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10)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
입력 : 2007-12-07 15:15:00

“돌무덤이 고인돌로 발전했을 것”

혹 맹목적인 순혈·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우리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우리 문화의 원류와 정체성을 찾는 것이 단순한 피가름이 아니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이뤄졌다면 그 여러 종족이 힘을 모아 이뤄낸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것 역시 뜻깊은 일이다.

외줄타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여전히 식민·분단·냉전사학은 떠도는 원혼처럼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에 대한 현장 조사가 시작된 것은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형구 교수처럼 일찍이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본토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한 이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동북공정, 하·상·대 단대공정, 중국문명 탐원 공정 등 장기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2지점에 조성된 석관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이교수는 이런 석관묘가 훗날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뉴허량·선양/김문석 기자


역사왜곡의 주범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단적인 예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해 AD 0~300년 사이의 역사를 ‘원삼국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둔갑시킨 지 어언 40년 되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남의 땅(중국·러시아)에서 우리 것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폄훼한다면 지나친 냉소·허무주의가 아닐까.

“우리 것이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쓰면 됩니다.”

기자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이렇게 끝났다. 탐사 내내 지나친 민족주의와, 우리 문화의 원류 및 정체성 탐구를 사이에 두고 벌였던 끊임없는 마음 속 갈등.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대형 피라미드와 적석총군을 직접 보면서 외줄타기의 갈등을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했다.

랴오허 동쪽과 서쪽

뉴허량 2지점 무덤 주위에는 토기들이 정렬돼 있다.

적석총·피라미드와 함께 또 하나의 단서는 무덤 주변을 빙 둘러서 꽂아놓은 통형관(밑이 없는 토기) 행렬. 모종의 장례 습속이 분명한 이 행렬은 훗날 한반도 전남지방에서 그대로 보이며, 일본 열도의 하니와(埴輪)로도 연결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덤은 라오닝성 푸신(阜新)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에서도 확인됐다. 이 또한 의미심장했다. 훙산문화 시대(BC 4500~BC 3000년) 위 문화층에서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단검을 썼던 사람들이 훙산문화인들의 묘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의미. 이 얼마나 끈질긴 문화적인 연속성과 계승성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끔찍하게 돌무덤을 사랑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직전 중국 정부는 지안(輯安)의 국내성 주변에서만 1만3000여기의 고구려 적석총을 확인했다.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약 6000기가 남아 있다.

“(장례 때) 고구려는 돌로 쌓아 봉분을 만든다(積石爲封)”(삼국지 위서 동이전)는 기록이 단적인 예다. 그런데 고구려 시대보다 무려 3500년 전에 조성된 엄청난 적석총과 피라미드가 랴오허 동쪽인 랴오둥(요동·遼東)이 아니라 서쪽인 다링허(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됐으니 무슨 조화인가.

“적석총은 그전까지는 랴오허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랴오둥 반도, 그것도 신석기 말~청동기 초기의 무덤이었거든.”

이교수의 말마따나 랴오둥 반도에는 BC 2500~BC 2000년의 돌무덤이 곳곳이 흩어져 있다. 적석총뿐 아니라 석곽묘·석관묘, 그리고 지석묘(고인돌무덤)까지 다양하다. 우선 랴오둥 반도에는 뤼순(旅順)시 라오톄산(老鐵山)과 장쥔산(將軍山)을 비롯해 쓰핑산(四平山)·위자춘(于家村)·바이강쯔(柏崗子)·다타이산(大臺山) 등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든 적석총들이 있다. 이 돌무덤들은 주로 바닷가에 면한 산등성이와 낮은 언덕에 수기 혹은 수십기씩 연속적으로 배열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도 같은 형식의 장례풍속이 나온다.

이 가운데 만주침략의 사전 준비에 나선 일본 인류학자 도리이 류코(鳥居龍藏)가 가장 먼저 라오톄산 적석총(1909년)을 발견했다. 적석총 안에서는 여러 개의 석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훗날 발견된 훙산문화 시기의 뉴허량 적석총과 비슷한 구조다.

대국의 풍모 보인 저우언라이

또한 인근의 장쥔산 적석총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단이 발굴했는데, 모두 9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었다. 조·중 합동조사단이라. 이쯤해서 왜 60년대 초중반 조·중 합동조사단이 발족했는지 알아보자.

62년 당시 북한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며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조사를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고조선 기원은 동북지방이 아니라 푸젠(복건·福建)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합동조사는 용인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문헌기록은 대국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을 결여한 불공정한 기록이 많다”고 중국의 역사왜곡 풍토를 인정한 것이다.

“그래도 당시 중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의 마인드를 갖췄어요. 열린 마음으로 소수민족의 역사를 인정했으니까….”(이형구 교수)

이에 따라 조·중 합동 고고학발굴대가 구성되어 63년 8월부터 65년 8월까지 동북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에 나섰다.

“조·중 합의는 재미있었어요. 예컨대 유물 2점 이상이 나오면 반씩 나눠 갖기로 하고, 1점만 나오면 북한이 가져가서 연구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어요.”

1960년대 초반 북한과 중국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장쥔산 적석총의 그림. 적석총 안에는 9개의 석곽묘가 조성돼있었다.

하지만 조·중 관계는 66년부터 중국 문화대혁명 발발과 함께 모든 학술행위가 중단된 것을 계기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북한이 66년 7월,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발굴보고서를 공동조사단의 이름으로 내버린 것이다. 고조선의 기원이 중국 동북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내용으로…. 중국의 분노는 극에 달해 그때부터 양국간 학술교류는 빙점에서 맴돌았다. “물론 북한도 신의를 저버렸다지만, 핵심은 그후 중국이 명실상부한 대국의 면모를 버리고 소아병적인 중화주의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90년대 들어 중국내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화의 역사로 편입시킨 것입니다.”

4000년 이어진 돌무덤의 전통

랴오둥 반도의 고고학 조사는 이런 풍상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라오톄산과 장쥔산 외에도 우자춘에서는 58기의 묘실을 담은 엄청난 크기의 적석총이 확인됐다. 어떤 묘실에는 무려 21구의 인골이 매장됐다. 또한 뤼순시 허우무청역(後牧城驛) 강상(崗上)·러우상(樓上) 적석총에서는 23개 혹은 10개의 석관이 중앙의 큰 석관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시기는 다소 늦지만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돌무덤들이 속출한다.

황해도 황주 침촌리 적석총

BC 1500년으로 편년되는 시도(矢島·인천 옹진군)적석총과 황해도 황주의 침촌리 적석총, 그리고 강원도 춘천 천전리 적석총이 그것이다. 이밖에 평북 강계 일원과 대동강 유역, 평남 강서·북창 일대, 재령강 유역의 황해도 봉산·인산·서흥·사리원, 한강유역의 양평, 경남 김해·진주, 충남 아산·예산·부여, 충북 단양 등지에 분포됐다. 돌무덤의 전통은 백제의 서울 석촌동 고분과 공주·부여의 석실묘까지 4000년 이상 이어진다. 이형구 교수의 정리를 들어보자.

“뉴허량 적석총은 BC 3500년으로 편년됩니다. 그리고 랴오둥 반도의 적석총군은 BC 2500~BC 2000년, 한반도의 적석총은 BC 1500년 이하…. 이것은 돌무덤의 원류는 홍산문화이며, 이것이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 반도를 거쳐 한반도~일본 열도로, 지린(吉林)~연해주로, 몽골~시베리아로 건너갔다는 얘기죠.”

1000년의 공백? 고인돌?

여기서 기자가 좀처럼 풀 수 없는 두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나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왜 1000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훙산문화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을 거치는 동안 시간·공간의 과도기를 겪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교수 역시 랴오허를 건너는 동안 생긴 1000년 가까운 공백에 대해서는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결론을 유보한다. 뉴허량에서 랴오허를 건너 선양(瀋陽)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있던 기자가 눈을 떴다.

“저기가 바로 645년 당나라 대군이 궤멸당한 요택(遼澤)이야.”

누군가 소리친 것이다. 과연 대단했다. 수풀이 무성하고 물길이 수없이 뚫린 대습지. “세계 최대의 습지”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는 “다링허~랴오허 삼각주는 무려 14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없으므로~얼어 죽는 이가 많았고~황제(당태종)가 스스로~일을 도울 정도”(삼국사기 보장왕조)라 할 만했다. 훙산문화 시기에는 더하면 더했겠지. 이런 습지로 극복하고 랴오허를 건너는 일은 엔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그게 돌무덤의 전파를 늦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기자의 천박한 상상력이다.

또하나 의문점은 지석묘(고인돌 무덤)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3만여기가 분포된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묘제이다. 가히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고인돌 전문가 쉬위린(許玉林)은 “고인돌은 BC 200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중국 동북에서는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이형구 교수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허량의 적석총·석관묘 같은 훙산문화 돌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고인돌로 발전한 게 아닐까요. 석관의 4벽이 높아져 지상으로 올라가고, 그 위에 큰 개석을 덮게 되고…. 하나의 고인돌 무덤이 된 겁니다.”

고조선의 숨결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랴오둥의 사람들은 분명 고조선 사회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랴오허 서쪽 츠펑(赤峰)에서 석성을 쌓았던 산줘뎬(三座店)과 청쯔산(城子山) 사람들도 고조선인들일 것이다.(경향신문 10월27일자) 쑤빙치(蘇秉琦)도 “이곳에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같은 시대의 강력한 방국(方國)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들은 대규모 석성과 피라미드를 방불케 하는 돌무덤과 빗살무늬토기, 갈지(之)자무늬 토기, 옥기 등을 공통분모로 발해문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뉴허량|이기환선임기자〉
〈동영상|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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