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3755


북경 망명 준비하던 고종, 이완용 대궐 숙직 다음 날 급서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43호 | 20111106 입력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난 일제에 고종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고종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일제와 친일파는 전전긍긍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의 가치를 높이 샀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고종이 독립운동가들과 손잡고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었다.


고종 장례식과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된 고종 빈소. 고종독살설은 3·1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운동의 시대

① 고종 독살설


황제로서 시종 기회주의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고종은 망국 후에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 고종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실을 복위시키려는 복벽파(復<8F9F>派)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들도 고종 망명에 긍정적이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였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倍達)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했다. 신한혁명단은 광복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고종 망명 계획을 수립했다. 신한혁명단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을 국내로 잠입시켜 고종을 신한혁명단 당수(黨首)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려 했다.


1 우당 이회영. 고종의 사돈이기도 했던 이회영은 고종 망명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다. 2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평생을 장애인 봉사활동으로 보냈다.


성낙형 등은 1915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大勢)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중한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독립운동가 이정규(李丁奎)의 우당 이회영 약전(略傳)과 구 한국군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는 고종 망명 계획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어서 이회영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기록은 모두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망명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이 선뜻 승낙했다고 전한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외적인 조건은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였다. 여기에 피압박 민족들이 크게 고무되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왜(倭) 황실 방자(芳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교영으로부터 고종의 승낙 의사를 전달받은 이회영이 홍증식(洪增植)과 함께 고종의 측근인 전 내부대신 민영달(閔泳達)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 우당 이회영 약전에 따르면 망국 후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하 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나는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水路)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子爵) 이완용과 이기용(李琦鎔)이란 점이다. 고종은 그 다음날 묘시(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인데,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다.


김윤식이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 아들들도 임종치 못했다고 기록하는 등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해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고종의 생질 조계진(형수)도 고종 사후 5일 후 운현궁에 갔다가 이런 내용을 듣고서 부친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듯이 왕실 사람들도 고종독살설을 믿었다. 의병장 곽종석(郭鍾錫)과 교류했던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역신 윤덕영(尹德榮)·한상학(韓相鶴)·이완용이 태황(太皇)을 독살했다”고 독살 가담자의 이름까지 명기하고 있다.


작자 미상의 대동칠십일갑사(大東七十一甲史)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전한다. 이완용이 어의 안상호(安相昊)로부터 집안에 미친 개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독약 두 통을 구해 큰 개에게 사용해보니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이를 어주도감(御廚都監) 한상학에게 올리게 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독살설은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1919년 3월 15,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왕직(李王職) 명의의 해명 기사를 냈다. 그날 밤 고종이 식혜를 마시긴 했지만 여러 나인과 함께 마셨으며 그 후 안락의자에 앉아 자다가 새벽 1시15분쯤 갑자기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왔다는 것이다. 숙직사무관 한상학과 촉탁의(囑託醫) 안상호의 조치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해 새벽 6시30분쯤 사망했다는 보도였다.


이 기사는 “또 모(某·이완용:괄호 필자)의 사주를 받아 식혜에 독약을 타 드렸다는 궁녀 2인도 함구(緘口)를 위해 독살했다 하지만 병사(病死)가 확실하다”면서 의문의 궁녀 두 명의 소식도 덧붙였다. 그중 한 명인 침방 나인 김춘형(79)은 감기에 걸려 동소문 밖 안장사에 있다가 1월 23일에 죽었으며, 덕수궁 나인 박완기(62)는 고종 사후 낙담하다가 2월 2일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이들은 미천한 궁녀이기 때문에 어선에 참여할 수 없고 입을 막기 위해 독살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변명했다. 일제는 독살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고종이 식혜를 마셨다는 사실과 두 궁녀가 고종 사후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증폭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오흥순(吳興順)에 대한 제2회 신문조서(1919년 4월 1일)는 3·1운동 때 뿌려진 국민회보에 “고종이 천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여관(女官) 2명이 독살했는데, 그 여관도 비밀 누설 우려가 있어 죽여 버렸고, 독살 수모자는 이완용 외 1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의친왕 망명기도사건(대동단사건)에 관련되었던 이재호(李在浩) 신문조서(1919년 11월 14일)에도 고종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이 있다. 이재호는 “덕수궁에서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의 훙거(薨去) 때 직접 모셨던 민영달 및 의사 안상호(安商浩), 아울러 간호부를 데려와서 미국에 보내 이태왕 전하 독살사건(毒殺ノ事)의 증인으로 널리 알리려는 방책까지 준비해서 민영달과 교섭 중”이라고 진술했다. 이회영이 민영달을 통해 고종을 망명시키려던 계획이 사실이었음은 이 증언으로서도 사실로 드러난다.


백성들에게 큰 비난을 샀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났듯이 고종도 왕위에 있을 때는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의 의문사는 3·1운동이 일어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입히는 묘한 운명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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