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5336
90년 전 '시나리오', 또 통했다, 박근혜는 계속 웃을 수 있을까
[게릴라칼럼] 내란덧칠→야당해산... 터키서 입증된 '독재공식'
14.12.22 21:10l최종 업데이트 14.12.22 21:10l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과서에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아래 '무스타파'). 그는 1923년에 수립된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정확히 말하면, 1대·2대·3대·4대 대통령이다. 그는 서양의 침략을 방어하고 터키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찬사도 받았지만, 동시에 공안정국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는 재혼해서 나간 탓에, 무스타파는 부모의 간섭이 거의 없는 친척 집에서 성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해갔다. 그는 항상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직접 최종 결정을 내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이런 성격 덕분에 적지 않은 업적을 남긴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전제주의라면 모를까 공화주의 국가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인 무스타파가 독재자가 될 기미는 취임 3년차인 1925년에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다. 1925년 6월, 그는 재판소를 앞세워 야당인 진보공화당을 해산시켰다. 창당 7개월밖에 안 된 터키 최초의 야당은 제대로 활동도 못 해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스타파와 여당인 인민공화당이 진보공화당을 해산시킨 최대 명분은 이들이 내란죄에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억지에 가까웠다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또 무스타파가 무슨 동기에서 진보공화당을 해산시켰는지도 금방 드러난다.
해산 결정이 있기 4개월 전인 1925년 2월, 터키 동부에서는 쿠르드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르드족은 터키·이라크·이란에 걸쳐서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이다. 약 2500만 명이나 되는 쿠르드족을 소수민족이라 부르는 것은 좀 어색하지만, 이들이 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고 또 어느 나라에서도 최대 민족이 아니므로 소수민족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쿠르드족이 세 나라에 걸쳐서 살게 된 것은, 이들의 삶의 터전인 쿠르디스탄이란 산악 지대가 3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있기 때문이다. 2500만 명이 되는 민족이 국가를 갖지 못한 채 인접한 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쿠르드족 문제는 중동 지방의 또 다른 화약고다. 독립을 향한 쿠르드족의 힘이 결집되는 순간, 중동의 정치지형은 핵폭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쿠르드족 문제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유대인 문제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쿠르드족 반란 직후 '정치집단 해산법' 통과
▲ 쿠르디스탄의 위치. 적갈색 점선의 내부가 쿠르드족의 영역인 쿠르디스탄이다. ⓒ 김종성
쿠르드족이 1925년에 무스타파 대통령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데는 영국의 농간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영국은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쿠르드족을 전선에 끌어들였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영국을 도와 오스만제국과 싸워달라'면서 '그렇게 해주면 쿠르디스탄 대신에 아나톨리아반도(지금의 터키 본토)를 쿠르드족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쿠르드족의 땅은 쿠르디스탄이지 아나톨리아반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쿠르디스탄을 주지 않고 바로 옆의 아나톨리아반도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쿠르디스탄의 모술에서 석유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그 석유를 다른 목적에 이용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엉뚱한 아나톨리아반도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독립이 시급한 쿠르드족으로서는 그런 제안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아나톨리아반도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쿠르드족은 아나톨리아반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본거지인 쿠르디스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쿠르디스탄이 3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쿠르드족만 농간을 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믿을 것은 우리 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해체되고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는 혼란기를 틈타 1925년 2월에 터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한 달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3월 말쯤에는 반란이 거의 진압되었다. 무스타파는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해가면서, 이 반란의 정치적 효용성에 주목했다. 건국 초의 혼란한 정국을 통일하고 자기의 리더십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한 것이다.
1925년 4월 초, 무스타파는 질서유지법이란 보안법을 의회에 상정하여 122대 22로 통과시켰다. 이 법은 체제 전복을 노리는 정치집단을 보다 쉽게 해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쿠르드족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이런 법률을 쉽게 통과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진보공화당=반란세력' 덧칠로 일사천리 강제해산
▲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밥재판소에서 진행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에서 해산 판결이 나자 권영국 변호사가 "오늘로써 헌법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항의하다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무스타파와 인민공화당은 쿠르드족의 반란을 야당인 진보공화당을 탄압하는 명분으로도 활용했다. 이들은 포로로 잡힌 쿠르드족 반군 장교인 카즘 지브란으로부터 "우리는 야당인 진보공화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진술은 진보공화당이 쿠르드족의 반란과 연루됐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카즘 지브란의 진술은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었다. 체포된 뒤에 그는 터키 정부군이 쿠르드 반군 지도자인 쉐이흐 사이트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 인물이다. 터키 정부와 얼마든지 입을 맞출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게다가 '진보공화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에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카즘 지브란의 진술은 좀 이상한 것이다. 터키 정부를 상대로 자치운동이 아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야당의 정권 장악을 기대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
카즘 지브란의 자백은 집권당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용됐다. 무스타파와 인민공화당이 진보공화당을 내란죄로 엮어 해산시키는 데 이용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스타파와 인민공화당은 "종교적인 사고와 신념을 존중한다"는 진보공화당의 강령까지 문제 삼았다. '이 강령은 종교 진영의 반동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라는 억지 해석까지 내놓은 것이다. 결국 진보공화당은 쿠르드족의 반란이 진압된 지 몇 달 안 되는 1925년 6월에 해산되었다.
진보공화당이 내란죄에 연루되는 과정은, 조선시대 역모사건에서 수사관들이 주범에게 고문을 가해 '아무개 왕족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을 받아내는 것과 유사하다. 아무 죄도 없는 왕족들이 이런 식의 수사 때문에 사약을 마시거나 유배를 떠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진보공화당의 해산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측면이 많았다.
다수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공화국에서 야당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무스타파도 알았을 텐데, 그는 왜 야당을 해산하는 강수를 던진 걸까? 그 동기는 쿠르드족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공식대로 차근차근... 박근혜의 미래는 독재를 피할 수 있을까
▲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24일 오전 전북 전주 완산구 전북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을 마친 뒤 센터를 시찰하던 중 탄소소재로 만든 기타를 연주해 보기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 연합뉴스
건국 이듬해인 1924년 연말, 인민공화당 내부에서는 무스타파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독재적 기질을 혐오하는 라우프와 레페트 같은 이들은 대통령 불신임안을 의회에 상정해서 찬반 투표까지 관철시켰다. 하지만 18명만 무스타파에 대한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불신임안은 부결되었다.
이 사건은 집권당 내에서 무스타파의 동지와 적을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의 적으로 판명된 라우프와 레페트 같은 이들은 결국 당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만든 정당이 바로 진보공화당이었다. 무스타파가 쿠르드족과 진보공화당을 엮은 것은 바로 이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무스타파의 진보공화당 해산은 단순한 분풀이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독재체제 구축으로 이어졌다. 그는 진보공화당을 해산한 여세를 몰아 2년 뒤인 1927년에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됐고, 더 나아가 4선에 성공하여 1938년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집권했다. 그는 단순한 장기집권자에 그치지 않고 독재자의 악명을 날리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야당 해산은 이런 독재정치의 신호탄이었다.
지난 19일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이 나왔다. 헌법재판소가 아무리 독립기관일지라도, 이번 사건에 대해 박근혜 정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발판으로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또 통합진보당 해산이 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자신들의 행위가 쿠르드족 반란과 진보공화당을 억지로 엮은 무스타파 정권을 닮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또 자신들의 모습이 진보공화당 해산을 계기로 독재 권력으로 나아간 무스타파 정권과 닮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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