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8304
의자 왕자의 내시, 정말 '고자' 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다섯 번째 이야기
11.09.19 11:22 l 최종 업데이트 11.09.19 11:22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계백>. 왼쪽에서 2번째가 의자왕(조재현 분), 3번째가 계백(이서진 분). ⓒ MBC
사극에 등장하는 왕의 남자 시종들은 천편일률적이다. 아침마다 면도할 필요 없는 얼굴, 약간 구부정한 상체, 남성답지 않은 목소리. 거기에다 결정적인 것이 더 있다. 고자라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MBC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는 남자 시종의 이미지도 그와 같다. 남자 시종에 대한 이 드라마의 인식을 반영하는 장면이 제9회(8월 22일)와 제15회(9월 12일)에 방영된 적이 있다.
제9회 때는 상인 독개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왕자 의자를 방문했다. 병사들에게 판매할 강장제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독개는 아무리 지친 병사라도 이 약만 먹으면 벌떡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믿지 못하겠거든 아무 병사한테나 시험적으로 먹여보라고 권했다. 그러자 의자는 시종인 초랭이에게 시식을 명령했다. 다음은 그 직후에 의자와 독개 사이에 오고간 대화 내용.
독개: (초랭이를 가리키며) "내관입니까?"
의자: "그럼 네 눈엔 장군으로 보이느냐?"
독개: "이건 남자한테 좋은 건데."
▲ 독개(왼쪽, 윤다훈 분)와 초랭이(채희재 분). ⓒ MBC
내관(內官)이란 표현은 궁에서 일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고, 내시(內侍)란 표현은 고자가 아닌 일반 남자 시종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내관이나 내시란 용어를 중국의 환관(고자 출신 시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로 하자.
초랭이는 남자가 아니라는 독개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사극 속의 시종들은 어느 시대건 간에 한결같이 고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내시가 훨씬 늦게 출현했고,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떤 헤어숍에는 '남성 커트 전문' 혹은 '남성 커트 얼마' 하는 식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남성 커트'는 '남성 헤어 커트'의 준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는 무시무시한 의미의 '남성 커트'가 있었다. 고조선 시기의 중국에서는 '남성' 즉 남성성을 합법적으로 '커트'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궁형 즉 거세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남성'을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존재했기에 고자들이 '대량 생산'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환관 조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시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한국에서 '남성 커트'가 시작된 것은 몽골 간섭기(1270년 이후) 즉 고려 후기였다. 몽골제국(원나라) 황실에 바쳐진 고려인 고자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보고서 고려 하층민 사이에서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것이다. <고려사> '환자 열전'에 당시의 풍경이 스케치되어 있다. 환자(宦者)란 환관·내시·내관과 같은 말이다.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이것(몽골에서 출세한 고자들)을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거세하고 형은 동생을 거세했다. 또 강포한 사람들은 좀 분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거세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세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다."
이 글은 고려 후기부터 고자들이 궁중 실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중 하나를 설명해준다. 중국에서처럼 공식적인 궁형 제도가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 후기에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탓에 고자들의 대량 공급과 조직화가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그들이 고려 후기부터 궁중 실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자발적 궁형이 유행하기 이전에 고려 왕궁에 있었던 내시들과 몽골제국에 바쳐진 고려 출신 내시들은 어떤 원인에 의해 '남성'을 잃었을까? <고려사> '환자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고려의 엄인(閹人, 환관)들은 본래 일반 서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한 노비들이었다. 고려에서는 부형(腐刑, 궁형·거세형)을 행하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에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에는 본래 궁형이 없었기 때문에 비인위적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을 궁궐에서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고자가 된 대표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외의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몽골 간섭기 이전의 고려 사회에서는 '남성'을 인위적으로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 이전만 해도, 궁에서 고자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또 전문적인 내시제도가 존재하기 힘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한국의 내시제도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 조선시대 내시인 김선필의 조상 및 후손들이 묻힌 내시묘역.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소재. 내시들은 입양을 통해 대를 이었다.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그럼, 고려시대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이 왕후인 장화부인을 잃은 뒤에 재혼을 거부하고 여자를 멀리했다고 말하면서, 그 주변에 오로지 "환수" 즉 내시뿐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사에서 내시가 등장하는 기록으로는 이것이 최초다.
흥덕왕 주변에 내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 초기부터 그들이 존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2가지다.
첫째, 흥덕왕으로부터 훨씬 이전 시기에 내시가 있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뿐만 아니라 부여·고구려·백제·가야도 다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직관' 편에 나오는 내관(內官)이란 표현은 궁궐 안에 설치된 부서 혹은 백제 내신좌평 등을 가리키는 표현에 불과했다.
둘째, 7세기 중반 나당연합 이후로 신라사회 전체가 중국식으로 급변했다. 관리뿐만 아니라 여성 의복까지 중국식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식 내시제도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세기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비로소 내시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나당연합 이후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만 해도 이미 기원전부터 내시들이 맹활약을 했다. 또 고려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내시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비해,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시대에는 그런 인물들이 전혀 없다는 점은, 한국의 내시제도가 나당연합 이후에 등장했을 것이라는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다.
그러므로 드라마 <계백>의 시대적 배경인 서기 7세기 초반의 백제 궁궐 안에는 고자 출신 내시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판단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일본의 사례다. 무사들의 지도부인 막부가 권력을 장악한 12세기 이후뿐만 아니라 천황(일왕)이 실권을 행사한 그 이전 시기에도 일본에는 고자 출신 시종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사료에 나오는 내관은 단순히 시종을 의미할 뿐이다.
일본의 천황제가 백제·가야와의 문화 교류 속에서 발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 천황 주변에 고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백제·가야 군주의 주변에도 그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드라마 <계백>에서는 남성성을 상실한 고자가 왕자 의자를 보좌하고 있지만, 실제로 의자를 보좌한 이들은 아침마다 꼭꼭 면도하고 상체는 꼿꼿하며 목소리도 남자다운 '쾌남'들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독개가 가져온 강장제를 먹을 자격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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