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tbZawq


조선왕 준

고조선의 마지막 왕. 
생몰년 : 미상.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이 쳐들어와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자, 준왕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益山) 또는 경기도 광주(廣州) 지방으로 남하하여 마한(馬韓) 지방을 공략하고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고조선의 왕으로 진(秦) 말기와 한(漢) 초기에 걸치는 시대에 재위(在位)하였다. 진(秦)이 장성을 쌓을 당시 고조선 왕이었던 부(否)의 아들이다. 즉위한 지 20여 년이 지나 진이 망하고 중국이 혼란스러워져 연(燕)・제(齊)・조(趙) 지역의 주민이 많이 이주해오자 그들을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정착시켜 살게 했다. 한(漢)이 중국을 통일한 뒤 연왕(燕王)에 봉해진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하여 연 지역에서 정치적 혼란이 생기게 되자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衛滿)도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준왕에게 복속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으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서쪽 방면의 유이민을 규합하여 모반하였다. 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측근 신하만을 거느리고 뱃길로 남하해 한지(韓地)에 와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따르면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온 시기는 효혜고후(孝惠高后) 때(기원전 195-180년)이나, 준왕이 남쪽으로 옮겨온 지역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제왕운기(帝王韻紀)』・『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서는 그가 정착한 지역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으로 비정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초에 소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準)이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통해 한지(韓地)에 와서 살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기원전 2세기에 진국 이외에 또 한이 있었다는 것이다.(노중국, 1987) 한편 후한 말에 편찬된 『잠부론(潛夫論)』에도, “그 후에 한서(韓西)가 또한 한씨(韓氏)를 성으로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되어 해중(海中)으로 옮겨 살았다.”라고 하여, 준왕의 망명 기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있다. 이 기록에 대해 한서는 한동(韓東)의 오류로 한(韓)나라 동쪽에 있던 조선의 준왕을 가리키며, 한씨였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내려와서 한씨왕(韓氏王)이란 뜻에서 한왕(韓王)이라 칭하게 되었고, 거기서 한이란 정치체가 비로소 남쪽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76)

그러나 『잠부론』의 한서(韓西)를 준왕과 연결시켜 과연 그가 원래 한씨였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삼국지』의 근거사료인 『위략(魏略)』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그 나라(조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함부로 한씨를 성으로 하였다.(冒姓韓氏)”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모성(冒姓)이란 남의 성을 함부로 빼앗아 칭한다는 의미이므로, 준왕 일족이 원래부터 한씨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준왕이 한씨라서 한씨왕의 의미로 한왕이라 하였으며 거기서 한이 기원하였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박대재, 2005)

한의 기원과 관련하여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의 “한성(韓城)・한후(韓侯)”를 삼한의 한으로 보아, 주선왕(周宣王, 기원전 827-782) 때 연(燕) 근처에 한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하였다.(김상기, 1949) 그러나 한혁편의 한은 주의 제후국 한(韓)으로서 삼한의 한과는 무관한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김정배, 2000) 이밖에 『산해경(山海經)』의 “한안(韓鴈)”과 『상서공씨전(尙書孔氏傳)』의 “한(馯)”이 청대 고증학자들에 의해 삼한과 관련되어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두 기록의 역사성에 모호한 점이 많아 이들을 삼한의 한과 직접 연결해 보기는 어렵다.(박대재, 2006)

최근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2세기 전반 충남・전북 지역 무덤유적(당진 소소리・부여 합송리・장수 남양리)에서 출토되는 초기철기를 준왕의 남천(南遷)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이남규, 1993; 박순발, 1998) 이들 초기철기가 출토되는 유적들은 무덤 형식에서 대체로 서북한지역의 토광묘 계통으로 파악되는데, 기원전 1세기 이후 마한의 특징적 무덤인 주구묘(周溝墓)와 비교해 묘제나 유물 면에서 계승보다는 단절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외래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최완규, 2000)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전반 초기철기가 출토되는 충남・전북 지역의 유적들이 순수한 토광묘가 아니라 위석(圍石)・적석(積石) 등 토착적인 석관묘 양식이 가미된 복합 형식이며, 또 내륙지역인 천안 청당동・공주 하봉리・청주 송절동 유적 등에서 주구묘와 토광묘가 결합된 주구토광묘가 뒤이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원전 2세기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에서 출현한 초기철기가 준왕집단의 망명에 의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노중국, 1987, 「馬韓의 成立과 變遷」『馬韓・百濟文化』10.
이남규, 1993, 「三韓 鐵器文化의 成長過程 - 樂浪地域과의 比較的 視覺에서」『三韓社會와 고고학(제1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자료집)』, 한국고고학회.
박순발, 1998, 「전기 마한의 시공간적 위치에 대하여」『馬韓史硏究』, 충남대학교 출판부.
김정배, 2000, 『韓國 古代史와 考古學』, 신서원.
최완규, 2000, 「馬韓墓制의 최근 조사 및 연구동향」,『삼한의 마을과 무덤(제9회 영남고고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영남고고학회.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

馬韓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開國 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遠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據本紀 卽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幷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蓋誤濫也 麗地自有馬邑山 故名馬韓也] 四夷九夷九韓穢貊 周禮職方氏掌四夷 九貊者 東夷之種 卽九夷也 三國史云 溟州 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獻之 又春州 古牛首州 古貊國 又或人云 今朔州 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 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 論語正義云 九夷者 一玄菟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鳧臾 六素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 海東安弘記云 九韓者 一日本 二中華 三吳越 四乇羅 五鷹遊 六靺鞨 七丹國 八女眞 九穢貊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궁인과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발흥하였으며, 이즈음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라고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기원전 57)에 일어나고, 고구려는 그 후 갑신(기원전 37)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東明)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더러 금마산(金馬山)을 인정하여 마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으므로 마한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 구한(九韓) 예맥(穢貊)이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으로 곧 구이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에는 “명주는 옛 예국인데 야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장을 얻어 바치었다.”고 하였다. 또 “춘주는 옛 (고구려 때의) 우수주로서 옛 맥국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오늘날의 삭주는 맥국이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다.”고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에는 “동방의 오랑캐는 9종족이다.”고 하였으며,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는 1 현도(玄菟), 2 낙랑(樂浪), 3 고려(高麗), 4 만식(滿飾), 5 부유(鳧臾), 6 색가(素家), 7 동도(東屠), 8 왜인(倭人), 9 천비(天鄙)이다.”라고 하였고,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는 “구한(九韓)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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