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도 비웃는 성균관 학생회장, 정말 막강했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청춘사극 <성균관 스캔들>, 네 번째 이야기
10.10.20 12:09 l 최종 업데이트 10.10.20 17:32 l 김종성(qqqkim2000)

▲  <성균관 스캔들>에서 학생회장 격인 장의로 활약하는 하인수(전태수 분). ⓒ KBS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스케치하고 있는 KBS2 월화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는 시청자들에게 꽤 낯선 직책 하나가 등장하고 있다. 학생회장인 장의(掌議, '의장'이란 뜻)란 존재가 그것이다. 극중에서 하인수(전태수 분)가 맡고 있는 직분이다. 

장의 하인수는 적어도 성균관 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그의 위세는 웬만한 벼슬아치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드라마 속에서 악당의 대표 격인 그는 측근들을 동원해서 주인공들인 잘금 4인방(믹키유천·박민영·유아인·송중기 분)의 행보를 사사건건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은 정조 임금(조성하 분)에 대해서까지 도전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노론·소론·남인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다 잘사는 탕평(蕩平)의 세상? 정조 임금이 추구하는 그런 세상은 적어도 이 성균관 안에서만큼은 어림도 없다. 기득권 세력인 노론 출신의 하인수가 품고 있는 신념은 그러하다. 

그가 잘금 4인방 중 3인이 거주하는 기숙사 방인 중이방(中二房)을 특히 미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노론 출신의 이선준(믹키유천 분), 소론 출신의 문재신(유아인 분), 남인 출신의 김윤희(박민영 분)가 당파싸움을 벌이기는커녕 그 좁은 방에서 무척 평화롭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중이방 유생들에 대한 이런 증오심을 통해, 그는 사실상 정조 임금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고 있다. 

실제로도 꽤 위상이 높았던 성균관 장의

동료 유생들 위에서 마치 군왕처럼 군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임금의 권위까지 우습게 여기는 성균관 장의 하인수.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 시청자들은 '성균관 학생회장이 저렇게 막강했나?'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학생일 뿐인데 단지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시대적 배경인 정조시대에 실제로 성균관 유생 생활을 한 인물이 있다. 윤기(尹愭, 1741~1826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지은 1천여 수의 시 중에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가 있다. 이 220수는 그의 유고 시집인 <무명자집> 권2에 실려 있다. 성균관 내부(泮中)에 관한 갖가지 시(雜詠)라는 뜻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반중잡영은 인간과 자연과 사랑을 노래한 서정적인 시들이 아니라 윤기의 모교인 성균관을 노래한 서사적인 시다. 이 반중잡영을 읽다 보면, 성균관 장의의 위상이 실제로도 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부목이 소리 높여'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에 딸린 윤기 자신의 해설에 따르면, 성균관 장의에게는 장의사환(掌議使喚)이라 불린 비서가 배당되었다. 웬만한 관료에게도 없었던 전담 비서가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장의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분향이 끝난 뒤'로 시작하는 시에 따르면, 종이·붓·먹 같은 문방용품이 배급될 때에도 장의는 일반 유생들에 비해 높은 특권을 누렸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으로 시작하는 시에 따르면, 임금의 생일 등을 포함한 각종 국경일에 축하의 글을 올리거나 편전(임금의 집무실)을 방문할 때에도 장의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장의가 사람을 천거할 때는'으로 시작하는 시에 딸린 해설에 따르면, 장의에겐 차기 장의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출세하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건 사실

▲  성균관의 구조. 1은 강의실인 명륜당, 2는 사당인 대성전, 3은 서쪽 기숙사인 서재, 4는 동쪽 기숙사인 동재. 성균관은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있다. ⓒ 김종성

▲  성균관의 서재와 동재. 사진은 2개의 사진을 붙여 놓은 것이다. ⓒ 김종성

이처럼 많은 권한과 특권을 향유했기 때문에, 장의는 일반 유생들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영조의 사돈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1713~1778년)이다. 홍봉한의 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을 보면, 성균관 장의 경력이 홍봉한의 인생에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일부 어휘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었음을 밝혀둔다. 

"계해년(1743년) 봄에 아버지께서 성균관 장의로 숭문당에 입시하시니, (아버지께서) 행하는 모든 범절(절차)을 영조께서 보시고는 매우 대단하게 여겨 (나중에 침전으로) 들어와 선희궁께 말씀하셨다. '오늘 세자를 위하여 정승 하나를 얻었노라.' '누구입니까?' '장의(掌議) 홍아무개요.' '이 사람을 위하여 나중에 알성과를 실시할 것이니, 이 사람이 급제하기를 마음 졸여 기대하고 있소.'"

여기서 '숭문당'은 창경궁 안에 있는 전각이고,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이며, '알성시'는 임금의 참관 하에 열린 비정기적인 과거시험이었다.  

숭문당에서 31세의 성균관 장의인 홍봉한을 유심히 관찰한 영조는 가슴이 쿵쿵 뛰었던 모양이다. 그의 일처리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갈구하는 리더는 외모가 좋은 이성보다는 능력이 좋은 인재를 만났을 때에 심장이 훨씬 더 콩닥콩닥 뛰는 법. 장의 홍봉한을 목격한 영조의 심장도 그러했던 것 같다.

일과를 마치고 침전으로 돌아온 영조는 친구 같은 후궁인 선희궁을 만나자마자 대뜸 "미래의 정승을 발견했다"면서 "다음에 알성시를 열어 홍봉한을 합격시켜줄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영조는 홍봉한의 딸을 며느리(훗날의 혜경궁 홍씨)로 맞아들였으며, 그간 번번이 낙방해온 홍봉한 역시 괜찮은 성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홍봉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균관 장의는 임금의 눈에 쉽게 띌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출세를 하기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장의는 드라마 속 하인수처럼 좀 뻐기고 다녀도 괜찮았던 것이다. 

실제 성균관엔 장의 2명, 색장 4명이 있었다

그럼, 성균관 장의란 자리는, 하인수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생들 위에서 무소불위의 제왕처럼 군림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도 비웃을 수 있는 위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다. 성균관에 존재했던 두 가지 제도적 장치가 장의의 권력독점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반중잡영 가운데에 '동재 장의에다가'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장의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 한 가지를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재(東齋) 장의에다가 서재(西齋) 장의.
신분이 높고 가문도 출중하다.
색장(色掌)은 동서에서 상하로 나뉘니,
여섯 명의 장의와 색장이 안배된다.

이 시에 따르면, 성균관에는 두 명의 장의가 있었다. 오른쪽 기숙사인 동재와 왼쪽 기숙사인 서재에 각각 1명씩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하인수 혼자만 장의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2명의 장의, 즉 2명의 수석회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명의 장의 아래에는 색장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색(色)이란 한자가 '종류별, 분과별' 같은 의미도 내포했다. 따라서 색장이란 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분과별 부회장'이란 뜻이 된다. 색장이 "동서에서 상하로 나뉘니"라는 것은 동재의 상하 구역에 각 1명씩 해서 2명의 색장, 서재의 상하 구역에 각 1명씩 해서 2명의 색장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총 4명의 색장이 존재한 것이다. 

2명의 수석회장과 4명의 부회장을 합하면, 총 6명으로 구성된 회장단이 존재한 셈이다. 따라서 성균관 학생회는 일종의 공동회장단 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의 장의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특권과 기회는 많았지만, 막강파워는 없었다

▲  성균관의 강의실인 명륜당. ⓒ 김종성

장의의 권력을 견제하는 또 다른 장치는 당파별 안배였다. 2명의 장의를 두는 동시에 그 2명이 서로 다른 당파가 되도록 안배함으로써 장의 1인의 독재를 방지했던 것이다. 이 점은 '양재의 재임은'으로 시작하는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재(兩齋)의 재임(齋任)은 서로 통하지 않으니,
노론은 서재를 주관하고 소론은 동재를 주관한다.
이것이 전해 내려와 관례가 되었으니
더 이상 다른 당파가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 

여기서 '양재'는 동재와 서재를, '재임'은 장의와 색장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동재는 소론 출신 장의에 의해, 서재는 노론 출신 장의에 의해 장악되었다. 2명의 장의가 상호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론·소론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또 다른 당파들이 동재와 서재를 양분했다는 점을, 이 시에 딸린 해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생회 구조가 위와 같았기에, 장의의 권력은 자연스레 제약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회 간부들의 정치적 성향이 통일될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장의 한 사람이 학생회를 장악하거나 권력을 독점하기가 힘들었다. 

조선은 선비 중심의 사회인지라 젊은 선비들의 대표인 성균관 장의에게 힘이 집중될 경우에는 성균관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2중으로 장의의 권력을 제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 속 성균관 장의는 유생들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임금의 권위까지 비웃고 있지만, 실제의 장의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또 다른 장의와의 경쟁관계 속에서 자신의 권한행사를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반 유생들에 비해 권한과 특권이 더 많고 출세의 기회도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성균관 장의의 파워는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막강하지는 않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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