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amu.wiki/w/%ED%92%8D%EB%82%A9%ED%86%A0%EC%84%B1


풍납토성 (風納土城)



목차

1. 개요

2. 발굴 현황과 내용

3. 의의 : 3.1. 위례성의 위치 비정,  3.2. 초기 백제사 관련 논쟁과 그 오류

4. 위례성

5. 의문점과 반박

6. 애로사항이 꽃피는 발굴 : 6.1. 쓰레기 매립 사건

7. 이야깃거리


1. 개요


BC 1세기에서 AD 3세기 사이에 지어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土城.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제11호. 예전의 공식적인 이름은 광주 풍납리 토성(廣州 風納里 土城). 2011년에 공식적으로 바뀌었다.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가 서울 풍납동으로 바뀐 것이 1963년이니, 무려 48년간 이름과 실제가 다른 지명이었던 셈.


과거에는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단순한 방어성으로 보는 의견이 서로 엇갈리면서 중요성과 보호에 머뭇거리는 점이 있었다. 현재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라는 것이 정설.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단순 방어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머어마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위치는 몽촌토성의 북쪽에 있다.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에 타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전체 넓이는 353,589.1㎡으로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2.7km 가량만이 남아 있다.



2. 발굴 현황과 내용


위 도면의 초록색 부분이 현재 남아 있는 성벽부분이고 주황색 음영 들어간 부분이 2017년 이전까지 조사된 부분이다.


한강변에 인접한 서쪽 성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며 최근 2017년 조사에서 성벽 흔적과 문이 있었던 자리가 확인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벽이 유실되면서 중국제 초두(鐎斗)를 비롯한 백제 유물이 확인되어 풍납토성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 처음 풍납토성에 대한 긴급발굴이 이루어진 후로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풍납토성은 전체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했다. 이미 성 내부에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 왕성임에도 불구하고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이유와 왜 발굴조사가 더디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단들에 나와있으니 참고할 것.


현재 절반도 채 발굴하지 못했지만 발굴조사보고서는 18권까지 나왔다.[1] 물론 소규모로 조금씩 발굴하다보니 보고서의 권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점도 있지만 보고서 하나하나가 한성백제의 물질문화 연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즉, 한성백제를 이야기하면서 풍납토성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발굴 내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풍납토성의 중심부에 해당하고 중요한 자료들이 많이 나온 경당지구[2] 위주로 간단히 서술하였다.


1) 9호 유구 

 

9호 유구                                                        말머리 뼈


 

풍납토성 9호 유구 동물뼈                                  대부명 토기

(사진 출처 : 한신대학교박물관, 2003, 한신고고학 발굴 16년 / 경기도박물관, 2009, 한성백제 특별전 도록)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 수혈(구덩이)로 다량의 토기편과 동물뼈가 확인되었다. 특히 소와 말 머리뼈가 10개체 이상 확인되었으며 대부(大夫)가 새겨진 직구단경호(곧은입항아리) 등이 확인되어 제사를 지낸 후 사용한 토기 및 희생된 동물을 폐기한 유구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소와 말의 머리뼈가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의적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소와 말은 운송수단이자 농경에 활용된다는 점[3]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이런 동물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제사의 가능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여담으로 발굴조사로 인해 경당연립 재건축부지에 대한 사업이 늦어지자 재건축 조합장을 비롯한 입주예정자 3명이 주말에 몰래 현장에 잠입해 9호 유구를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징역을 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문단들을 참고하자.


2) 196호 유구 


196호 유구


시유도기

(사진 출처 : 한신대학교박물관, 2011, 風納土城 XII)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의 창고이다. 유구는 화재가 일어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서는 다수의 백제 토기와 함께 중국에서 만든 시유도기(유약 바른 도기)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시유도기중에는 동전으로 무늬를 찍은 전문도기(동전무늬 도기)도 확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시유도기 내부 흙을 조사한 결과 복어를 비롯한 어류의 뼈 및 이빨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4] 당시 사람들의 식생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196호 유구에서 확인된 중국제 도기와 해산물의 뼈는 당시 풍납토성에 살았던 백제 왕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3) 206호 유구 


 

206호 우물                                                    206호 출토 토기-한신고고학20년 발자취

(사진 출처 : 한신대학교박물관, 2015, 風納土城 XVII / 한신대학교박물관, 2010, 한신대학교 박물관 20년의 발자취)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우물이다. 이 우물의 내부에는 백제토기가 층층이 쌓여있었는데 이 우물이 단순히 물을 마시기 위한 우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물에서 확인된 토기들을 복원하여 확인한 결과 토기의 구연부(입술부분)를 일부러 깨트린 흔적(훼기, 毁棄)이 확인되었다. 이 역시 우물에서 모종의 의식을 치루고 토기의 입술부분을 일부러 깨트려 우물에 토기를 던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4) 풍납토성 동벽의 바깥 


풍납토성 동벽 외곽 우물 (사진 출처 : 경기도박물관, 2006, 한성백제 특별전 도록)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우물과는 또 다른 우물이 고스란히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3. 의의


3.1. 위례성의 위치 비정


풍납토성이 한국 고대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가 가능한 건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다.


첫째로 풍납토성은 기존의 위례성 = 몽촌토성이라는 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 이전까지 풍납토성은 그리 중요한 성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풍납토성이 주목을 받았을 때 한 일본학자가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였으나 묻혀버렸다. 이후 1960년대 서울대 고고학부의 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그저 몽촌토성을 방위하는 사성(蛇城)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 학설은 이병도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이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5] 그도 그럴 것이 풍납토성은 한강과 너무 가까워 홍수 시 침수될 우려가 너무나도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이 한 번 쓸린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평지성이었기 때문에 방어면에서도 불리한 점이 많았다. 고구려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의 경주 월성도 평지성이라기보다는 산성에 가까웠다.[6] 다시 말해서 이래저래 따져 보아도 왕성으로서의 자격 요건이 참 애매했던 성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그렇게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의 정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왕성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데... 규모는 너무 크니까...


바로 이 의문이 풀린 게 1997년이었다. 평소 풍납토성 = 하남 위례성설을 강력히 주장해오던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토성 내에서 진행되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 몰래 들어가 지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조사로 몽촌토성에서 나왔던 유물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에 들어게게 된다. 정부는 조금씩 풍납동 땅을 매입해서 건물들을 철거했고[7] 그 결과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토성의 건축 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일부분을 절개하면서 풍납토성이 판축기법[8]으로 세워짐이 밝혀졌다. 단순히 방위 목적으로 만드는 성에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일 리가 없으니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거나 적어도 왕성의 일부분이었다는 추측이 점차 정설화된 것이다.


3.2. 초기 백제사 관련 논쟁과 그 오류


둘째로 풍납토성은 2000년대 초반 들어 백제 관련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20세기 고대사 연구를 뿌리채 흔들어버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마한을 멸망시키는 등 백제가 초기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제패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종래 고대사학계의 중론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었다.[9] 사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보면 의심이 안 갈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래서 기존 학설에서는 백제가 나라다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을 8대 고이왕부터인 것으로 설명해 왔으며 마한 멸망 역시 근초고왕대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0] 바로 이 학설을 풍납토성이 뒤집어 버린 것.


당시 절개조사 결과 풍납토성의 일부 구역은 BC 1세기에서 AD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의심받는 백제 초기 시대이다. 그리고 풍납토성은 판축기법과 크기 등으로 유추해 봤을 때 연인원 138만[11]에 가까운 상당한 인원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토성이며 원래의 크기도 현재 풍납토성보다 약 2~3배 정도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다시 시행한 조사에서 동성벽 조사 결과는 다시 한 번 반전을 불러왔다. 성벽 절개조사는 1999년에 동쪽 중앙부, 2011년에 동쪽 남부 총 2회를 했는데, 2014년 12월 3일 발표한 연구 결과, 성벽의 건축 연대가 부분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쪽 중앙부는 기원전 1세기 준공, 기원후 2~3세기 증축이였는데, 동쪽 남부는 3~4세기 준공, 4~5세기 증축이라고. 더 정확히는 동성벽의 건축 연대는 250~320년[12]으로 구 한성백제의 건립 연대인 3세기로 다시 올라가 버린 것. 아마도 성벽이 완비되어 국가적 도성의 역할을 한 시기와 최초로 작은 성이 지어진 시기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장정 수백~수천 명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꾸준히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권력이 이 시기 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에 존재했던 것이고,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



4. 위례성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확정된 건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단정짓는 직접 근거가 나타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의 규모나 축조에서 동원된 인원들, 또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규모로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확정짓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다 간접 증거일 뿐이어서 확실하게 풍납토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2006년 풍납토성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위례성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이다. 당시 왕성에만 성 내부를 십자 형으로 가로 지르는 도로를 만들었으며, 그때 규정되는 도로의 폭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폭이 거의 비슷하다. 기록상으로도 가장 유력한 위례성 후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여러 후보들 중 삼국사기의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기록에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두를 통틀어 위례성으로 지칭하고 풍납토성을 북성(평지성), 몽촌토성을 남성(산성)으로 삼아 평소에는 풍납토성에서 지내다가 급박한 위기 시에는 몽촌토성으로 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평양성 - 대성산성이나 신라 경주 월성 - 명활산성도 이런 방어구조를 택했으며, 후대의 후백제 평지 견훤왕궁 - 동고산성, 남고산성이나 조선의 한성 - 남한산성 역시도 이런 평시성 대피성의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고구려 장수왕의 칩입 때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13]


그리고 새로운 발굴 및 연구 성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5. 의문점과 반박


이희진 등을 비롯한 일부에서 제기하는 풍납토성의 왕성론에 대한 의문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아직 왕궁터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며 왕성이라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작다. 한성백제박물관에 가면 왕궁터 재연 모형이 있으나 이는 아직 발굴되지도 않은 왕궁터를 상상에 기반하며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풍납토성은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붕을 올리는 방식의 굴립식 건물인데 이는 많은 무게를 견딜 수 없는 방식이라 이를 위례성이라 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흔히 동시대 일본과 비교해 '당시에는 굴립식 건물이 최고수준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자들도 몇몇 보이지만 그 당시 중국이 천 년 이전부터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 건물을 짓는 방식인 가구식 건물[14]을 지은 것을 보면 굴립식 건물인 풍납토성이 백제 위례성이라는 주장은 백제는 '중국이 천 년 전부터 지어왔던 가구식 건물을 짓지 못할 정도로 형편 없는 나라' 라는 말이 되어 버린다. 또한 당시 고구려가 중원의 건축실력에 크게 뒤지지 않음을 감안하였을 때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면 백제는 고구려의 왕궁보다 엄청나게 뒤떨어진 꼴이 되고 마니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한다면 고구려의 라이벌로 백제를 지목할 수 있나에 의문점이 들기까지 한다.


아무 지식 없이 읽어보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관련 지식을 갖추고 읽어보면 하나같이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고학을 평소 식민사학이네 양독이네 하며 계속 업데이트되는 고고학 관련 문헌과 논문들을 읽지 않는 재야사학계의 무지의 소치가 여기에서 심각하게 드러난다.


우선 그 규모가 매우 작다고 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같은 시기 고구려의 국내성, 신라의 월성과 비교해보아도 풍납토성은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당장 경주 반월성에 비해 3배나 큰 것이 풍납토성이며 낙랑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낙랑토성보다도 크다.[15] 위에서 반론의 근거라고 제시한 일본의 후지와라쿄는 694년, 헤이조쿄는 710년에 들어와서야 수도가 된 곳이다.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가 3세기(201~300)로 비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300년 이상의 연대 차이를 보이는 성을 서로 비교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걸 다 떠나서 축조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무시한 채 비교한 것으로, 백제 왕성과 고려 또는 조선의 왕성을 비교하는 짓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시기상으로는 저 둘을 오히려 후백제 완산성이나 태봉 송악 혹은 철원성과 비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굴립주에 대한 지적은 위례 이후 시기인 웅진이나 사비 도심 및 궁궐에서조차 굴립식 건물이 발굴된다는 사실 하나로 간단하게 논파된다. 고구려의 경우 국내성 유적의 경우도 주춧돌을 쓰지 않고 자갈로 다진 위에 올리는 굴립식인 점을 보면 비슷한 시기의 백제 도성 건물이 굴립주식인 것이 고구려보다 뒤쳐졌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성 유적의 자갈들은 4세기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당시 고구려가 굴립주식임은 부정할수 없다. 중국조차 민간의 건물에 대해서는 굴립주식을 한나라 때도 계속 유지했으니 이에 영향을 받아 고구려나 백제도 굴립주식을 유지한 것은 이상할 게 아니다. 게다가 이희진이 강력한 근거로 드는 일본의 경우 헤이얀쿄는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약 백년 후의 건축으로 중국 장안성을 모방한 배치구조이기에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이전의 아스카 시대의 건축물조차 굴립주식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당초 헤이안쿄 유적과는 수백년의 차이가 나는 풍납토성 유적을 1대1로 비교하는 것은 너무도 무지한 처사이다. 이러한 점들은 동아시아의 도성 건축방식에 대한 발달사를 무시한 결과이며 이것을 무시하는 반론들의 경우 근거를 시대의 순차를 뒤섞어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왕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따지면 국내성도 아직 왕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성이라 할 수 없다.[16] 우리는 코끼리의 모든 부분을 가린 채 코만 보여줘도 그 동물이 코끼리라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풍납토성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유구들 중에는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유구들(9호, 44호, 206호 등)이 존재한다. 이런 유구들과 함께 196호와 같이 중국제 도기들이 확인된 창고 유구, 수 천 점 이상의 백제토기가 확인된 유적은 풍납토성이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판축기법, 부엽공법 등을 통해 연간 수 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축조가 가능한 성벽 등은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6. 애로사항이 꽃피는 발굴


이병도가 주장한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풍납토성은 거의 잊히다시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벽 내부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지 못하게 되었고, 내부 지역의 난개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문제거리가 된 것.[17]


2000년대 무렵 이 토성이 중요한 문화재로 부각된 이후 풍납동 주민들 삶에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다. 가장 직격탄을 맞은 것이 1997년 유물이 발견된 문제의 아파트 주민들. 그래서 재건축 조합에서 유적을 파괴하여 문제가 된 바 있다. 이들에게는 풍납토성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형구 교수가 철천지 원수. 지금도 풍납동 주민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등지에서는 풍납토성은 역사학계가 만든 조작극이다! 라는 주장이 공지글로 걸려 있는 실정이다. 이 주장은 몇몇 역사학자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지역이 진짜 위례성이며, 풍납토성은 마한의 유적이나 중국 상인들이 사용했던 거류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왕성이 아니라고 해도 유적지가 아닌 건 아니다. 백 번 양보해 위례성이 아닌 마한이나 중국 상인 유적이라 해도 그게 조사를 안 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다.[18]


2013년 문화재청이 문제의 아파트 대지에 "풍납 백제 왕성 공원(임시)"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예산 40억 원을 들여 공원과 주민문화센터를 만들겠다고. 일단 문제의 대지를 둘러싼 갈등은 이걸로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


그러나 토성 내부 지역은 2014년 현재까지도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상태로 거주 인구는 약 2만 세대이다. 당연히 이 아파트를 전부 밀어 버리기 위해선 엄청난 규모의 예산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이게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닌 탓에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관심을 덜 쏟아 예산 선정 순위도 높지 않다. 서울시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문제를 떠넘긴 상태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빠른 시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듯하다. 사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 보상비만 총 5천억 원이 들었다고 하고, 매년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비용 총액의 10% 가량이 투입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관련기사)


박인숙 송파 갑 국회의원이 2012년 밝힌 문화재청 내부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 사적지 매입에 필요한 예산은 2조 5천억 원인데 현재까지 완료된 보상은 18%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보상이 완료된 속도로 계산해 보면 보상 완료 예상 시점은 2094년이라고. 게다가 이 비용은 단순히 과거의 '토지매입 비용'만을 토대로 계산한 금액이다. 지금까지 이뤄진 토지매입은 그나마 사들이기 쉬운 지역이었는데, 앞으로 남은 구역은... 정말 멀고도 험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건물 철거 비용이나 폐기물 매립 비용 등을 합치면.....


2015년 12월 23일 서울시는 풍납토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풍납토성의 토지보상을 2020년까지 끝내기로 하였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보상에 국비, 시비 2,855억 원과 지방채 2,282억 원 등 총 5,137억 원을 5년간 투입할 계획이며 지방채 발행 금액은 추후 문화재청에서 지급하게 된다. 보상방식은 왕궁 추정지 등 핵심지역으로 추려 우선 보상하는 '선택과 집중' 모델로 전환됐다. 내용인즉슨, 토성 내부를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기존 성벽과 핵심 유적이 있던 자리는 적극 매입하여 복원 및 공원화를 진행하되 현실적으로 이미 문화재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아파트 단지 등)에 대한 매입 및 복원은 포기하고 재개발 등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서울시는 차례로 보상 지역을 넓혀 사실상 기약 없는 사업으로 여긴 풍납토성 발굴 사업을 점차 진행할 계획이다. (관련기사)


하지만 2017년 1월 원래 이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삼표산업의 레미콘 공장이 이전을 거부하고 법원에 소송을 걸었고, 1심 판결 결과 삼표 측의 승소판결이 내려져서 역사학계, 고고학계가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당초 이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삼표산업 측이 레미콘 공장의 이전을 거부한 속내는 향후 강남 한전부지에 지어질 예정인 현대차 신사옥에 레미콘 공급을 위해서라는 게 통설이다. (관련기사) 2017년 10월에 그동안 묻혀있던 서쪽 성벽이 발굴되면서 지표에 0.5~1.5m 아래에 묻혀있는 성벽이 삼표레미콘 공장을 관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기사) 이는 2심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결국 2심은 1심 판결을 뒤엎고 삼표 측에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어차피 현대차 신사옥도 무기한 중단이라 그냥 부지 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현재 삼표레미콘 공장 바로 옆에서 서성벽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며 역시나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다고 한다. 2019년 2월 28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삼표레미콘 공장이 최종 패소함으로써 추후 레미콘 공장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2018년 2월 현재에는 풍납동 주민들 몇몇은 일련의 사건을 몇 번 겪은 뒤에야, 거주지를 매각하고 있는 추세다. 당장 저 중국 상인 거류지라고 하는 것도 2008년 즈음의 얘기. 지금은 풍납동 근처에 꽤 비어있는 집이 많으며, 풍납시장의 규모도 꽤 줄어든 편이다. 당장 건너편 지역인 천호동과 성내동을 보면, OLD&NEW가 따로 없다. 풍납동의 주거지는 대략 80년대~90년대에 지어진 게 대부분이며, 풍납동의 생활권은 천호동과 성내동이 도맡아하고 있다.


6.1. 쓰레기 매립 사건


2012년 연말에 토성 남쪽 지역을 발굴하던 중 약 8400 ㎡(약 2540평) 넓이 지하 3 m 깊이로 건축 폐기물이 다량 파묻힌 것이 발견되었다. (관련기사) 분량은 약 수천 톤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중에 쓰레기를 발견했으며, 2개월 동안 쓰레기만 파내다가 지쳐서 포기했다고.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누군가 야밤에 몰래 묻은 수준이 아니다.


이 지역은 해자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만약 파낸 흙을 어디로 갖다 버렸다면 거기도 다시 뒤져야 할 정도로 가치가 크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송파구청 공무원 김모가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유적에 있던 태양열 주택단지 철거 과정에서 배출된 건축 폐기물을 묻으라고 지시했다는 것. 안타깝게도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이 인간을 형법에 따라 처벌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7. 이야깃거리


풍납토성 때문에 천호대교가 조금 휘어져 있다. 위성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풍납토성 옆으로 산책로가 길게 나 있기 때문에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많다. 토성의 높이가 야트막한 언덕 정도라서, 예전에는 겨울에 눈이 쌓이면 동네 아이들이 자루포대를 가지고 올라가 눈썰매를 타고, 곧 관리인이 달려오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 (https://youtu.be/BkcLcqwypWM),(관련기사) 하지만 2016년쯤되니 그런 것도 점차 줄어들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시절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이를 막고자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한다.[19] 이를 두고 학계에서도 해석이 분분했으며 현재는 석회석을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운 후 물과 진흙, 모래 등을 섞어 마치 시멘트 처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20] 토성 내부 조사 결과 탄화층이 약간 발견 되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남하할 당시 고구려군이 약탈한 흔적이 아닐까... 추측한다. 또한 군데군데 돌출부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치성도 있었다고 추측한다. 다만 치성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목재 따위를 이용한 임시 가설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오나라 장수 주연의 무덤이 발굴됨과 함께[21] 풍납토성에서 전문도기[22]가 발굴되었는데 백제가 중국과 교류한 것이 4세기 말로 알려져왔으나 3세기 초부터 교류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고고학적으론 부장품의 연대로 성과 고분의 연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과 고분은 먼저 만들어지고 부장품이 후에 묻혔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2015년 3월 현재 풍납토성 주변 지역에는 '풍납토성 문화재 보수정비사업비 5백억 원 확보', '풍납토성 내부 건축규제 완화 환영'이라는 새누리당 소속 송파 갑 당원협의회에서 내건 2가지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15년 5월 1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백제 왕이 꿈 속에 나타나서 풍납토성 복원을 결심했다는 글을 페북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질질 끌던 풍납토성 토지보상을 시작했다. (관련기사)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달리 평지가 아닌 야트막한 야산으로 남았고 개발할 때에도 위례성 후보지로 학자들이 강력히 주장하였기에, 난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올림픽공원 안에 자리한다.


비둘기가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또한 문화재 보존 구역인 탓에 화재의 우려가 있으므로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절대 금연이다.



주석


[1]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고 싶다면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신대학교박물관 홈페이지에서 PDF로 다운받을 수 있다.


[2] 풍납토성 발굴조사는 대부분 재건축 과정에서 유적 조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각 구역별 이름에 건축물 이름이 들어간다. ex)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경당지구), 삼화연립 재건축 부지(삼화지구), 외환은행 합숙소 부지, 현대아파트 건축부지 등등)


[3] 한성백제기에 소나 말을 이용한 우경 또는 마경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 뚜렷한 증거가 없다. 하지만 농경을 배제하더라도 운송수단이라는 점이 있기 때문에 소와 말의 중요성은 역시나 높다고 할 수 있다


[4] 복어는 치명적인 독이 있어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생선이다. 이런 복어를 백제인들이 즐겨먹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인들은 복어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볼 수 있다.


[5] 이병도는 풍납토성의 풍납(風納)이 우리말로 바람들이 혹은 바람드리라고 하였고 이것은 사성의 사(蛇)가 배암(뱀의 옛말)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6] 정확히 말하면 월성은 평지성이 맞다. 하지만 강으로 둘러싸인 남측은 전혀 접근이 안 되고, 북쪽은 야트막한 언덕이 급경사를 이루며 서있다. 따라서 평지성이긴 하되 산성이나 마찬가지다.


[7] 이 과정은 현재까지도 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8] 판축기법이란 황토, 모래 등 여러 종류의 흙을 정사각형의 판에 넣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하나하나 쌓아올라가는 방법이다.(자세히 설명하면 더 복잡하다.) 이는 흙의 물성을 이용한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이며 풍납토성 정도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 했다. 추가적으로 토성하면 그냥 애들 흙장난 수준으로 성벽을 쌓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그런 수준의 토성은 높이 쌓지도 못하고 몇 개월 버티지도 못한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삼국시대 이후 약 1500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이 깎여나간 부분이 많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그나마 몽촌토성은 공원화되면서 어느정도 훼손을 막기라도 했지만 풍납토성은 아예 지역 주민들이 농경지를 일구기도 하는 등(...) 대놓고 훼손을 해댔음에도 이정도로 버티고 있다.


[9] 백제뿐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에 대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들도 많은 부분에서 의심을 샀다. 예를 들면 마한이나 진한 여러 지역들을 백제와 신라가 1~2세기에 접수했다는데 중국 사서 삼국지에는 3세기에도 소국들이 남아있다고 써 있고, 실제 땅을 파 보면 백제신라계 유물이 나오는 시기가 한참 뒤거나, 기록된 삼국 초기 왕들의 수명도 평범한 인간의 수명이 아니다.


[10] 마한의 최종 멸망을 동성왕 때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5c 이후에도 등장하는 금동관 등의 왕족 부장품에 근원한 주장이다.


[11] 매일 동원한 인원의 합계가 총 138만 명이라는 뜻이다. 단순하게 보면 1380명이 1천 일 동안 휴일 교대 없이 공사에 동원되어야 한다. 다른 연인원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수원 화성을 2년 9개월 동안 짓는 데 연인원 70만이 들었다고 한다.


[12] 2012년 논문에서는 252~346년


[13]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 가을 9월...이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14] 가구식 건물은 굴립식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를 견딜 수 있어, 위례성이라면 가구식 건물이 적합하다.


[15] 현재 문화재청에서 사적11호로 지정한 면적만 395,829.8㎡이지만 이것도 일부에 불과하고 학계에서 대체로 추정하는 풍납토성의 면적은 그보다 훨씬 큰 26만평(약 86만㎡)이다. 경주 월성의 지정면적은 302452㎡로 현 지정면적만 놓고 봐도 1천년 가까이 왕성 노릇을 한 월성보다도 크다.


[16] 국내성도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성 내부에 이미 현대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따라서 발굴조사는 재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직 왕궁터는 확인되지 않았다.


[17] 이에 비해 몽촌토성은 고고학자들이 위례성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강하게 개진해, 풍납토성과 달리 난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18] 이병도의 설을 따라 하남시가 진짜 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이희진이나 강찬석 같은 학자들도 풍납토성이 가진 가치를 결코 부정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이 실제 위례성이라고 본 하남에서 풍납토성은 서남쪽(반대로 풍납토성에서 하남은 동북쪽) 방향에 자리해 있고, 풍납토성 안에서 나오는 유물들의 연대가 백제 건국보다 이전인 기원전후로 올라가는 등, 풍납토성이 백제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마한왕이 마한과 백제 사이 경계에 목책을 쌓는 백제 온조왕에게 "처음 막 강을 건너와서 발 디딜 땅도 없던 너한테 동북쪽 땅 백 리를 떼줘서 살게 해 줬더니 이제 와서 나한테 기어오르려 해?"라고 꾸짖는 기록과 비교해(물론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마한 눈치를 보느라 목책을 헐었지만 나중에 마한을 습격해 합병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제시한 처음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했던 백제가 세력을 키워서 거꾸로 마한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다는 시나리오에서 풍납토성이 고고학적 유물로써 증거가 된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다.


[19] 원문에도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고 하여 찔 증(蒸)자를 사용하고 있다.


[20] 중국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지은 성이 남아 있다.


[21]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공예품이 나온 무덤이기도 하다.


[22] 동전 무늬가 찍힌 도기, 중국 삼국시대에 많이 쓰이던 도기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던 도기는 아니라고.




풍납토성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2922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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