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1501
사도세자, 뒤주 갇히기 전 스토커에 시달렸다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5편] 고독의 왕자, 비운의 결말
11.08.16 13:52 l 최종 업데이트 11.08.16 15:08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사도세자(오만석 분). ⓒ SBS
사도세자는 '비운의 왕자'로 통한다. 그는 집권당은 물론 아버지와도 갈등을 일으키다가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뒤주(곡식 상자)에 갇혀 8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데다가 석 달 동안이나 평안도를 몰래 여행했다는 것이 뒤주에 갇힌 표면적 명분이었다.
뒤주 속의 사도세자는 갑갑함 못지않게 무더위에 고생했을 것이다. 그가 뒤주에 갇힌 날은 영조 38년 윤5월 13일(1762.7.4)이고, 숨이 멎은 날은 윤5월 21일(7.12)이다.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 기간은 대체로 무더웠다. 윤5월 16일(7.7)에 약간 선선했고, 윤5월 20일(7.11) 오후 3~5시 사이에 폭우가 잠시 내렸을 뿐이다.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는 성인 남자가 여유 있게 들어갈 만한 뒤주가 등장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어린아이가 쭈그리고 앉아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28세 청년이 무더운 날씨에 8일간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좁은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시시비비를 떠나 그런 사도세자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비참한 최후 때문에 비운의 왕자로 불리지만, 그것에 못지않은 상처가 그에게는 또 있었다. 뒤주에서의 여드레 동안은 비참한 최후였지만, 지상에서의 스물여덟 해는 말 못할 고독의 세월이었다. 그는 비운의 왕자이기 이전에 '고독의 왕자'였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궁궐 안에서 무슨 고독이냐 할지 모르지만,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면 그의 삶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독 그 자체였다는 점을 수긍하게 될지 모른다.
사도세자의 고독은 생후 100일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의 품을 떠나 보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나신 지 백일 만에 탄생하신 집복헌(창경궁 내)을 떠나 보모에게만 맡기시어, 오래 비어 있던 저승전(창경궁 내)이란 큰 전각으로 옮기게 하셨다."
이 문장의 행위주체는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제21대 영조다. 그가 갓난아기를 부모의 품에서 떼어낸 것은 아이를 좀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장희빈의 아들이자 이복형인 제20대 경종과의 대결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요인 중 하나는, 경종이 마음은 너무 곱고 체력은 너무 약했다는 점이었다.
▲ 사도세자가 갇힌 것과 비슷한 크기의 뒤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성행궁 안에 전시돼 있다. ⓒ 김종성
영조는 상대적으로 강인했다. 경종이 영조(당시는 연잉군)가 보낸 게장을 먹은 뒤에 디저트로 생감을 먹고 급사했는데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영조가 꽤 비정한 인물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이 경종처럼 유약해지지 않고 자기처럼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생후 100일의 아기를 떼어놓은 것이다.
영조의 교육방식은 어느 정도 주효했다. 이 점은 원자(차차기 왕위계승권자)나 세자의 성장과정을 정리한 궁중 문서들에서 잘 나타난다. <한중록>이나 <장헌대왕 지문(誌文)>에 인용된 이 문서들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생후 7개월 만에 동서남북을 가리켰고, 두 살 때 글을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썼으며, 세 살 때는 남이 과자를 주면 목숨 수(壽)나 복 복(福)자가 쓰인 것만 골라 집었다고 한다. 그는 일종의 '엄친아'였다.
사도세자의 천재성은 그가 나이 10세에 여당 격인 노론세력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만만치 않은 왕자가 15세부터 세자 겸 대리청정(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맡았으니, 집권세력이 얼마나 불안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천재성은 훗날 그가 뒤주에 갇힌 실질적 요인 중 하나였다. 적당히 똑똑한 천재는 말을 태워 청국(淸國)으로 유학 보내지만, 달갑지 않은 천재는 뒤주에 태워 천국(天國)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집권층의 생리일까.
부모의 품에서 떨어졌더라도 보육환경이 좋았다면, 세자는 안정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운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처소인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인 선의왕후가 지내던 곳이고, 그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은 장희빈이 지내던 취선당이었다. 경종은 영조와 대립했고,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을 죽이려 했다. 영조 쪽 사람들에게 음습한 느낌을 주었을 공간들이 일찍부터 사도세자와 연관되었던 것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살 때 동궁(세자궁)을 새로 꾸릴 때에 충원된 궁녀들은 선의왕후를 모시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궁중 법도에 따라 왕후의 사망 뒤에 출궁했지만, 영조는 그들을 도로 불러 사도세자를 돌보도록 했다.
한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궁녀들의 특성상, 그 궁녀들은 주군인 경종 및 선의왕후와 적대적이었던 영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은 영조가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자기 아들을 경종 쪽 궁녀들에게 맡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상태에서 적대적인 궁녀들 속에서 성장했으니, 그가 얼마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자랐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집권세력으로부터도 고립됐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고자 원칙적으로 행동했지만, 이런 행보는 그에게 정서적 고립에 더해 정치적 고립까지 안겨주었다. 처가인 홍씨 가문까지도 그를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였다. 영조는 자기 아들이 집권당 인사들과 갈등을 빚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 아들한테만 한층 더 가혹하게 대했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아버지는 그 흔한 '하트' 표시 한 번 해주지 않았다.
▲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수은묘)의 터.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뒤편에 있다. ⓒ 김종성
여기에 더해, 사도세자에 대한 부인 홍씨의 몰이해도 세자의 고독을 한층 더 부채질했을 것이다.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에서는 집권층과 갈등하고 탕평을 추구하는 남편에 대한 따뜻한 인간적 관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홍씨 가문이 세자의 죽음에 대해 별 책임이 없다는 점만 부각됐을 뿐이다. 이는 부부 간의 정서적 유대가 매우 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도세자의 심정은 현진건의 1921년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시대를 고뇌하는 인텔리 남편의 심정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사회란 것이 요릿집 같은 곳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아내.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또 못 알아듣네!"라며 탄식한다.
1880년대 이후 일본식 한자어가 기존 한자어를 상당부분 대체했기 때문에, 1910년대나 20년대의 일반 서민 중에는 '사회'란 단어를 생소하게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한 인텔리에게는 그런 아내가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시대의 슬로건인 탕평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친정의 안위만 걱정하는 부인 홍씨를 바라보는 사도세자의 심정도 그렇지 않았을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말 못할 고독에 시달리던 사도세자. 그런 그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문성국이란 인물이었다. 영조의 후궁인 문숙의(숙의 문씨)의 오빠였다. 문성국이 그를 따라다닌 것은, "세자를 감시하고 문제점을 보고하라"는 영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해 영조와 사도세자를 갈라놓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런 반갑지 않은 '스토커'만 세자의 꽁무니를 열심히 따라다녔다.
생후 100일부터 부모와 떨어지고, 두 살부터는 적대적인 궁녀들 틈에서 성장하고, 좀 커서는 집권세력은 물론이고 아버지와도 멀어지고, 처가마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은 물론이고 아내마저 자기를 몰라주는 상황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 못할 고독에 치를 떨며 28년 생애를 살았다. 물론 잠간씩 사귀다 만 궁녀들은 많았지만, 그런 여성편력은 그를 파멸로 모는 데 일조했을 뿐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무사 백동수> 속의 사도세자는 적지 않은 동지들과의 훈훈한 관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실제의 사도세자는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고독 속에서 삶을 마쳤다. 죽는 순간마저 비좁은 뒤주 속에서 홀로 신음했으니, 그의 인생은 생후 100일부터 죽을 때까지 '고독'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갑함이나 무더위보다도 고독이란 존재가 최후의 사도세자를 한층 더 괴롭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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