것이다. 승쩬이 죽은 후 이뤄진 갈이씨 일개 가문의 독주는 토번 내 다른 귀족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가르동첸은 군사적 팽창을 통해 내부적인 갈등의 발생 소지를 감소시켰을 느낌이 든다. 그는 654년 병력 12만을 동원해 백란씨(白氏)를 쳐서 그 땅을 점령했으며, 659년 당과 토욕혼 사이에서 모종의 의심스러운 밀담이 오고가자 토욕혼을 급습해 그 괴뢰왕을 죽이기까지 했다. 군사적 공훈을 세우는 것만이 그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토번사의 거장 사또(佐藤長)는 갈이씨 일가를 주전파(主戰派)로 명명하고 있다.


가르동첸은 660년에 당이 한반도 통일전쟁에 개입하자 그 이듬해 천산의 궁월(弓月)을 충동해 당에 반기를 들게 했으며, 662년에 가서 이를 표면화했다. 토번과 궁월이 연합한 군대가 소륵(疎勒-Kashgar) 남쪽에서 소해정이 이끄는 당군과 마주쳤다. 당군은 뇌물을 주고 정면충돌을 피했다. 이듬해인 663년 토번은 파미르고원의 발율(勃律-Balur)과 왁한(Wakhan)의 연운보를 점령함으로써 타림분지에 대한 전략적 위치를 선점하게 됐고, 토욕혼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래도 가르동첸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당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다. 당이 한반도와 만주에 전력을 집중한 시기라 토번과의 전쟁을 되도록이면 피했다. 가르동첸의 경우 전왕 승쩬깐포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당과의 결혼동맹 체결에 중추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네팔국의 공주를 승쩬깐포의 비(妃)로 맞이하는 일을 성사시킨 바 있다. 그에게는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승쩬깐포의 유조를 받아 어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토번사 대가 헬무트 호프만(Helmut Hoffman)에 의하면 가르동첸의 섭정에 대해 어린 토번왕은 최소한 표면상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고, 정국 문제에 있어도 그에게 위임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갈이씨 형제의 중국 침공


하지만 그의 아들들이 과두정을 행할 당시 토번왕은 친정을 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섭정의 객관적인 필요성이 사라진 때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 형제의 과두정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군대 장악을 지속시킬 필요성을 절감케 했고, 군대에서 그들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국내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야 했던 것이다.


토번 팽창은 이러한 토번의 국내 사정과 당의 삼국통일 전쟁 개입이란 대외적 사정이 맞물려 비롯됐다. 갈이씨 형제가 토번 군대를 장악한 후 당은 30여 년간 그 침략을 받게 됐다. 갈이씨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 당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고, 그 승리의 결실을 재분배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은 토번제국을 분할 지배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토번(吐蕃)의 국왕(贊普)인 만손만첸(器弩悉弄) 어려(尙幼), 가르친링 형제(論欽陵兄弟)가 나랏일을 했는데, 형제 모두가 용감하고 경륜이 있어(勇略) 주변의 여러 민족들이 두려워했다. 가르친링(欽陵)이 중앙에서 권력을 잡고 나머지 동생들은 군대를 장악해 각 방면을 나눠 차지하였는데, 가르찬파(贊婆)는 항상 동쪽 변경을 맡아 30여 년 동안 중국의 우환이 됐다.”


667년 동생 가르찬파가 중국의 12개 기미부주를 공격해 장악했고, 고구려 전쟁에 여념이 없었던 당은 그것을 깨끗이 포기했다. 그때 당의 총사령관 이적은 고구려의 서북쪽 최대의 지배거점 신성(新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것의 함락 여부가 서역의 지배 지역을 희생해 가며 고구려와 전쟁을 감행하고 있던 당의 고구려 공략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667년) 이적은 처음으로 요하를 건너서 여러 장군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두리의 요충지이니 먼저 이를 얻지 아니하면 나머지 성들은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전쟁의 물결이 티베트고원에서 중국을 지나 고구려를 향해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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