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11)뉴허량의 옥기묘
입력 : 20071214 18:11:07

“옥기 쥔 巫人은 神과 소통한 왕”

1989년 가을.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제2지점 1호 적석총을 발굴 중이던 조사단은 기이한 모습에 꿈을 꾸는 듯했다.

21호묘에서 무려 20점의 옥기가 쏟아진 것이다. 이것은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한 곳에서 나온 가장 많은 옥기였다. 무덤에는 옥기로 도배하다시피한 성인 남성이 누워 있었다. 입을 활짝 벌린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은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잔뜩 치장했다.

옥으로 도배한 인골

뉴허량 제1지점 중심대묘에서 확인된 인골. 양손에 옥거북이를 쥐고 있는 것을 비롯, 7점의 옥기만 부장돼 있다. 일인독존의 무인(巫人)으로 추정된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희한했다. 다른 부장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선사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 같은 것들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중국학계는 이런 기이한 장례 풍습을 두고 ‘유옥위장(唯玉爲葬)’, 즉 옥으로만 장례를 치렀다고 정리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정식 발굴을 끝낸 적석총은 모두 4곳에 이른다. 탐사단이 서 있는 이곳 제2지점과, 3지점, 5지점, 16지점이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발굴을 끝낸 묘장은 모두 61기인데, 그 가운데 부장묘(副葬墓)는 31기이다. 그런데 이 31기 중 옥기만 넣은 묘는 26기에 이른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부장묘의 83.9%가 ‘유옥위장’의 훙산문화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제2지점만 보죠. 26기의 석관묘가 묻힌 1호 적석총의 경우 옥기로만 장례를 지낸 것이 14기에 이릅니다. 부장품이 없는 묘가 11기이니 부장묘=옥기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거죠.”(이형구 선문대 교수)

비단 뉴허량의 옥기묘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200㎞ 동쪽으로 떨어진 후터우거우(胡頭溝·랴오닝성 후신) 유적과, 바이인창한(白音長漢·네이멍구 린시), 난타이쯔(南台子·네이멍구 커스커텅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옥기묘가 출현했다. 예컨대 후터우거우 적석총에서는 10점의 옥기가 출토되었고 토기는 없었다. 이 후터우거우 유적 훙산문화 문화층의 바로 위에서 한반도 및 발해 연안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비파형청동단검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양손에 꼭 쥔 옥거북이

뉴허량에서 확인된 다양한 옥기들. 봉황과 쌍가락지·구름형·짐승얼굴형 옥장신구와 옥기는 물론 하늘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한 무인(巫人)을 상징한 옥기가 쏟아졌다. (위로부터)

뉴허량 옥기묘의 모습을 다시 재현해보자. 탐사단이 서있는 제2지점에는 앞서 살펴본 1호 적석총 21호묘 말고도 4호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역시 3점의 옥기가 부장돼 있었다. 말발굽형 베개 1점이 머리 위에 놓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옥룡이 있었다. 묘 주인은 뭔가 특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5지점과 16지점에서 확인된 인골과 옥기를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제5지점의 중심대묘에서는 노년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됐다.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다는 게 재미 있다. 조사단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요즘의 무당과는 다른 차원이다)’이라고 추정했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제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었다.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 신(神)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일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옥으로 만든 무인인형과 봉황이 특징적이다.

나중에 랴오닝성 박물관을 들른 기자는 잘 복원하여 전시해놓은 뉴허량 무덤들을 보며 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미 죽었는 데도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으로 거북이까지 만들어 양손에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참….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미 있기도 해서…. 더군다나 묘의 주인공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무인이라지 않는가. 하기야 죽어서도 죽지 않으려는 사람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려니….

신과 소통하는 도구

왜 옥인가. 훙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왜 그토록 옥에 집착했을까.

“갑골문자의 ‘예(禮)’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자 위에 두 개의 옥을 올려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禮자 가운데 오른쪽 豊자를 보라.) 그것은 곧 신을 섬기는 일이었다.”

저명한 고증학자인 왕궈웨이(왕국유·王國維·1877~1927년)의 말이다. 옥이 범상치 않은 신물(神物)임을 잘 파악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옥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예기(禮記)’는 “자고로 군자는 반드시 패옥을 찬다”고 기록했다. 선사인들은 하늘 운행의 궤적에 있는 태양을 관찰하고 둥근 옥벽(玉璧)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했다. 또한 땅을 사각형으로 생각하고 옥종(玉琮·사각형 형태의 옥)을 만들어 땅에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 같은 것들은 생활용품들이지만 옥기는 관념 형태의 창작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생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며, 신령한 동물과 산수, 토지 등은 서로 영물처럼 치환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제기에 신비로운 문양과 부호, 상형문자 등을 깎아넣은 것이다. 씨족부락은 각종 동물 옥장식으로 제사에 쓰이는 신기(神器)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을 만들었고, 씨족사회의 번성과 풍성한 수확을 바랐다. 훙산인들은 정신문화 범주에 속하는 옥을 무덤에 도배하는 장례 풍속으로 물질문화를 배척하고, 정신문화를 중시하는 사유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巫人과 옥과 하늘

여기서 (뉴허량의 무덤에서 보이는 것 같은) 무인(巫人)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說文)’이 ‘옥(玉)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영(靈)자는 밑의 무(巫)가 옥으로(가운데 입 口자 3개) 신과 소통한다(以玉通神)는 뜻이다.”

머우융캉(牟永抗)·우루쭤(吳汝祚) 등 중국 학자들은 “무(巫)는 인간과 신의 왕래자”라고 해석했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인인 것이다. 여기서 옥은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다.

“금은 변하지만 옥은 변하지 않죠. 그런 뜻에서 옥은 영생불멸과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여인들이 왜 옥을 그리 귀하게 여겼겠어요.”(이형구 교수)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또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神)과 옥(玉)은 삼위일체인 셈이다.

그런데 무인은 옥을 제작하는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농단하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자(智者)로 우뚝 섰다. ‘옥으로 신에게 보인다(以玉示神)’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무인이라는 말이다.

뉴허량 등 훙산문화 본거지에서 보이는 ‘옥 도배 무덤’을 다시 보자. 많은 적석총 가운데서도 우뚝 서 있는 중심대묘의 옥기는 수량과 질의 측면에서도 다른 무덤들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앞서 기자는 옥거북이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골을 두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려는 모습이 다소 애처롭다”고 비아냥댔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해석일지 모른다. 궈다순 등 중국 학자들의 해석은 사뭇 진지하다.

“고인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신과 통하는 권력임을 체현하고 있다. 고인이 묻힌 중심대묘는 중소형 무덤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거대한 방형 혹은 원형의 적석총으로 돼 있다. 옥거북이를 쥔 주인공인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이 중심대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왕(王)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정일치 시대의 단적인 모습이다.

옥으로 덕을 견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가 장고 끝에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 즉 원시국가 단계에 돌입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훙산문화, 즉 발해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옥 문화는 문명의 단계에서도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보통 중국 상고사를 (구·신)석기청동기철기 등 3단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여기에 옥(玉)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 등 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 때 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춘추전국시대 월국의 흥망을 기록한 책)에 따르면…. 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헌원·신농·혁서의 시대인 돌을 병기로 삼았고(석기), 황제의 시대엔 옥(玉)으로 병기와 신주(神主)를 삼았다.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그 이후엔 철기를 썼다.”

훙산인들은 ‘옥=인간·자연의 조화’ 관념을 지녔는데, 이 전통은 후대 유학자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

특히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以玉比德)’(‘예기’ 빙의·聘義편 )고 강조했다. 공자는 재질과 광택, 구조, 소리 등 옥의 자연적인 특성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가치에 부여한 것이다.

“옥(玉)이 온유한 것은 인(仁)과 같고, 치밀한 것은 지(知)와 같고, 곧아서 남을 해치지 않은 것은 의(義)이며, 정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예(禮)를 닮았다. 소리가 청아하고 여운이 끝이지 않는 것은 악(樂)이고, 옥의 티와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으니 충(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온유하고 마치 옥과 같이 생겼으니 그래서 군자가 귀한 것이다.”(예기)

적석총과 제단과 여신묘. 그리고 찬란한 옥기 시대. 이형구 교수가 한마디 했다.

“옥기의 출현·제작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옥기를 독점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신분계급이 생기고, 전문화·분업화가 이뤄지고…. 하늘과 소통하는 독점자가 고국을 통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뜻합니다. 그걸 동이족이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소름 돋는 한가지. 뉴허량 등 훙산문화에서 출현한 곰(熊) 모양의 옥과 곰의 뼈다. 과연 이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뉴허량|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 기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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