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2772


명성황후만 없었다면... 고종과 김옥균의 은밀한 거래

[참모열전 23회 : 김옥균 1부] 원수관계가 된 참모와 주군, 김옥균과 고종

14.12.18 08:48 l 최종 업데이트 14.12.18 08:48 l 김종성(qqqkim2000)


▲  김옥균.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세웠다가 3일 천하로 끝난 김옥균(1851~1894년).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조선주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한 뒤부터 고종 임금은 김옥균을 잡기 위한 추격전에 돌입했다.


김옥균이 단 3일 동안 나라를 벌집처럼 쑤셔놓고 달아나자, 고종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김옥균의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병 인도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종은 때로는 사람들을 보내 김옥균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때로는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고종이 일본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구한 것이나 김옥균 본인에게 귀국을 종용한 것은 모두 다 똑같은 동기에서 기인했다. 김옥균을 죽이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고종은 그렇게 집요하게 김옥균을 추격했다. 이 추격은 김옥균이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암살 당하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위의 풍경은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동지 관계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고종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핵심 참모 중 하나였다.


철종 2년에 태어난 김옥균은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 충청도 공주군에서 어머니 송씨와 아버지 김병태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학문적 능력을 발휘했다. 집안은 명문가인 안동 김씨였지만, 아버지 김병태는 가난한 서당 훈장이었다. 김병태의 '사설 학원 원장' 수입으로는 김옥균의 천재 기질을 발현시키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은 김병태의 육촌형제인 김병기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었다. 김병기는 지방 사또였지만, 대과(제2단계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못하고 소과(제1단계 과거시험)에만 급제한 지방관이었다. 진사나 생원을 선발하는 소과에서 그는 생원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소과에도 급제하지 못한 채 지방 사또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생원 출신 사또라는 타이틀로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높은 관직에 도달할 수 없었다. 생원이나 진사는 군(郡) 단위의 지방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생원 출신 사또는 지방 양반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또들은 콤플렉스가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들 대에서라도 대과 급제의 꿈을 이루고 싶었는지 김병기는 칠촌 조카인 김옥균을 양자로 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김병태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제안을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김옥균은 가족의 품을 떠나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가 여섯 혹은 일곱 살이었다.


스물두 살의 장원급제자 김옥균, 고종을 만나다


▲  고종.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그 후 그가 거주한 한양 집터 중 하나가 지금의 종로구 정독도서관 구내에 있다. 이곳은 정통 양반 가문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8학군'에서 교육을 받게 된 김옥균은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물두 살 때인 1872년에 특별 과거시험인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36.7세인 점을 고려하면, 스물두 살에 급제한 것도 대단하지만 수석 합격한 것은 더욱 더 대단했다. 


합격자 발표 후 수석 합격자 김옥균은 고종 앞에 나가 자기 소개를 했다. 이것이 김옥균과 고종의 첫 만남이었다. '시장을 지킬 것이냐, 시장개방(이른바 개화)을 할 것이냐' 조선 사회가 고민할 때, 조선을 시장개방 쪽으로 견인하려 애쓰게 될 두 사람인 김옥균과 고종은 그렇게 만났다.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그늘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외세를 거부하고 조선 시장을 사수한 아버지와 정반대로, 그는 외세를 적극 이용하고 조선 시장을 개방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 노선을 지지하는 젊은 관료들을 집중 육성했다. 이런 관료 그룹에 속한 인물이, 훗날 이 그룹을 이끌고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될 김옥균이었다. 


고종의 친위조직 육성책 속에서 성장한 만큼, 김옥균은 고종의 심중을 읽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신하로 성장했다. 김옥균이 고종의 심중을 대변하는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외교에 나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장개방에 반대하는 구식 군인과 서민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고종은 사태를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청나라의 혹독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정변 진압용 외국군이 내정간섭용으로 돌변하자, 그제야 청나라의 본질을 알아챈 고종은 미국 정부에게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쳐 달라'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러자 고종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종결 이후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영국이 청나라·일본·조선·독일·미국·프랑스 등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동아시아 남진을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겠다는 발상을 품었다. 고종의 구체적인 계획은, 러시아와 수교를 맺은 뒤 조선-러시아 동맹으로 청나라를 몰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가 고종을 압박하고 청나라는 영국의 노선을 따르는 상황에서, 고종이 공개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비밀 외교에 나선 인물이 바로 김옥균이다. 


세계정치를 충격에 빠뜨린 고종과 김옥균의 비밀외교


▲  김옥균의 집터. 친가가 아닌 양가의 집터다.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 구내에 있다. ⓒ 김종성


박영효·민영익·김관선 등과 함께 참여한 이 비밀외교에서 김옥균은 1882년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로마노비치 로젠을 만나 비밀리에 수교 의사를 타진하고, 1883년 말과 1884년 초에는 새 일본주재 러시아공사인 알렉산더 다비도브에게 다시 한번 수교 의사를 전달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체결된 것이 1884년 조선-러시아 수호통상조약이다.


영국이 서양열강 및 동아시아 국가들을 결집해 러시아를 집중 견제하는 상황에서 터진 조-러 수교는 세계 정치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라이벌인 영국은 물론이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나라에게도 충격이었다. 조선이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혼선을 준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은 이듬해인 1885년에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를 이용해 청나라를 몰아낸다'는 고종의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김옥균과 고종의 동지적 관계는 갑신정변 준비 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다. 외형상 갑신정변 최고 책임자는 김옥균이지만, 고종이 이를 묵인 내지는 지원했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평소부터 김옥균은 '정변을 벌일 때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선비였다. 이 점은 갑신정변 전에 작성한 <조선 개혁 의견서>라는 글에도 나타난다. 


이 글에서 김옥균은 조선을 개혁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임금의 밀지를 받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과 '임금의 밀지를 받아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들었다. 평화적이든 무력적이든 임금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점은 갑신정변이 김옥균의 독자적 의지에 따라 벌어진 일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 


또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활동한 독일인 외교관인 묄렌도르프의 부인이 쓴 <묄렌도르프 자서전>에 따르면, 갑신정변 직전 고종은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집안보다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당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정변 직전까지 고종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 김옥균이었다면, 갑신정변 역시 두 사람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갑신정변 거사 당일인 고종 21년 10월 17일(1884년 12월 4일) 고종은 개화당원 윤치호를 통해 100여 냥짜리 어음을 김옥균에게 전달했다. 이 돈이 결국 거사 자금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종이 갑신정변에 자금 지원까지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종은 정변의 피해자가 아니라 책임자였다?


▲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인 우정총국.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에서 북쪽으로 도보 1분 거리에 있다. ⓒ 김종성


갑신정변이 두 사람의 합작품일 가능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김옥균의 회고록인 <갑신일록>에 따르면, 정변 5일 전에 김옥균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옥균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모종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던 중 명성황후가 갑자기 들어오자, 고종은 "경이 품고 있는 뜻을 내가 잘 안다"면서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일은 위급할 때에 경의 대책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친서 한 장을 써주고 김옥균을 내보냈다. 이것은 고종이 김옥균이 벌일 거사에 대해 묵시적 양해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명성황후가 갑자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저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갑신정변의 성격을 살펴봐도 고종의 작품이라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조-러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목적이 청나라를 몰아내는 데 있던 것처럼, 갑신정변을 벌인 목적 역시 청나라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청나라를 몰아내는 게 고종의 목표였고 조-러 수교와 갑신정변이 동일한 목표 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갑신정변이 고종의 의중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갑신정변이 터진 직후에 벌어진 상황을 봐도 그렇다. 정변이 진행되는 중에 고종은 김옥균의 제안을 모두 다 수용했다. 그의 정국 장악을 도와준 것이다. 정변이 고종에게 뜻밖의 일이었다면, 두 사람이 그렇게 손발을 척척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점은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 점은 정변이 실패한 이후 전 좌의정 송근수가 고종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상소를 올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처럼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을 정변의 피해자로 보기보다 정변의 책임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사실 고종이 갑신정변 후에 김옥균 체포 및 암살에 적극성을 보인 것도 김옥균과 선을 긋고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정변 이전은 물론이고 정변이 진행될 때만 해도 둘도 없이 가깝던 김옥균과 고종이 불과 며칠 사이에 원수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변의 전개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참모열전 마지막 이야기가 될 다음 회에서 그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