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축구공한증' 말고 '전쟁공한증'도 있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네 번째 이야기
11.01.03 12:11 l 최종 업데이트 11.01.03 12:11 l 김종성(qqqkim2000)
▲ 고구려 전사의 모습.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3권. ⓒ 사계절
과거에 한민족이 중국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경제적·문화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타 분야에서까지 그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두 민족이나 두 국가의 역량을 비교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전면전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군사력·경제력·외교력·기술력·정치력이 총동원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국가의 실력을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전면전만큼 확실한 기준도 없을 것이다.
'한민족과 중국의 전면전 실적이야 뻔한 게 아닌가? 한민족이 주로 패배하지 않았겠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아니다.
유라시아대륙 곳곳이 몽골제국에게 정복될 때에도, 한민족은 끝내 패전하지 않았다. 한민족은 근 30년간 몽골군을 막아냈다. 양국의 대결은 1260년에 화친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몽골제국이 중국을 점령한 것은 1279년이다. 한국·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원나라라는 중국식 국호를 채택한 1271년 이후의 몽골제국을 중국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몽골 전쟁은 한민족과 중국의 전쟁이 아니라 한민족과 몽골족의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한민족과 중국의 전면전 기록에 넣을 수는 없다.
병자호란(1637년) 때에 청나라에 패배를 당했다는 증거가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에 남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전쟁은 조선 측의 '기권'에 의해 종결되었다. 한·중 역사학계에서는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중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중국 본토를 점령한 1644년 이후의 청나라를 중국왕조로 간주할 뿐이다. 그나마 여진족(만주족)은 고구려·발해의 지배 하에 있었던 말갈족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한민족이 '중국'에 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삼전도비. ⓒ 김종성
중국과의 전면전, 한민족의 성적은?
그럼, 정통 중국과의 전면전에서 한민족은 어떤 성적을 거두었을까? 이 대목에서, 고구려·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된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한 게 아니었다. 배후의 신라가 당나라를 돕지 않았다면, 당나라는 결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근 30년 가까이 질질 끌던 고구려-당나라 전쟁이 신라의 가세에 의해 손쉽게 종결된 사실, 또 20년 가까이 유지되던 백제-당나라 긴장관계가 신라의 가세에 의해 수월하게 끝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결코 자기 혼자 힘으로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당나라는 신라를 끌어들여 2:1의 수적 우위를 확보한 뒤에야 비로소 고구려·백제를 각각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례들을 통해서는 한민족과 중국의 진짜 실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한민족과 중국이 일대일로 맞붙은 전면전은 여러 차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우에 주로 한민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참패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1 전면전에서 한민족이 패배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런 사례가 1차례 있었다. 기원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벌어진 고조선과 한나라의 최종 승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승부에 관한 내용이 중국측 역사서인 <한서> '조선열전'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이것을 읽어보면, 그나마 그 대결도 중국의 '득점'이 아닌 한국의 '자살골'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서> '조선열전'에 따르면, 이 전쟁은 한나라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한나라의 조선 원정군은 양방향으로 출발했다. 양복(楊僕) 장군이 이끄는 5만 병력은 산둥반도에서 함선을 타고 발해(渤海, 서해 위쪽의 바다)를 지나 왕검성(평양)으로 진격했다. 순체(荀彘)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은 요동(만주)에서 출발하여 육로를 거쳐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참고로, 저명한 국내 역사서에서 양복 장군이 7천 병력을 이끌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한서> '조선열전'을 잘못 읽은 결과다. '조선열전'에는 양복 장군이 5만 병력을 이끌고 상륙한 뒤에 7천 병력만 선별하여 왕검성으로 먼저 진격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임금 위우거(衛右渠)는 양복의 병력이 5만에서 7천으로 '찢어진' 틈을 타서, 왕검성 밖으로 병력을 급파해 양복의 군대를 대파했다. 한편, 순체 장군은 패수(압록강 혹은 청천강) 서쪽에서 조선군과 격돌을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나라 황제 한무제는 전략을 급히 변경했다. 특사 위산(衛山)을 파견해서 고조선에 항복을 권유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고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민족 왕조들이 취한 대응전략 중 하나는, 중국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위우거도 그런 방식을 취했다.
위우거는 중국 특사 위산에게 "항복하고 싶었지만, (한나라) 장수들이 나를 죽일까봐 무서웠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고는 사죄사절로 태자를 파견하면서, 그에게 5천 필의 말을 조공하고 오라고 명령했다.
물론 조공을 하면 반대급부인 회사(回賜, 답례)를 받아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패수 앞에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왔다. 한나라 측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위산은 빈손으로 귀국했고, 격분한 한무제는 위산을 죽여 버렸다.
▲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방향.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 신유
한나라의 승리는 고조선의 자살골 때문
고조선 태자의 돌출행동으로 화친 무드가 깨지자, 한나라 군대는 총공세를 재개했다. 순체 장군은 패수 유역에서 고조선군을 깨뜨리고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양복 장군도 왕검성으로 진격하여 순체 장군과 더불어 왕검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적의 위협이 가중되자, 왕검성 안에서는 분열이 생겨났다. 이주민 세력인 친왕파(親王派)와 토착민 세력인 재상파(宰相派) 사이에서 항전이냐 화친이냐를 놓고 알력이 생긴 것이다. 위우거를 둘러싼 친왕파는 항전을, 토착세력으로 형성된 재상파는 화친을 택했다.
한나라 군영에서도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패수에서 고조선을 격파한 경험이 있는 순체 장군은 전쟁의 계속을 희망했고, 고조선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는 양복 장군은 화친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를 희망했다. 화친파인 양복 장군은 고조선 재상파와 은밀한 접촉을 가졌다. 그는 고조선 재상파가 위우거를 죽여주면 재상파의 정치적 기득권을 보장해주기로 합의했다. 물론 이것은 밀약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무제는 공손수(公孫遂)라는 특사를 현지에 파견했다. 한나라 진영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장에 온 공손수는 순체 장군을 지지했다. 그는 "양복 장군이 고조선과 손을 잡고 한나라를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순체 장군의 말을 신뢰했다. 그래서 양복 장군을 억류한 상태에서 양복의 군대를 순체의 휘하에 편입시켜 버렸다.
양복의 힘을 꺾어버린 공손수의 조치는, 좀 더 손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공손수가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공손수가 본국으로 돌아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양복을 억류했다"고 보고하자, 한무제는 이번에도 격노하여 공손수를 죽여 버렸다. 공손수의 보고를 들은 한무제는, 양복 장군과 고조선 재상파의 밀월이 한나라를 배반하기 위한 게 아니라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시간이 좀 더 흘렀다. 결국 이 전쟁은 명확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고조선 측의 내분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고조선 재상파가 위우거를 죽이고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재상파는 한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받았다. 휘하에 있던 토지와 백성에 대한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받은 것이다. 한나라가 고조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토착세력의 지배력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한사군은 유명무실한 기구였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승리한 것은 한나라가 아니라 고조선 토착세력이었다. 그들은 손해 본 게 없었다. 이에 비해 한나라는 고조선이란 나라만 멸망시켰을 뿐, 고조선 땅에 대해 실질적 지배력을 갖지 못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실익 없는 승리였던 것이다.
한무제 역시 그런 판단을 했다. 고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고조선의 '자살골'로 전쟁이 끝난 데에다가 한나라가 실질적으로 얻은 것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나라 장군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한무제는 순체장군을 소환해서 참수한 뒤에 그의 목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양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양복은 속죄금(벌금)을 물고 사형을 피하는 대신, 작위를 뺏기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특사 위산·공손수를 포함해서, 이 전쟁과 관련된 한나라 고위인사들이 모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셈이다. 이 같은 조치는 한나라의 승리가 한나라 군대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고조선 재상파의 주역들은 한무제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제후의 지위를 받은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한나라 장수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전쟁에서 패배한 고조선 고위층들은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고조선의 패배가 실력이 아닌 내분 때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민족, 중국과의 전면전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위와 같이, 한민족과 중국의 1:1 전면전에서는 한민족이 결코 밀리지 않았다. 수양제·당태종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1 전면전에서는 한민족이 중국을 압도한 예가 더 많다. 그나마 유일한 패전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한나라 전쟁도 한민족의 자살골로 승부가 가려졌다.
이는 중국의 군사력이 한민족의 군사력을 압도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돌아간 당태종이 죽으면서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 사실은, 한민족과의 전면전 경험이 중국인들의 뇌리에 '공한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한나라가 모든 군대를 총동원했다면 고조선을 손쉽게 멸망시키지 못했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도 특정 전쟁에 파견할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모든 군대를 특정 전쟁에 다 투입하면 보급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제3국의 기습 침공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파견할 수 있는 병력을 다 보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민족은 중국과의 1:1 전면전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경제나 문화에서는 뒤처진 게 사실이지만, 군사력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고구려·백제가 각각 패배한 것은 신라가 중국 쪽에 가세하는 바람에 1:2 구도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1:1 대결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둔 적이 없는 셈이다. 축구 공한증보다 더 무서운 전쟁 공한증을 느꼈을 만도 하다.
이 같은 역사적 사례들을 관통하는 이치는 이것이다. 민족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간에 내부의 분열이 없는 한, 한민족은 그 누구와 싸워도 당당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외세와 손잡고 칼끝을 동족에게 돌리는 세력, 민족 내부의 긴장과 분열을 초래하는 세력. 그런 세력만 없다면, 한민족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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