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2912
정부 '설날 세배 금지령'...오죽했으면!
조선시대 30대 설아무개 상의원 팀장의 '설날'
15.02.18 21:09 l 최종 업데이트 15.02.18 21:09 l 김종성(qqqkim2000)
▲ 설날의 가족 풍경.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 내부에 있는 향토민속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름: 설○○.
나이: 35세.
직업: 상의원 홍염장(紅染匠, 염색 파트의 일부 담당).
주소: 조선국 한성부 남부 ○계 ○동.
35세의 설아무개는 궁궐 의복을 제조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염색 파트를 담당한다. 염색 파트의 일부를 담당하는 홍염장이 그의 직책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는 공장 팀장급의 공기업 직원이다. 그는 조선 후기 한성부 주민 가운데서 평범한 남자에 속한다. 조선 후기(17세기 이후) 어느 해 음력 1월 1일에 그가 어떻게 설날을 보냈는지 들여다보자. 아래 이야기는 역사기록에 나타난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쓴 가상의 이야기다.
새벽 4시께, 2층짜리 종각에서 종이 울린다. 종각은 17세기인 광해군 때 2층으로 증축됐고, 고종 임금 때 보신각으로 개칭됐다. 그래서 조선 후기만 해도 이곳은 종각이란 이름을 가진 2층 건물이었다. 높은 건물도 없고 자동차 소음도 없는 시절이므로, 종각 종소리가 새벽마다 한성부 전체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평소에도 그 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지만, 부부와 아이 셋이 있는 5인 가정인 이 집 식구들에게 오늘은 그 소리가 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설 연휴 3일은 이렇게 종각 종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민간 시장에서는 3일 이상 쉬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부 기관에서는 일반적으로 3일을 쉬었다. 설 팀장은 국영 업체 직원이므로, 그에게도 설 연휴는 3일간이었다.
1월 1일 아침, 조선 전체에서 벌어진 거대한 제사 축제
종각 종소리가 울린 뒤, 어디선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중국에서는 이런 불꽃놀이가 한 달 가까이 벌어졌지만, 조선에서는 음력 12월에서 음력 1월로 넘어가는 시기에 벌어졌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풍속학 서적인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초파일에도 폭죽을 터뜨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 정도로 불꽃놀이는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다. 벌써 여러 날 동안 폭죽의 소음에 시달린 설 팀장은 "정월 초하루 아침까지 꼭 저래야 하나?"라며 살짝 짜증을 냈다.
세수를 하고 새 옷을 입은 설 팀장은 아이들이 복장을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설날 하루 동안 조선 팔도 전체에서 거대한 제사가 거행된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린다. 상의원에서 근무하는지라, 그의 머릿속에는 민간의 사정과 함께 왕실과 조정의 사정까지도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설 팀장의 두뇌 속에서 그려진 것처럼, 설날에는 군주가 온 나라를 대표해서 제사를 올렸다. 그는 국가 사당인 종묘에 가서 천신·지신·조상신 등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와 보조를 맞추어 민간에서도 집안 사당에서 조상신에게 차례를 올렸다. 이렇게 1월 1일 아침에는 조선 전체에서 거대한 제사 축제가 벌어졌다.
▲ 보신각. 서울시 종로구 종로 2가 소재. ⓒ 김종성
설 팀장의 머릿속에는 종묘의 제사도 떠올랐지만, 잠시 뒤 '내 소관이 아니니까'라며 그는 생각을 지운다. 상의원 최고위층인 제조(종1품·종2품)나 부제조(정3품) 아니면 판관(종5품)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품계 없는 공장(工匠, 기술자)인 내가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집안의 차례를 준비했다.
만약 설 팀장이 대가족이거나 명문 양반가의 일원이었다면 큰집에 가서 차례를 지냈겠지만, 한성 시내에서 5인 가족이 셋방을 얻어 사는 형편인지라 설 팀장의 차례는 자기 집에서 이루어진다. 참고로, 설날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부른 것은 고대에는 차(tea)가 필수적인 제사 용품이었기 때문이다.
차례와 더불어 성묘도 해야 하지만, 한성 시내에는 무덤이 없으므로 설 팀장은 성묘를 하루 뒤로 미룬다. 도성 밖의 부모님 무덤까지 5인 가족이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음력 1월 2일까지만 성묘를 하면 이웃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으므로, 설 팀장에게는 아직 하루의 여유가 있다.
설날 직전 공직자들에게 내려진 금지 사항
차례를 마친 설 팀장은 아이들로부터 세배를 받는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므로 그는 상평통보 몇 푼을 세뱃돈으로 준비했다. TV 사극에서는 시장에서 떡을 하나 사먹고도 상평통보 1냥을 내놓지만, 1냥은 100푼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의 몸값이 평균 5~20냥 정도였으니, 재벌급 지주 가문이 아니고서는 몇 냥의 세뱃돈을 내놓을 수 없었다.
세배가 끝나자 밥상이 들어온다. 메뉴는 당연히 떡국.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떡국에는 흰 떡과 더불어 쇠고기·꿩고기가 들어갔다. 꿩을 구하기 힘들면 닭고기로 대체했다. 이 때문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편, 북쪽 지방에서는 떡국 대신 만둣국을 먹기도 했다.
떡국을 씹는 세 아이는 오늘만큼은 세 끼를 먹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왕족이나 지주층이 아닌 이상, 보통은 두 끼만 먹던 시절이었다. 조선 후기에 성균관 출신인 윤기가 남긴 <반중잡영>이란 시집에 따르면, 최고 엘리트인 성균관 유생들도 춘계 석전(공자에 대한 제사)이 지난 뒤부터 추계 석전 때까지만 점심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 정도로 하루 세 끼는 이 시대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설 팀장은 약간의 저축이 있으므로, 평소에는 몰라도 설날만큼은 세 끼를 먹을 수 있다.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은 설 팀장은 직장 상사들이 생각났다. 정부에서는 올해도 설날 직전에 공직자들에게 단단한 금지 사항을 내렸다. 설날을 이용해서 하급자가 인사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하는 일을 막고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세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예전에도 이랬지만, 올해도 정부에서는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설 팀장은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세배를 하지 못하는 대신, 세함이라 불리는 명함을 상급자 집의 대문 앞에 놓고 가는 것은 무방했다. 그런 식으로 성의를 표하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었다.
설 팀장도 세함을 여러 장 만들어 상급자들의 집을 찾아간다. 상의원 제조나 부제조한테까지는 찾아갈 필요가 없고, 판관(종5품)이나 별제(정6품·종6품) 또는 주부(종6품)한테는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집들에 가보니, 대문 앞에 작은 쟁반이 놓여 있다. 세함을 놓는 쟁반이다. 오늘날의 식당 카운터에 있는 명함 박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윷을 던져 새해 길흉을 점치던 풍속이 윷놀이로 발전
몇 군데를 들른 설 팀장은 길가에서 상의원 의류제작 파트에 근무하는 최 팀장을 만났다. 설 팀장 같은 염색파트 사람들은 최 팀장을 꺼려한다. 최 팀장이 툭하면 염색 상태를 갖고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모른 척 하고 지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 팀장은 마음을 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최 팀장도 평소답지 않게 반가운 표정으로 화답했다.
'명절마다 이런 덕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최 팀장과의 사이는 아주 나빠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설 팀장은 길을 재촉한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 덕담은 묵은 갈등을 약간이나마 해소하고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역할을 했다.
설 팀장은 같은 염색 파트에 근무하는 윤아무개라는 상급자의 집에 놀러 갔다. 윤아무개는 설 팀장과 막역한 사이다. 이 집 아이들의 세배를 받은 설 팀장은, 오늘 처음으로 편한 마음이 들어 윤아무개와 잡담을 나눴다. 연말에 남대문 근처에서 상의원 의류제작 파트인 침선장들의 삶을 다룬 연극이 열린 이야기를 하면서, 윤아무개는 "우리 염색 파트는 신경도 안 써주는 세상이야"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설 팀장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개성의 어느 부유한 상단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딸이 출항 직후의 선박을 멈추게 하는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 주상(임금의 정식 명칭)이 사헌부·사간원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패 관료를 영의정에 임명했다는 이야기, 고대로부터 정부의 의무라고 여겨졌던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지금의 집권당이 축소하려 한다는 이야기 등등.
▲ 윷점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해설한 표. 경기도 여주시의 명성황후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옛날 풍속을 다룬 논문이나 서적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설날 하루 동안에 이러저러한 놀이를 많이 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도 많은 놀이가 열거돼 있어서, 이런 놀이를 다 하려면 설날 연휴를 늘린다 해도 부족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느 시대건 먹고 살기도 힘든 서민들이 안 그래도 피곤한 명절에 별의별 놀이를 다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라면 여러 개의 놀이를 소화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많아야 한두 개의 놀이에 참여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설 팀장도 그랬다. 그는 윤아무개의 집에서 윷놀이를 했다. 윷놀이의 기원은 윷점이다.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치던 풍속이 윷놀이로 발전한 것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설날에 윷놀이를 하는 것은 풍흉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윷 세 개를 던진 뒤 거기서 나오는 경우의 수에 따라 새해의 건강·가족·재물·출세 등을 예측했다.
윷놀이를 벌인 뒤에야 설날을 실감한 설 팀장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얼마 안 있어 날이 어둑해진다. 저녁에도 떡국을 먹은 그는 설날 두 번째 날의 계획을 세운다. 세 아이를 데리고 도성 밖으로 나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뵐 계획이다. 밤 10시께 종각 종소리가 울리면서 그는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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