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000&artid=200710071750011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中·한반도·日문명의 젖줄 ‘발해문명’
-발해만 동이족, 동아시아의 새벽을 열다-  
입력 : 2007-10-07 17:50:01

경향신문이 1만㎞를 달렸습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기획탐사를 위한 쉼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역사대탐험입니다. 지난 7월9일부터 8월1일까지 23박24일간이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울란우데-훌룬부이르-하일라얼-오룬춘-건허-하얼빈-선양-츠펑-링위안-차오양까지.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한반도, 아니 한반도 남부에 갇혀있는 역사를 이제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는 결코 한반도에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일 수도, 이웃사촌일 수도 있는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풀어갈 것입니다. 이번 탐사에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역사·고고학), 주채혁 세종대 교수(몽골학), 윤명철 동국대 교수(역사학), 양민종 부산대 교수(신화학),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고고학), 시미즈 순천향대 초빙교수(언어학),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후 시리즈는 13일자부터 매주 토요일자(‘책과 삶’ 섹션)에 실립니다.

경향닷컴 | 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

“랴오허(요하, 遼河) 유역은 고문명의 발상지, 다민족 다문화의 교류지였다.”(선양박물관 ‘랴오허 문명전’ 전시실 입구 소개문)

“중국 문명은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의 결합으로 완성됐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유적·유물이 어쩌면 그렇게 우리 것과 같은지 모르겠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1980년을 전후로 중국 고고학계는 그들의 표현처럼 ‘굉동(轟動·충격)’의 상황으로 빠져든다. ‘중국문명=황허문명’이라는 중화주의를 고수했지만 더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낱 오랑캐(동이·東夷)의 영역으로 폄훼했던 발해만 일대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으니 말이다.

훙산문화의 대표유적인 뉴허량 유적 전경. 수장(首將)급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적석총을 비롯한 돌무덤들이 줄비하고, 왼쪽엔 조상신·하늘신에 제사지낸 원형제단도 조성돼있다.


중국 문명의 원조는 동이족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서북문화가 중원으로 집합해 오늘날의 중국 문명이 완성됐다”고 결론내렸다. 중국 문명을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닌 대릉하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 5600년 유적(차하이(사해, 査海))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 유적과 동시대(BC 6200~BC 5200년)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 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인들은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의 이름을 ‘중화(中華) 제1촌(차하이)’,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BC 4500~BC 3000년)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 建平)과 링위안(능원, 凌源) 양현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 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 赤峰) 싼줘뎬(삼좌점, 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샤자뎬 하층문화 즉, BC 2000~BC 1200년)에서 확인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도 이미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 진(秦)·연(燕)의 문화는 고국(古國·훙산)-방국(邦國·샤자뎬 하층)-제국(帝國, 진·연)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 문명과 국가 형성의 기원 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보았다.

석성, 돌무덤, 빗살무늬토기, 옥기

경향신문 탐사단은 7월27일부터 5일간 동양문명의 서막을 연 다링허·랴오허 일대를 돌아보았다. 국내언론사상 처음 있는 취재이니만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탐사단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발굴이 끝나 아직 국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적(싼줘뎬 석성)도 보았다. 이외에도 청쯔산, 싱룽와 유적, 차오마오산(초모산, 草帽山) 제사유적 등도 전문가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치 않은 궁벽한 곳에 놓여 있다. 한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에서 확인된 ‘갈지(之)자·사람 인(人)자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 신석기문화의 전형적인 유물이 아닌가. 또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결(玉玦·옥으로 만든 귀고리)은 차하이-싱룽와 유적부터 훙산문화까지 도배하다시피했다. 이형구 교수는 “옥결은 최근 한반도 동해안 고성 문암리(BC 6000년)에서도 나왔다”면서 “엄청난 규모의 돌무덤과 제단, 신전인데 석관묘, 석실분, 적석총 등 돌무덤은 우리 민족의 고유 묘제”라고 설명했다.

훙산문화의 대표 유적인 뉴허량에서는 수장(首將)의 것으로 보이는 큰 적석총과 27개의 석관묘가 확인됐다. 이 양식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 유적 바로 곁에 있는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금자탑)도 이번에 직접 보았다.

또한 뉴허량 유적에는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 지낸 원형 제단이, 인근 구릉에서는 지모신 신앙의 상징인 여신묘와 여신상이 각각 확인됐다. 이런 여신상은 랴오허를 거쳐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에서도 두루 보인다.

확인된 치(雉)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삼좌점, 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년).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지난해 발굴이 끝났으며, 이번에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교수(왼쪽)가 성의 규모에 감탄하며 축조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츠펑/김문석기자


13개 치(雉)가 달린 석성은 고조선?

이밖에 싼줘뎬과 청쯔산에서 확인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본 이형구 교수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 고유의 축성술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만 13개나 되는 견고한 석성이었다. 청쯔산 역시 ‘고국(古國)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하가점 하층문화(BC 2000~BC 1200년)에 속하는 이 유적들은 과연 고조선과의 연관성은 없는 것일까.

이형구 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을 운반할 동원력이라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였을 것”이라면서 중원 하나라 시기에 동이족 국가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아예 “고조선 유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이렇게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발해문명을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훙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쉬쯔펑(서자봉, 徐子峰) 츠펑대 교수는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랴오허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다”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정리했다. 다만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

훙산문화의 대표는 황제(黃帝)?

차하이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


쉬쯔펑 교수는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와 중원의 황제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 않으냐”면서 “이것이 바로 문명의 충돌이자, 문명의 습합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학계는 결국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랴오허문명 역시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한 중요한 몫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못박고 있다. 선양박물관의 ‘랴오허문명’ 특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엔 ‘랴오허 유역은 고문명 발상지’라는 전언(前言·서문)을 걸어놓고 있으며, 전시실 한 쪽엔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을 설명하는 도표와 그래픽을 전시했다. 훙산문화와 양사오(앙소, 仰韶)문화,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 大汶口)문화, 량주(량저, 良渚)문화의 상호 연관성을 관람객들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훙산문화의 주체를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시조로 떠받드는 ‘황제집단’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도표는 “훙산문화로서 대표되는 황제집단의 활동 범위는 연산남북지구”라고 해놓았다. 그래픽은 훙산문화가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신농씨의 화족집단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훙산문화를 포함한 랴오허문명을 동이의 문명이라고 하고, 관람객들에게는 훙산문화의 주체를 ‘황제 집단’이라고 ‘교육홍보’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엔 ‘중화문명 탐험공정’

“랴오허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인 이상 중국의 목표는 확실하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하상주 단대공정’을 실시, 전설상의 왕조였던 역사시대로 끌어올려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BC 2070년으로 확정해 버렸다. 하지만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에 속하는 황허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000년)에 비해 여전히 1000년가량 뒤처진 상태. 5000년 중국 역사라고 해왔지만 1000년이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은 이제 랴오허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쉬쯔펑 츠펑대 교수의 말이 중국의 향후 과제를 대변한다.

“중국 정부와 학계는 이 1000년의 갭을 보완하기 위해 올해부터 ‘중화문명 탐험공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이 ‘잃어버린 1000년’을 복원하는 작업을 벌일 것이다. 훙산문화 연구가 그중 하나다.”

이제는 ‘발해문명’으로

뉴허량 유적에서 나온 옥룡.


하지만 궈다순(곽대순, 郭大順)의 말처럼 랴오허문명은 고대문화의 생장점이자 다민족 문화의 거대한 멜팅포트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이른바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다. 그리고 무대는 랴오허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자치주,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물론 중국의 산둥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너무 한정적이고, 중국 중심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교수는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했듯,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발해문명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학계도 “상나라 이전의 문화는 발해만에 있다(先商文化在渤海灣)”(궈다순)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심의 랴오허문명이라는 용어의 폐기와 함께 ‘발해문명’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기획시리즈는 첫회에서는 혼란을 피하려 중국 학계의 용어대로 ‘랴오허문명’이라 했지만, 다음 회부터는 ‘발해문명’으로 표기할 것이다. 

<츠펑·차오양·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han.co.kr〉
<동영상 취재/이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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