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307468.html


조선의 ‘문순득 표류기’를 아시나요

등록 : 2008.08.29 21:16


200여년 전 흑산도 부근 바다에서 표류해 3년2개월 동안 류큐, 필리핀, 중국 등의 풍속을 경험한 뒤 정약전에게 이야기해 ‘표해시말’을 짓도록 한 문순득의 5대손 문채옥씨가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 자신의 집에서 ‘표해시말’을 열어보이고 있다.(왼쪽) ‘표해시말’이 담긴 <유암총서>.


일본~필리핀~중국 3년2개월 여정기 ‘표해시말’ 

“동아시아 문화 담은 중요자료”…재조명 필요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에 사는 문채옥(89·사진)씨는 고서 한 권을 가보로 아낀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1774~1830)가 지은 <유암총서>다. 이 책엔 문씨의 5대조 문순득(1777~1847)이 바다에서 표류해 류큐(오키나와)에 도착했다가 필리핀, 중국을 거쳐 집에 돌아오기까지 3년2개월 동안의 노정을 상세하게 담은 ‘표해시말’이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표해시말’은 당시 흑산도에 유배온 다산의 형 정약전이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95쪽 분량의 책으로 <유암총서>에 실렸다.


■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 


문순득은 서남해의 특산품 홍어를 사다가 나주 영산포에 내다 팔던 상인이었다. 문순득은 25살 때인 1802년 1월18일 작은 아버지 등 5명과 함께 배를 타고 흑산도 인근 태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 류큐까지 밀려갔다. 문순득 일행은 아홉 달이 지난 1802년 10월 중국을 향해 출발했지만 또 다시 표류해 11월 1일 필리핀의 루손(여송) 섬에 도착했다. 문순득은 필리핀 체류 8달 만인 1803년 9월9일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12월11일 광둥을 거쳐 1804년 4월14일 난징에 이르렀다. 1804년 5월19일 베이징에 다다라서야 조선 관료를 만나 귀국길에 오른 그는 1805년 1월 8일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지도)


문순득의 표류와 귀국 경로


문순득은 이국의 문명과 소통할 줄 알았던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필리핀에선 남자가 밥을 짓고, 귀인은 숟가락과 세 끝이 뾰족한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는 등 뛰어난 기억력을 통해 두 나라의 풍속·궁궐·의복·선박·토산물 등을 상세하게 구술했다. ‘표해시말’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 흥미롭다. 실록엔 문순득이 1809년 6월27일(순조 9년) 우리나라에 표류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 통역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 ‘표해시말’ 조명 필요해 


문순득의 표류 체험 기록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79년 ‘표해시말’을 세상에 공개한 최덕원(74) 전 순천대 교수는 “문채옥씨의 집 뒤주의 고서 더미에서 필리핀 말이 적힌 책이 나와 깜짝 놀랐다”며 “어부의 눈으로 보고 느낀 이국의 풍속을 구술해 기록으로 남긴 문순득은 조선의 하멜로 꼽을 만하다”고 말했다. 신안문화원 최성환 사무국장은 “조선 후기에 흑산도 일대의 섬들은 국제 문화 교류가 가능한 공간이었다”며 “학술대회를 열어 문순득의 행적을 재조명하고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제작도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또 문순득의 표류를 표류기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정약전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도 조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경엽 목포대(국문학) 교수는 “‘표해시말’은 당시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 문화 교류가 빈번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며 “실학자인 정약전 선생이 문순득의 표류 체험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록한 해양문학의 보물”이라고 말했다.


문채옥씨도 “겨울이면 흑산도 인근 우이도(소흑산도)에서 머물렀던 정약전 선생의 집터를 30여년 전 사들였지만 아직 빈터로 남아 있다”며 “이곳에 정약전 선생의 기념관이라도 지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신안군 우이도출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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