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인듯 동맹아닌 동맹같은... 고려의 화려한 '썸타기'
[게릴라칼럼] 자국의 이익 우선한 실리 외교
15.03.19 20:14 l 최종 업데이트 15.03.19 20:14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중국과 미국이 한국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미국 중심의 사드(THAAD)에 참여하지 말라면서, 자국 중심의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작년 10월에 출범한 AIIB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세계은행 및 아시아개발은행에 맞서기 위해 중국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하면, 한국은 비상시에 중국의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과반수 지분을 보유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미국은 '사드에는 참여하고 AIIB에는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사드에 참여한다면, 한국은 미국과 함께 중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나라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의 무역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한국에게 미국이 이런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미 양국은 '저쪽과 놀지 말고 나랑 놀자'는 식으로 한국의 소매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런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질지 모른다. 미국이 약해지고 중국이 강해지는 과도기 상황이 심화되면 될수록, 두 나라는 한국이 어느 한쪽을 명확하게 선택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 앞으로 계속 벌어질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상황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천 년 전의 고려 사람들도 유사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북방민족과 중국이 고려를 상대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천 년 전 고려 사람들도 오늘의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경험했다.
송나라의 '파병요청' 뿌리친 고려의 속내
▲ 고려시대 왕궁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 서울 용산구 용산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고려가 세워진 서기 10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거란족 요나라의 상대적 우위 속에 요나라와 송나라(북송)가 대결하고 고려가 중간에 놓이는 구도가 등장했다. 고려는 처음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체결했다. 송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다.
송나라는 고려를 진정한 동맹국으로 믿었을지 모르지만, 고려는 송나라에 마음까지 주지는 않았다. 송나라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론 고려 자신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은 송나라의 절박한 요청을 뿌리친 데서 잘 드러난다.
986년,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빼앗긴 중국 땅을 찾아야 한다'면서 고려에 파병을 요청했다. 고려시대 역사를 축약한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임금인 성종은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송나라가 겁을 주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계속 파병을 요청하자, 성종은 파병할 듯한 자세를 취해 송나라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파병을 하지 않았다. 중국 땅을 늘리기 위한 전쟁에 고려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송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할까를 걱정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려의 이익을 극대화시킬까를 고민한 것이다.
요나라는 '고려와 송나라의 동맹이 굳건하지 않더라도 이 동맹이 유지되는 한 자국의 중국 정복이 성사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요나라는 두 나라의 동맹관계를 깨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감행한 일이 993년의 고려 침공이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유명한 서희다. 서희의 외교술에 힘입어, 고려는 고려의 실익을 챙기는 선에서 요나라와의 전쟁을 막았다.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땅이자 여진족 구역인 강동 6주를 고려가 점령하는 것을 요나라가 양해하는 조건으로 요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기로 했다.
이로써 고려와 송나라의 동맹은 깨지고 고려와 요나라의 동맹이 성립했다. 고려는 송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요나라와 싸운 게 아니라, 강동 6주라는 실익을 챙기는 조건으로 요나라와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고려의 동맹외교에서 제1원칙은 고려의 이익이었던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고려한 '고려의 외교'
▲ 요나라 군대를 묘사한 벽화. 중국 내몽골자치구 파림좌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고려는 요나라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했지만, 요나라에 대해 일편단심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려는 요나라와 동맹을 맺은 뒤에도 송나라와 비밀 접촉을 가졌다. 그러던 중인 999년에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요나라를 견제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려가 요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요청한 파병을 송나라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고려를 적극 도울 생각이 없는 국가와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또 고려는 상대방이 강대국일지라도 고려의 핵심적 이익을 건드리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고려는 요나라가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강동 6주를 탐내자 요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취했다. 고려의 이익을 생각해주지 않는 동맹국은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강감찬의 귀주대첩(1018년)이다.
1018년의 귀주대첩에서 고려는 요나라를 제압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고려는 흥분하지 않았다. 요나라를 꺾었으니 송나라와의 동맹을 회복하자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지만, 고려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나라를 꺾었다고 해서, 요나라보다 약한 송나라와 동맹을 맺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요나라를 꺾은 고려는 오히려 요나라의 손을 굳게 잡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요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동맹관계를 새롭게 채결했다. 고려가 요나라를 꺾긴 했지만 고려가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다.
요나라가 상국이 되긴 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고려이므로, 요나라가 고려에게 상국의 위세를 부릴 수는 없었다. 또 귀주대첩을 계기로 요나라의 남진정책은 저지되고 동아시아에서는 요나라·송나라·고려의 삼국 세력균형 속에 평화시대가 도래했다. 동맹국의 이익이 아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고려의 외교전략 덕분에, 요나라·송나라의 세력팽창이 저지되고 동아시아 평화가 도래했던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 고려 벽란도를 방문한 송나라 상인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 같은 고려의 역할은 다음 시대 국제질서인 금나라-송나라(남송)-고려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12세기 초반부터 13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이 시대에도 동아시아는 고려의 자주외교 덕분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종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고려가 고려 자신과 동아시아 전체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다 보니, 특정 강대국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아시아를 움직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북방민족과 중국은 고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자국의 팽창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고려는 양쪽의 압박을 받는 상황 속에서 무엇이 고려의 이익이며 무엇이 동아시아의 이익인지를 우선적으로 판단했다. 누가 최강국이며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는가를 고민한 게 아니라, 무엇이 고려 백성들에게 이익이고 무엇이 국제평화에 유리한가를 먼저 계산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일차적 숙제는 '어느 나라와 손을 잡을 것인가'에 있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이 우리의 이익과 국제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것인가'이어야 할 것이다. 천 년 전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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