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4077


아들과 삼각관계라니... '김씨 여인의 저주'였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왕의 얼굴>, 첫 번째 이야기

14.12.19 13:48 l 최종 업데이트 14.12.19 13:48 l 김종성(qqqkim2000)


관상을 소재로 광해군을 다루는 KBS2 수목 드라마 <왕의 얼굴>. 이 드라마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요소 중 하나는 김개시(또는 김가희)와 광해군 부자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다. 


드라마 속에서 광해군(서인국 분)의 아버지 선조(이성재 분)는 김개시(조윤희 분)가 '남편을 성군으로 이끌 여인'이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그녀를 후궁으로 책봉하려다 포기했다. 이를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린 남자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어릴 적 만난 김개시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버지의 첩이 될 뻔했으니, 한 남자로서 광해군은 얼마나 놀랐을까? 물론 이 내용의 상당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  <왕의 얼굴> 포스터. ⓒ KBS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김개시


김개시와 광해군 부자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김개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1995년 드라마 KBS <서궁>에서도 묘사된 적 있다. 이때는 배우 이영애가 김개시, 김성옥이 선조, 김규철이 광해군을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선 밤 중에 선조가 김개시를 불러들이는 모습을 보고 광해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는 역사 기록에서도 묘사됐다.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인조 임금의 치세를 다룬 <인조실록>의 인조 1년 9월 14일 자(양력 1623년 10월 7일 자)에 따르면, 김개시는 한때 선조의 여인이었다. <인조실록>에서는 그가 선조의 후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식 후궁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공식 후궁인 '승은 상궁'이었기 때문이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왕이 된 뒤에는 광해군의 승은 상궁이 되었다. 2대 연속으로 승은 상궁을 지낸 것이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의 팜므파탈인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의 후궁이었다. 미실만큼은 아니지만 김개시도 꽤 화려한 남성 편력을 가진 셈이다. 


<인조실록>에는 김개시가 선조의 승은 상궁이었다가 광해군의 승은 상궁이 된 사실을 무미건조하게 기록돼 있을 뿐,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은 없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 삼각관계를 대놓고 공격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광해군만 관련된 일이라면 격렬하게 비난할 수 있었겠지만, 선조까지 관련된 일이라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부정했지만, 선조의 정통성만큼은 인정했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선조의 아들이기 때문에, 선조를 부정하면 인조의 정통성을 세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인조 정권을 계승한 효종 정권으로서는 삼각관계를 살짝 언급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후계 구도 무너뜨린 여인


세 사람 사이의 삼각관계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선조였다. 김개시가 자신의 아들과 가까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손잡고 선조의 정치적 구상을 무너뜨리는 데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김개시는 선조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고, 정치적 계획에도 타격을 입혔다. 김개시는 선조에게 득보다는 실을 준 여인이다. 


김개시는 처음에는 선조의 여인이었지만, 후계자 문제로 선조와 광해군이 갈등을 빚을 때 광해군 편에 가세했다. 선조는 새로 들어온 32세 연하의 인목왕후(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에게 왕권을 넘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김개시는 이이첨·정인홍 등과 함께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 때문에 왕권의 시소는 영창대군이 아닌 광해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선조가 반대한 광해군에게 왕권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김개시는 선조가 구상한 후계 구도를 와해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김개시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인조실록>에는 김개시가 선조가 먹을 약밥에 독을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조의 여인이었던 김개시가 선조의 정치 구상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아 간 셈이다.


선조가 주변 여인들 때문에 타격받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된 것이었다. 선조가 김공빈·김인빈·김순빈을 후궁으로 맞이한 상태에서 인목왕후 김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려 하자, 당시 지식인들은 "김씨 여인은 해롭다"면서 우려를 표했다. 이때부터 지식인들은 '김씨 여인'이 선조를 위협할 가능성을 염려했다. 


당시 지식인들, "김씨 반대!"


▲  선조(이성재 분). ⓒ KBS


이런 분위기는 선조 10년 5월 1일 자(1577년 5월 18일 자) <선조수정실록>의 주석에 반영돼 있다. 참고로, 이 주석은 선조 10년에 기록된 게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의 수정판이다. 


당시 지식인들이 김씨 왕후의 등장을 경계한 것은 오행(五行) 이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인 오행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 만물 현상은 오행의 상호 작용에 의해 전개된다는 게 동아시아 철학의 관념이다. 


그런데 목·화·토·금·수는 상호 긍정적인 작용도 하지만, 동시에 상호 부정적인 작용도 한다고 여겨졌다. 이른바 '상극'(相剋) 작용도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금'은 '목'에게 해로운 영향을 입힌다고 봤다. 쇠(金)로 만든 도끼가 나무(木)를 베는 데 사용되듯이 '금'의 성질을 가진 것은 '목'의 성질을 해친다는 관념인 것이다.  


조선왕조의 성씨인 이(李)에는 '나무 목'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씨인 조선 임금이 김씨 여인을 만나면 득보다는 실이 될 거라는 게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김씨 여인이 이씨 왕실에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14대 선조 이전만 해도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제2대 정종의 중전인 정안왕후도 김씨였지만, 정안왕후와 정종은 정종이 왕이 되기 전에 결혼했다. 정안왕후가 1355년 생이고 당시 사람들은 보통 10대에 결혼한 점을 고려하면, 이 부부는 조선 건국(1392년) 이전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결혼할 때는 오행의 상호 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선조 이전까지는 김씨 왕비가 등장하지 않았다. 


선조의 김씨 여인들


▲  김개시(조윤희 분). ⓒ KBS


그런데 선조는 김씨 후궁을 셋이나 들이고, 인목왕후 김씨를 중전으로 책봉했다. 여기다가 김개시까지 비공식 후궁으로 맞이했다. 김씨가 이씨 왕실에 해롭다는 여론의 압박이 있는데도, 김씨 여인들을 자기 주변에 많이 두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선조는 김씨 중전에 대한 터부를 깨뜨린 왕이었다. 선조 이후에 아홉 명의 김씨 중전이 등장한 것은, 그가 사회적 터부를 무시하고 김씨를 중전으로 들인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선조는 김씨 왕후에 대한 금기를 깨뜨리는 긍정적 역할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김씨 여인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비록 중전은 아니었지만 비공식 후궁인 김개시가 광해군 편에 서서 선조의 뜻을 꺾었으니 말이다. 김씨 중전이 선조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어도 김씨인 김개시가 선조에게 불리한 일을 했으니, 김씨 여인이 해로울 것이라는 경고가 결과적으로 맞아 떨어졌다. 


선조는 김씨 여인을 피하라는 경고만 무시한 게 아니다. 그는 김개시가 아들인 광해군과 더불어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예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 구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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