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6610
'충신' 김옥균 배반한 고종, 아버지 때문이었다
[참모열전 24회(최종회): 김옥균 2부] 갑신정변 실패는 김옥균 탓?
14.12.26 18:31 l 최종 업데이트 14.12.26 18:31 l 김종성(qqqkim2000)
▲ 일본 망명 당시의 김옥균.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원인과 관련하여 흔히 '김옥균 책임론'이 제기된다. 서른네 살 밖에 안 된 '애송이'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소수의 세력만 갖고 무모하게 일을 벌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현재까지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시각을 유포한 장본인 중 하나가 김옥균의 동지이자 라이벌인 박영효다. 박영효는 <동광> 1931년 3월호에 실린 소설가 이광수와의 대담 기사에서 "갑신정변 실패의 주된 책임은 김옥균에게 있다"면서 김옥균이 계획대로 하지 않은 것과 기획력이 부족했던 것 등이 실패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박영효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이란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므로 그가 정변 실패의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박영효가 평소부터 김옥균에 대해 지나친 경쟁심 내지는 열등감을 표출했으며 어떻게든 김옥균을 깎아내리려 애쓰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변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만 전가하는 그의 태도를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박영효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의 인식 역시 한 번쯤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정변이 실패하면 누구나 다 '준비도 없이 일을 벌였다'는 비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옥균은 완전한 실패자는 아니었다. 그는 3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46시간 동안은 정권을 장악했다. 46시간은커녕 단 1분도 정권을 잡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반란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옥균이 3일 뒤에 정권을 빼앗겼다는 점만 중시해서, 그를 '준비도 없이 큰일을 벌인 무모한 애송이'로 몰아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김옥균이 소수의 세력만 갖고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실상은 정확하지 않다. 어느 논문에서 "몇십 명도 안 되는 세력을 거느리고 그런 일을 벌였더니 참 믿을 수 없다"는 코멘트를 남긴 학자도 있지만, 이것은 정확한 사실에 바탕을 둔 언급이 아니다.
김옥균이 소수의 세력을 갖고 일을 벌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를 둘러싼 정변 핵심세력의 숫자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실, 혁명이나 정변의 핵심 그룹이 4, 50명을 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혁명이나 정변은 4, 50명 미만의 사람들이 벌인 일이다. 이들이 주축이 된 상태에서 수많은 대중이나 병사들이 가담하다 보니, 외형상으로는 수많은 인원이 가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갑신정변도 그랬다. 김옥균과 함께 정변을 기획하고 준비한 사람들은 몇십 명밖에 안 되지만, 정변 당시 김옥균의 명령을 받은 병력은 2천 명이 훨씬 넘었다. 고종의 왕명 하에 김옥균의 지휘를 따른 정부군 병력만 해도 2천 명이 넘었다. 거기다가 김옥균의 아군인 개화당을 따르는 행동대원이 200명을 넘었고, 김옥균을 지지하는 일본공사관 병력이 약 150명이었다.
1882년 이래 한양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 병력이 약 1500명이었다. 이들은 김옥균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이 지휘한 병력은 김옥균을 반대하는 병력보다 숫자적으로 우세를 점했다.
따라서 갑신정변 발발 당시에는 김옥균이 조선 국내에서 최대 규모의 병력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이런 병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변 발발과 동시에 정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소수의 사람들만 믿고 무모하게 일을 벌였다는 비판은 객관적 사실에 토대를 둔 게 아니다.
"흥선대원군 불러들이자"... 고종은 김옥균이 두려웠다
▲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행 배를 탑승한 제물포항. 인천시 중구 선린동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러면, 갑신정변이 고작 3일 만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실패한 최대 원인은 이 정변의 두 주역인 고종과 김옥균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제1부에서 설명한 것처럼,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고종과의 공동 작품이었다. 정변이 개시된 직후만 해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잘 이루어졌다. 만약 이런 관계가 지속됐다면, 갑신정변은 '성공한 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인 김옥균과 주군인 고종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고종이 등을 돌렸고, 이 때문에 김옥균이 정부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됐다. 이것이 갑신정변의 최대 실패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김옥균에게 등을 돌렸을까?
김옥균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노장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목적으로 집중 육성한 청년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런 배경 하에 부각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옥균은 고종의 뜻을 잘 따라주었다. 1884년 세계 톱뉴스인 조선·러시아 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고종의 밀명을 받은 김옥균이 영국·프랑스·독일·미국·청나라·일본을 감쪽같이 속인 상태에서 러시아와의 수교를 성사 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옥균은 고종이 보기에 참으로 믿음직한 참모였다.
그래서 고종은 자신의 신임을 표시하는 밀서를 써주고 자금 지원을 하는 방법 등으로 김옥균의 거사 준비를 도왔다. 그런데 정변이 터지자마자 고종은 김옥균이란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평소에 생각했던 그 김옥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소 임금 앞에서 충직하게 보였던 그 김옥균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은 구세력에 대한 인적 청산에 곧바로 착수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반대파를 눈에 띄는 대로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중에는 내시 유재현처럼 고종이 아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옥균은 반대파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정변 이틀째 기록인 고종 21년 10월 18일자(양력 1884년 12월 5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고종이 "저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고 연거푸 외치는데도 김옥균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을 죽였다. 이때 고종의 주변에 김옥균의 행동대원들이 포진했기 때문에 고종의 말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믿었던 김옥균이 자기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면서 고종의 가슴은 어딘가 써늘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고종은 김옥균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이지 말라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 것까지는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다. 고종은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평소 자기와 친했다고 해도 그들을 살려두면 정변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종 자신이 죽는 게 아니었다.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는 김옥균을 보고 가슴이 좀 썰렁하기는 했지만, 아직 김옥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릴 단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변 3일째 되던 날에 김옥균이 혁명공약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고종은 김옥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뭐 저런 놈이 다 있나"라며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김옥균이 자신과의 사전 합의 없이 혁명공약을 작성한 것도 괘씸했지만, 자신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거기에 담았다는 것이 가슴 떨리도록 괘씸했다. 혁명공약 제1조는 청나라에 연금되어 있는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모셔온다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인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왕이 되고도 10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허수아비로 지냈던 고종은 1873년에 명성황후와 민씨 집안을 앞세워 아버지를 실각 시켰을 뿐만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청나라군이 아버지를 중국 톈진으로 끌고 가는 것도 묵인했다.
또 고종의 국정 방침은 기본적으로 흥선대원군과 정반대였다. 흥선대원군은 시장개방을 막고 외세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던 데 반해, 고종은 시장을 개방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 상호간의 경쟁을 유발하고자 했다. 그리고 고종은 아버지 시대의 노장 관료들을 축출할 목적으로 김옥균 같은 청년 관료들을 집중 육성했다.
그래서 고종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으로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그런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국내로 모셔오겠다고 발표했으니, 고종은 '저 놈은 내 사람이 아니구나. 저 놈은 내 참모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돌변한 고종...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
▲ 김옥균(왼쪽)이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는 장면. 일본 신문에 실린 삽화다.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이뿐 아니다. 김옥균이 혁명공약에 넣은 인민평등권도 고종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다. 또 김옥균과 동지들이 입헌군주제를 통해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고종에게는 무서운 일이었다. 고종 입장에서는 '내가 범 새끼를 키웠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정변의 훼방자로 돌변했다. 정변을 무산시키는 쪽으로 행동 방향을 잡은 것이다. 그는 '김옥균의 동지처럼 가장했지만 실상은 청나라군의 스파이'였던 경기도 관찰사 심상훈을 통해 청나라군의 개입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가 궁궐에 들어와서 김옥균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고종이 김옥균 대신 청나라군 손을 잡게 되자, 고종의 지원 하에 김옥균을 따르던 정부군 약 2천 명도 김옥균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청나라군이 김옥균을 공격하려 하자 정부군 절반은 자리를 피해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청나라군에 합세했다.
이렇게 해서 차 떼고 포 뗀 상태에서 청나라군을 상대하게 된 소수의 김옥균 부대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46시간 만에 정권을 잃은 김옥균과 동지들은 일본 공사를 따라 일본 망명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김옥균이 손쉽게 정권을 장악한 것은 고종이 정부군 2천 명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김옥균이 허무하게 정권을 빼앗긴 것은 고종이 정부군 2천 명을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신정변은 고종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말았다.
이처럼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김옥균의 경험 부족이나 무모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고종과 김옥균의 분열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실제 사실에 훨씬 더 부합한다. 김옥균을 이용해서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 했던 고종은 김옥균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고 나중에는 김옥균을 몰아내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런 뒤에 고종은 자신과 김옥균이 공동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김옥균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김옥균을 암살할 자객들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고종의 집요한 추적은 계속되어, 결국 10년 만인 1894년에 김옥균을 중국 상하이로 유인하여 암살하는 결과로 연결됐다.
조선왕조의 막판에 등장하여 고종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자 했던 김옥균은 이렇게 주군에게 자기 속마음을 들키는 바람에, 정치적 목표도 잃고 목숨도 잃고 말았다. 주군을 이용해서 세상을 바꿔보고자 했던 김옥균은 그 주군의 마음을 끝까지 잡지 못한 탓에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참모열전은 이번 이야기로 끝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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