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잔재·반공주의에 ‘사상의 자유’ 질식… 남은 건 대결·혐오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심혜리 기자 grace@kyunghyang.com 입력 : 2015-01-23 22:05:19ㅣ수정 : 2015-01-23 22:14:14
(4) 정치 - 황국신민사상에서 정당해산결정까지
해방 후 정권 잡은 친일파, 정치 혐오·역사 무관심 조장, 다원주의 뿌리 못 내려
문창극 “식민은 하나님 뜻” 이인호 “친일 청산, 소련 지령” 보수 인사 발언의 본류는 친일
새 희망 제시 못하고 분열·파벌로 점철된 야권, 한국정치 퇴행 책임 커
#1 “대한민국 민주화는 좌파의 소유물이 돼버렸다. 한 가정으로 말하면 가장이 돈도 벌고 가족들에게 잘해주니까 자식이 민주화란 이름으로 아버지를 들이받고 뺨을 치는 격이다. 공권력이 회복돼야 한다. 66년 만에 서북청년단을 재건한 이유다.” (60대 서북청년단 이창우 총재)
#2 “구직하면서 가치관이 달라졌다. 직접 경제활동에 참여해보니까 자본가가 노동자를 지배하는 구조는 변하지 않겠더라. 진보세력은 마치 시장경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새누리당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합리적 보수로 정치적 성향이 바뀌었다.” (30대 ‘일간베스트저장소’ 활동 윤모 노무사)
#3 “새정치민주연합이 전당대회를 하고 있는 줄 몰랐다. 관심도 없다. 당 대표를 너무 자주 바꾸는 것 같다. 국민들에겐 관심 없고 권력놀음하느라 자기들만의 전당대회를 치르고 있다. 제대로 된 정책이나 공약도 보이지 않고 인물도 없다” (40대 서울시민 김모씨)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로 재판받는 조선인들. 일제 치안유지법은 일왕제를 부인하는 일체의 사상을 탄압하는 기구였다(위 사진).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19일 헌정사상 최초로 정당해산 결정을 내리고 있다.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꾸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대표적 사건으로 평가된다(아래).
올해가 해방 70주년이지만 한국의 정치는 아직도 일제 식민지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국가를 부모에 비유하는 낡은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보수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억압적인 지배질서에 순응하거나 체념하는 젊은 세대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역동적인 정치참여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일제가 황국신민사상을 내세워 맹목적인 충성을 강조하고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상황이 됐는데도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1940년 태평양전쟁 말기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다양성과 자발적 참여에 의해 움직여야 할 정치는 갈수록 좌우 이념대결과 진영 논리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된 통합진보당 사태는 우리 정치에 잠재된 식민권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보당 해산 결정은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존립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국가권력이 정권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세력을 제거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가권력이 국민의 일부를 ‘비국민’으로 낙인찍고 정당의 자격을 박탈한 사건이다.
국민의 자격 여부를 국가권력이 결정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제의 황국신민사상과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제국주의 일본은 황국신민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낙인찍은 뒤 국민들에게서 배제시켰다.
우리 정치가 일제 식민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해방 이후 한번도 제대로 된 사상의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제 때 치안유지법이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을 바꿔 시민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사상을 통제하면서 우리 정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짓눌려왔다. 이 탓에 일당독재나 양당 대결 구도를 뛰어넘어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경험하지 못했다.
동국대 한상범 명예교수는 <사상·양심의 자유 짓밟아온 일제 치안유지법의 잔재>(1993년)에서 “1945년 이후 남북분단과 냉전시대의 개막으로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사상의 다원주의가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해방되었다고 하는 몇 개월 동안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로부터 국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다원주의적 공존시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공백기의 해프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해방 후 다원주의적 사상이 우리 정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기원을 이승만 정권이 반공주의를 지배질서의 구축 기반으로 삼은 데서 찾는다.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통해 일왕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사상을 반국가 사범으로 처벌한 방식과 동일하게 이승만 정권은 일제 친일 관료들을 영입해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사상을 강요하며 정부 반대파를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반공주의가 일제 치안유지법과 얼마나 흡사한가는 (이승만 정권 시절) 사회안전법이나 전향제도를 비롯한 고문과 각종 탄압 수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며 “일제 탄압체제의 못된 기술을 그대로 승계하고 개발한 것이 반공주의”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그것은 일체의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던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반공 이데올로기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후 우리 정치가 한발 더 식민권력의 그림자 속으로 퇴행한 것은 1960~1970년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존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이다.
한신대 노중기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동원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담론과 법적통제는 일제의 황국신민사상과 맞닿아 있다”며 “박 전 대통령은 국가 전체적으로 충효사상을 강조하면서 본인 스스로 어버이를 자처했다”고 밝혔다.
성공회대 이종구 교수도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이상·효율적이라고 생각한 질서는 자신이 젊은 시절 일본군 장교로서 경험한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였고 유신체제는 1938년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책 중엔 1930~1940년대 일본 파시즘을 본뜬 것이 매우 많다. ‘유신’이란 단어는 일제의 메이지 유신, 쇼와 유신에서 따왔다. 새마을운동 또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국민들이 일장기 앞에서 암송하던 ‘황국신민 서사’에서 유래됐다. 일제 말 전시총동원체제에서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해 매월 한번씩 개최하던 ‘애국반’은 ‘반상회’로 이어졌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청산되지 못하고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의해 식민권력이 수명을 연장한 데는 분열과 파벌로 점철된 야권도 기여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세계독립운동사 가운데서도 한국의 야권은 가장 많은 파벌을 가지고 있었다”며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으로 갈라졌던 사실을 짚었다. 임 소장은 “광복 70년이 되도록 정신을 못 차린 게 야권”이라며 “분열을 거듭하는 야권의 풍토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도 “식민 조선 시절이나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은 ‘독립운동하는 놈들도 다 똑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퍼뜨리며 국민들 사이에 정치혐오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했다”며 “아직까지 정치혐오주의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퇴행적 주장에 맞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야당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퇴행을 야권 분열로만 돌리기보다 소수의 정치엘리트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지면서 일반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참여가 이뤄지지 않은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인이나 주권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혐오증에 쉽게 노출되고 있는 데는 식민지 시절 일제에 의한 일상적인 억압과 통제의 유산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 민족은 게으르고 책임의식이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자 노력했다. 해방 후 집권세력이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도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전면적 자유를 누릴 준비가 덜 돼 있다’는 논리였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가 “조선 민족의 상징은 게으른 것. 일제 식민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던 발언이 드러나 사퇴한 문창극씨 사례는 보수인사들의 의식에 자리 잡은 식민권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과 1996년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경험은 ‘신민’에 의한 정치가 ‘시민’에 의한 정치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장기간 경기침체와 함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잃어버린 10년’으로만 인식되면서 우리 정치에는 낡은 담론이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창극씨 총리 후보자 지명에 이어 지난해 임명된 이인호 KBS 이사장은 친일파 청산 주장에 대해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이었다고 강의했다. 이외에도 김명수(교육부 장관 후보), 박효종(방송통신위원장) 등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한 인사들이 정부 주요 관직에 중용되거나 지명되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관이 정상적인가?’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식민지에서 해방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친일세력은 늘 본류였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잠시 도전을 받았다가 다시 제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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