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419090122740


[풍납토성 발굴20년] 700년 백제 역사의 완성

입력 2017.04.19. 09:01 수정 2017.04.19. 10:11 


거대한 성벽·신전터·대형주거지..왕성 면모 갖춰

중국도기·부엽법·유물 등 고대국가 백제의 발전·교류상 '웅변'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풍납토성 발굴은 백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한성백제 500년을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


기록으로만 전해왔을 뿐 그 실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한성백제 역사가 풍납토성 발굴로 오랜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구와 각종 유물은 이곳이 백제 왕성임을 웅변한다고 학계는 평가한다.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500년 가까이 백제 수도로 기능한 풍납토성 흔적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한성에서 시작해 웅진, 사비로 이어지는 백제 700년 역사도 그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됐다.


하늘에서 본 풍납토성 [서울시제공=연합뉴스]


◇ 백제 왕성 면모 갖춘 풍납토성…신전 건물지·유물 등이 증거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며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위례성이 서울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보고 흔적을 찾아 헤맸다.


첫 후보지는 몽촌토성이었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80년대 송파구 올림픽공원 조성 과정에서 본격 발굴됐다.


당시 몽촌토성에서 백제 토기류가 발견되고 중국제 도자기, 금동제 과대 금구 등 유물과 건물지, 온돌 유구 등이 확인되자 이 곳이 위례성일 것이라는 견해가 부상했다.


그러나 학계 주류 의견이던 몽촌토성설은 1997년부터 풍납토성 발굴이 본격화되며 완전히 뒤집혔다.


풍납토성 성벽과 내부 건물지 등을 발굴하는 과정에 축조 연대가 몽촌토성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무엇보다 제례를 목적으로 한 건물로 보이는 신전건물 자리인 경당지구가 발굴됐다. 이와함께 왕궁 우물로 보이는 어정(御井), 창고, 도로 유구 등이 확인되며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견해가 학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풍납토성은 지리적으로 북쪽으로 한강을 두고, 주변으로 성벽을 쌓아 도성을 방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가 이후에 건설한 성과 같은 양식이다. 백제의 다른 왕성이 풍납토성 형태를 계승해 건설됐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반면, 신라, 고구려가 만든 경주 월성이나 집안의 국내성, 평양성이 강 북쪽에 왕성을 세운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풍납토성을 이루고 있는 성벽은 초기 백제의 강한 국력과 높은 기술력을 짐작게 한다.


실측·조사 결과 풍납토성의 성벽은 밑변 너비 43m, 높이 11m에 달하는 거대한 축조물로 드러났다. 길이는 3.5km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거대한 성을 쌓으려면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투입돼야 하는 것으로 학계는 추산하고 있다. 또 수준 높은 토목 기술도 필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백제가 대규모 동원 능력을 갖춘 강력한 고대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규모 풍납토성 성벽단면과 판축법 설명도(맨 오른쪽) [서울시제공=연합뉴스]


풍납토성 남동쪽으로 1km 안에 자리한 몽촌토성 역시 초기 백제 역사 이해를 풍부하게 해준다.


몽촌토성은 3세기 후반 이후 지어진 것으로 추정돼 단궁 체제로 출발한 백제가 풍납-몽촌 양궁 체제로 확장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한성백제 유적은 남쪽으로 펼쳐진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까지 이어져 도성 기능이 분화하며 영역도 확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건물터나 도로 유구 등도 당시 왕성 기능과 계급의 분화, 경제활동 등을 보여준다.


경당지구는 풍납토성이 제의를 올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왕성이었음을 시사한다. 대형 건물터는 행정기관인 공공건물 존재를 가정케 한다. 70∼80㎡ 규모로 큰 6각형 주거지는 당시 부유층이 존재하는 등 계층이 분화했음을 알게 해준다.


아울러 도로 유구와 인접한 건물터는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과 물류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19일 "풍납토성은 성안에서 신전 건물지가 나오는 등 왕성으로 인정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담긴 곳"이라며 "공주 공산성도 왕성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아직도 있고, 부여 사비성도 왕궁의 위치와 범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며, 경주 월성은 이제야 발굴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풍납토성의 위상을 강조했다.


풍납토성 축성 과정 [서울시제공=연합뉴스]


◇ 2천 년 전 고대국가 생활상 간직한 '타임캡슐'


풍납토성 발굴 당시 학자들을 놀라고 감탄하게 한 것은 거대한 성벽 규모다.


한반도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 정도 규모 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다들 경탄했다.


거대한 성벽은 흙을 여러 겹으로 다져서 쌓아 올리는 방식인 판축법(板築法)으로 축조했다. 산성을 주로 쌓는 한반도에서는 드문 방식이다.


내벽 일부 구간에는 나뭇잎 등을 얇게 10여 겹 이상 깐 것도 확인됐다. 이 같은 부엽법(敷葉法)은 백제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일본 규슈의 미즈키(水城)·오사카의 사야마이케(狹山池) 등에서도 발견된다.


풍납토성을 지을 때 적용한 백제의 토목 기술이 남쪽으로 전해져 일본까지 전파됐음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구들과 말머리뼈(오른쪽 아래) [서울시제공=연합뉴스]


풍납토성에서 눈길을 끄는 유적은 경당지구다. 제례시설로 추정되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유구·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토성 중앙 부분에서 발견된 동서 너비 16m, 남북 18m 이상 대형 건물지는 남쪽에 3m 정도 입구가 있고, 위쪽 건물지는 '□' 형태 도랑에 둘러싸여 있다.


도랑은 폭 1.5m∼1.8m, 깊이 1.2m로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판석 위에는 고운 숯을 조밀하게 채워놓았다.


남측 출입시설은 판석을 세워 구분하고 바깥에 나무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출입구를 엄격히 통제한 점이나 건물 출입을 차단한 점, 도랑 바닥에 판석과 숯을 깐 점 등을 고려할 때 제의(祭儀)와 관련된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다양한 토기 등 유물 [서울시제공=연합뉴스]


공공건물터와 대형주거지 역시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풍납동 197번지 일대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에서는 땅을 파낸 뒤 흙과 강자갈을 채우고 황색 점토로 단단하게 다진 '적심시설'을 확인할 수 있다. 기단석과 함께 파묻혀 있던 수천 점의 기와도 발굴됐다.


너비 16m, 깊이 1.2m의 원형 구덩이에서는 와당, 기와류, 토관, 중국제 도기편 등이 출토돼 학자들은 이 터가 기와를 얹은 건물이 붕괴했거나 관청 건물에서 나온 폐자재를 버리는 폐기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6각형 주거지는 몽촌토성, 하남 미사리, 용인 수지, 의정부 민락동, 포천 자작리 등에서 나온 것에 비해 월등히 크다.


또 당시 주거지가 풍납토성 안팎으로 계층별로 나뉘는 등 도성이 체계적으로 관리됐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밖에도 너비 8m로 잔자갈을 깔아 노면을 만든 110m 도로 흔적은 물자 운송이 활발했음을 암시한다. 중국 강남지방에서 사용하던 시유도기(施油陶器)와 낙랑계 토기, 부여계 은제 장식물, 가야계 토기 등 존재는 백제가 중국을 비롯한 한반도 전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d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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