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605/1/BBSMSTR_000000010227/view.do


백제·고구려 멸망시킨 唐고산지대 전투에 ‘벌벌벌’

기사입력 2014. 06. 04   16:58 


<109> 토번과 전쟁을 망설이는 당제국


중국 군대 전투 반경 한정적 되도록 낮은 지역서 작전수행

고산에 적응한 토번군 위력 병력자원 부족한 唐 누를 듯



티베트의 기마행렬


668년 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들은 추운 겨울을 보냈다. 한파 속에서 당이 세운 신정부에 참여할 고구려인들을 모집하는 방이 붙자 조국의 멸망을 실감하기 시작했으리라. 그해 12월 당은 평양성에 총독부와 같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고구려 영토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설치해 군정지배체제를 확립했다.


병력 2만으로 유지되는 안동도호부였다. 당은 그 무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중추를 뿌리채 뽑아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인들 가운데 군인으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춘 자와 수공업 기술자 예능인 그리고 고위 핵심 귀족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20만 이상에 달하는 평양 수도권 인구를 중국 내지로 이주시킬 터였다. 당은 정복지역에서 상습적으로 이러한 짓을 해왔다. 국가시스템을 운영한 인력들을 잡아 가야 그 나라가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안동도호부 평양에서 신성으로


669년 4월 고구려인들의 반항이 시작됐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다음해(669) 4월 고구려에서 이반(離叛)하는 사람이 많아 칙령을 내려 고려의 호구 3만8200을 장강과 회수 남쪽 및 산남(山南)ㆍ경서(京西) 여러 지역의 넓고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당의 통제하에 있던 많은 고구려 사람들이 이탈했고, 당은 선별된 고구려의 호구를 중국 내지로 옮겼다.


고구려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배와 통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구당서』 권83, 설인귀전을 보면 이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중반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고구려 중심에 있어야 할 안동도호부가 요동에서 당나라 영토 요서로 곧장 갈 수 있는 서북변방 신성으로 이동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보면 이는 당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만주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고구려 유민의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기에는 궁색하다. 뭔가 거대한 힘이 당 제국을 압박한 것 같다.


669년 8월 당 고종은 양주(涼州)로 순행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많은 신하들이 당시 농우(隴右) 지역이 피폐해진 점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황제가 5품 이상 관인들을 불러 『먼 풍속을 보기 위해 돌아보려는 것인데, 어찌 뒤에서 반대를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상형대부(祥刑大夫) 내공민(公敏)이 나서 『순행은 제왕의 당연한 일이지만, 고구려가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잔여 도적(즉 반란 세력)이 여전히 많고, 서변(西邊)을 경략(經略)하는 일로 역시 군대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농우의 호구가 피폐하므로 황제가 이르면 많은 것이 필요한데, 이를 공급하는 것이 진실로 쉽지 않다』라고 하자, 고종은 순행을 그만두었다.”


“서쪽 변경을 경략하는 일”로 군대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토번과의 군사적 대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당은 668년 토번이 변경을 침략하자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청해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같은 해 3월 유번례(劉審禮)를 서역도안무대사에 임명해 대응했다. 669년 7월에도 계필하력을 오해도(烏海道:청해성 喀拉海) 행군대총관에 임명해 토번의 공격을 받고 있던 토욕혼인들을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당이 지배하던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토번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고,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번과 전쟁을 기피한 당제국


당이 토번과의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7년 전인 662년 12월 당나라 장군 소해정이 타림분지 북쪽 산록인 천산에서 토번 군대를 만났을 때에도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토번군에게 돈을 주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663년 토번이 토욕혼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667년 토번이 사막남로 차말국(且末國)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이를 방관했다.


669년에 9월에 가서도 당조는 기근을 이유로 끝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당시 토번이 서역의 실크로드 지역을 급속도로 점령해 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당은 토번과의 본격적인 전쟁돌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백제와 동북의 강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상태인데도 당조정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전쟁 기피가 야기할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좌상 강각의 주장처럼 토번의 팽창을 저지하지 못하면 변경의 고질적 우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전투경험이 많은 계필하력의 언급이다. 그는 산길이 험해 토번군을 멀리 추격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군량 운송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는 해발고도가 4000m에 달하는 고원에서의 작전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이 토번의 팽창을 막고자 한다면 전쟁터는 청해호 지역이 될 것이다. 그곳은 해발고도 3200m에 달한다. 중국 병사들이 고산지대에 적응한 토번군대와 그곳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중국의 군대는 되도록 낮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려고 할 것이고, 작전반경은 한정돼 있다. 고도의 제한 없이 싸울 수 있는 토번인들은 이를 최대한 이용해 중국인 군대의 허를 칠 것이다. 해발이 낮아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 고원에 적응된 사람들은 저지에서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다.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당조정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년 전만 해도 약간의 대안이 있었다. 고원지대에서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자원을 당제국은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667년 2월 고구려에 총력을 투입한 사이에 그것을 모두 상실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중국화 되지 않은) 생강족(生羌族:티베트족)이 사는 12개(羈糜/기미)주가 토번에게 격파되자(667년) 3월 18일에 이를 모두 철폐했다.” 고산지대에 적응한 인적자원을 토번이 이미 쓸어간 상태였다. 747년 파미르고원에서 하서부절도사(河西副節度使) 고선지(高仙芝)가 토번군을 격파하는 결정적인 반전이 있었다. 그를 거듭 중용한 사람은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부몽영찰이었다. ‘원화성찬(元和姓纂)’에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티베트인(西羌人)의 것이라고 한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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