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4791
북한산성(北漢山城)
1996년 차용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 서울특별시 은평구·강북구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곽.산성. 사적.
내용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쪽의 방어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쌓았다. 이곳은 고구려·신라 사이에 위치한 접경지이었기에, 삼국이 여러 차례 서로 바꾸어가며 점유하였다.
백제는 주력군을 머물게 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는데, 특히 근초고왕(346∼375) 때는 북정군(北征軍)의 중심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에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킨 뒤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도성을 함락하였다. 백제는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기고서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 뒤 신라는 553년(진흥왕 14)에 백제의 영토인 한성(漢城) 일대를 점령하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하지만 고구려는 603년(영양왕 14) 8월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가 장악하고 있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는데, 신라의 진평왕은 친히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였다. 661년(무열왕 8) 5월에도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인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북한산성을 20여 일 동안 포위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때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은 군민(軍民) 2,800인과 함께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부흥군의 연이은 공격을 받았으므로, 고구려에게 북한산성을 빼앗기면 한강 하류 일대의 주도권을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 무열왕은 승전에 대한 보상으로 성주 동타천의 관등을 제12관등 대사(大舍)에서 제10관등 대나마(大奈麻)로 승급시켜 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곧 고려 현종 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현종은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건물을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에 고려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387년(우왕 13)에는 산성을 고쳐 쌓았다.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고쳐 쌓는 역사(役事)가 계속 전개되었다. 곧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연이어 일어나자 북한산성을 도성의 외곽을 지키는 산성으로 쌓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그 결과, 1659년(효종 10)에는 국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고쳐 쌓았고, 1711년(숙종 37)에는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 크기의 돌로 쌓은 성벽을 완성하였다. 당시 성곽에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성문 13곳과 함께 시단봉(柴丹峰) 위쪽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북장대 등이 각각 설치되었다. 또한 1712년에는 130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140칸 크기의 군창(軍倉)도 건립되었다. 성 안에는 승군(僧軍)이 머물도록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하여 사찰 12곳을 두었고,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산성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흙으로 된 성벽이 약간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 숙종 때 쌓은 성벽 대부분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이 무너진 채 잘 남아 있고, 대서문과 함께 행궁터·장대터·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시설의 일부가 확인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성부사(京城府史)
문화재대관 (문화재관리국, 1976)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이근호,『군사』37,1998)
「북한산성을 쌓게된 경위에 관한 고찰-성곽사적 측면을 중심으로-」(민덕식,『백산학보』45,1995)
「북한산성 의승번전의 종합적 고찰」(김갑주,『불교학보』25,1988)
「위례성과 한성에 대하여 (1)-문헌해석과 축성사적 일반이론의 적용문제를 중심으로-」(차용걸,『향토서울』39,1981)
「숙종조 북한축성고」(김용국,『향토서울』8,1960)
고양 북한산성 전경 1987년에 촬영한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모습이다 | 고양 북한산성 전경 1987년에 촬영한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모습이다 |
고양 북한산성 전경 1989년 이전에 촬영한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모습이다 | 고양 북한산성 성벽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성벽 모습이다. 1987년 촬영 |
고양 북한산성 성벽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의 성벽 모습이다. 1984년 촬영 | 고양 북한산성 대서문 정측면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 대서문의 정측면 모습이다. 1987년 촬영 |
고양 북한산성 대서문 후측면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북한산성 대서문의 후측면 모습이다. 1987년 촬영 | 북한산성 행궁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임시 궁궐터.사적 제479호. 북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행차시의 처소 또는 유사시 임금의 피난처 및 지휘소로 이용할 수 있는 임시 궁궐 즉 행궁의 옛 터이다. 1712년(숙종 38)에 완공되었다 |
고양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정면 고양 북한산에 위치한 1715년에 제작된 금위영 이건기비의 정면 모습이다 | 고양 북한산성 전경 일제강점기 촬영된 고양 북한산성의 모습이다 |
고양 북한산성 중 대동문 정측면 고양에 위치한 북한산성 중 대동문 정측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 고양 북한산성 중 대동문 부근 성벽 고양에 위치한 북한산성 중 대동문 부근 성벽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
고양 북한산성 중 북문 정측면 고양에 위치한 북한산성 중 북문 정측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 고양 북한산성 중 대동문 정면 고양에 위치한 북한산성 중 대동문 정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
서울 북한산 비봉 신라진흥왕순수비지 전경 1929년에 촬영된 서울 북한산 비봉 신라진흥왕순수비지의 전경 모습이다 |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정측면 신라시대에 제작된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의 정측면이다. 1929년 촬영 |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정면 신라시대에 제작된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의 정면이다. 1929년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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