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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불꽃 같은 10년, 잊혀진 100년’
등록 :2019-11-09 09:28 수정 :2019-11-09 11:29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의열단 100주년
1919년 11월10일 만주에서 20대 청년 13명 의열단 창단, 항일의식 일깨우는 암살·파괴
1920년 9월 부산경찰서장 응징, 일제 경찰 관서 습격 91건 잇따라, 종로서 폭탄 던지고 시내 추격전
명성 높아졌지만 폭력 한계도 절감, 무장투쟁 지속했지만 실패 거듭, 조선의용대 창설해 무장투쟁 계승
“의병의 전통 이어받은 의열단, 프랑스 레지스탕스처럼 대접해야”
왼쪽 사진은 1920년 조선 총독 등을 암살하려던 첫번째 거사 계획이 실패하고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들이 경성감옥에서 일부 석방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은 창단 때나 그 이후에 참여한 의열단원들 모습이다. 비밀결사단체라 단원의 사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일제와 친일파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꼽히는 의열단이 10일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11월10일 창단해 1929년 12월2일 해산할 때까지 이 항일 비밀결사단체는 일제의 경찰서나 수탈기관을 폭파하고, 일본군 고위 장교와 밀정을 저격하며, 일왕 거주지에 폭탄을 던지는 무장투쟁 34건을 수행했다. 나치에 맞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운동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들은 해방 뒤 남북에서 합당한 평기를 받지 못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행적을 이유로 의열단 전체가 ‘색깔론’ 논란에 휩싸였고, 목숨을 내놓고 ‘항일의 불꽃’으로 스러진 무명의 대원까지 잊혔다.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어본다.
“독립사상을 지금도 품고 있느냐?”
“지금이라도 조선 독립이 된다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바칠 용의가 있다.”
“의열단의 취지는 무엇인가?”
“조선 독립이 되기까지 암살과 파괴를 계속하는 일이다. 파괴란 일제인 살해뿐 아니라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제적인 모든 제도와 모든 인습까지 파괴하는 것이다.”
1924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의열단원 구여순(1896~1946·존칭 생략)은 일제 검사의 신문에 당당히 답했다. 1923년 여름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3년 5월 같은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또 다른 의열단원 김한(1887~1938)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을 통렬히 비판하는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상태였다.
“조선 사람은 제령(일제강점기에 조선 총독이 법률을 대신해 발표한 명령)을 위반하지 아니하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고정체가 아니요 유동체이다. 따라서 점점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라. 이것은 헤겔이나 다윈이 이미 말하였으므로 나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나, 조선 사람도 역시 사람이라 살기 위하여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할 것은 그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동아일보> 1923년 5월19일치 보도)
김한의 외손자인 우원식 의원(더불어민주당)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1981년 전두환 정권 퇴진 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됐을 때 할아버지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의열단 활동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독립운동이지만, 냉전시대 때에는 후손들도 의열단 얘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기록을 찾다가 언론 보도에 나온 할아버지 최후진술을 봤고, 그 이후 내 지혜의 푯대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 비밀결사단체 ‘의열단’이 창단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11월10일 창단해 1929년 12월2일 해산할 때까지 이 단체는 크고 작은 규모의 무장투쟁을 34건 수행했다. 일제 경찰서나 수탈기관을 폭파하고, 일제군 고위 장교와 밀정을 저격하며, 일왕 거주지에 폭탄을 던지는 등 그 유형도 다양했다. 이러한 항일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오는 10일 오후 6시 서울광장에서 기념식을 연다.
의열단은 일제강점기 때 가장 치열하게 대한 독립을 위해 싸우고도 해방 후 남북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의 해방 후 북한에서의 행적이 논란에 휩싸이면서, 의열투쟁에 참여한 ‘거룩한 순교자’들도 함께 배제의 울타리에 갇혀 잊혀갔다. <의열단, 항일의 불꽃>(두레, 2019)을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프랑스는 비록 짧은 4년 동안의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이에게도 국가에서 최고의 대접을 하고 곳곳에서 이들의 활동을 기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의열단 단원들의 정확한 이름과 수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1920년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박재혁 동상 앞에 서 있는 박재혁 여동생 손녀 김경은씨. 김경은씨 제공
“뜻을 이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1919년 11월9일 밤, 지린성 바후먼 밖 중국인 농민 반아무개의 집에서 조선 청년 13명이 만났다.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휘몰아치는데도 20대 청년들은 밤을 새워 토론했다. 이튿날(10일) 새벽에 이르러 이들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취지에서 단체의 이름을 ‘의열단’으로 정했다.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시켜 계급을 타파해 토지 소유를 평등하게 한다”는 4대 목표를 세우고 김원봉을 맏형 격인 ‘의백’으로 선임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항일 감정을 다시 촉발하는 방식으로 의열투쟁을 선택했다. 의열투쟁은 적은 인력과 비용으로 적을 타격하고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정규군은 물론 의병도 조직하기 어려운, 궁박한 처지에서 의열투쟁은 독립운동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의열단의 창단 배경을 이렇게 분석했다. “1919년 3·1운동에 수백만명이 참가한 것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뒤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6월과 10월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두 차례에 걸쳐 그 기대가 배반됐다. ‘외교 독립론’의 주요 뼈대가 무너지자 항일운동은 후퇴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내 한 몸을 바쳐서라도 운동의 후퇴를 막고 싶다는 심리가 형성됐고 그것이 의열투쟁으로 나타났다. 의열단이 1919년 11월에 창단했다는 것, 그 시점을 주목해야 한다.”
의열단의 첫 무장투쟁은 1920년 3월 조선 총독 등 적의 고관과 주요 관공서 파괴로 계획됐다. 권총과 폭탄 등 준비한 무기는 국내에 들여왔다. 그러나 일제의 첩보망에 걸려 폭탄 3개를 빼앗기고 의열단원 등 관계자 12명이 붙잡혔다. 다시 5월 중순께 폭탄 13개와 권총 2정을 국내로 보냈지만 역시 일제 경찰에 발각돼 6명이 추가로 검거됐다.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도 검거된 의열단원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검거된 뒤 200일 동안 고문당해 만신창이로 형무소에 업혀 들어갔다.” 의열단 창립단원인 신철휴(1898~1980)의 아들 신홍우(80)씨가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신철휴는 동지들과 만주에서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해 ‘투탄(폭탄 던지기)조’의 일원으로 참여하려다가 체포됐다. 그는 1921년 6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던 신철휴는 병이 심해져 1925년 7월 석방됐다. 해인사로 들어가 2년간 솔잎을 먹으며 겨우 몸을 추슬렀지만 그 뒤로도 삶은 험난했다. “아버지 주변을 항상 밀정이 맴돌아 모임만 나가도 경찰이 쳐들어와 체포해 갔다. 여러차례 옥고를 더 치렀다.”
첫 거사 때 의열단이 어렵게 구한 폭탄을 압수하고 단원들을 구속한 부산경찰을 지도부는 응징하기로 했다.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1895~1921)이 거사를 도모했다. 3대 독자였던 그는 14살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공립부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지역 청년들과 항일운동을 하다 1917년 6월 상하이로 넘어가 1920년 4월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 지도부의 무력투쟁 지시를 받은 박재혁은 1920년 9월14일 부산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중국인 고서적상 행세를 하며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 면회를 신청했다.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사전에 고서를 잔뜩 산 터라 별다른 의심 없이 면담 허락을 받았다. 두 사람이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하게 되자 박재혁은 폭탄을 끄집어내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유창한 일본말로 독립투사들을 잡아 괴롭힌 죄를 꾸짖으며 폭탄을 마루에 던졌다. 하시모토는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다. 박재혁도 오른쪽 무릎뼈에 중상을 입었다. 구속된 그는 단독 거사라고 주장했고 1921년 3월 사형을 확정받았다.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박재혁을 친구가 면회했다. “내 뜻을 다 이뤘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친구가 가져온 달걀 꾸러미를 거절하며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도 했다. 1921년 5월21일 단식으로 결국 순국했다. 향년 26.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는 항일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 뒤 1년간 국내에서 일제 경찰 관서를 습격한 사건이 91건이나 발생했다. 그중에는 1920년 12월27일 의열단원 최수봉(1894~1921)이 감행한 ‘밀양경찰서 폭파 시도’도 있었다.
박재혁은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 홀로 무장투쟁인 탓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올해에야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호밀밭)이 나왔고 생가와 부산경찰서 옛 터에 표지판이 세워질 예정이다. 박재혁 여동생의 손녀인 김경은(54)씨는 “국립서울현충원 묘비에 사망 일자가 50년 넘게 잘못 적혀 있었더라. 뒤늦게 날짜를 고치고 틀린 약력도 바로잡았다. 의열단원들이 공적을 제대로 조명을 받아 안중근, 윤봉길 의사처럼 교과서에도 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 이익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
의열단은 한결같이 조선 총독 암살과 조선총독부 파괴를 ‘목표’로 삼았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폭렬항쟁도 있었다. 1921년 9월12일 한 청년이 전기공 차림으로 조선총독부 통용문을 지나 유유히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총독 집무실로 보이는 방 두곳에 폭탄을 던졌다. 순식간에 총독부 청사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의열단원 김익상(1895~1943)이었다. 그는 허둥대는 일경들에게 진짜 전기공인 것처럼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총독부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는 검문을 피해 일주일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7개월 뒤 상하이 ‘황포탄 의거’가 일어날 때까지 조선총독부 파괴 시도의 주역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의열단의 본거지인 상하이를 지나간다는 언론 보도가 났다. 그는 한국인의 해방운동을 총칼로 압살하도록 명령한 자였다.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여객선이 상하이 황포탄 세관 마두의 잔교 앞에 도착했다. 다나카가 내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자 오성륜(1900~1947)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탕탕! 세 발이었다. 불행히도 서양 여성이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깜짝 놀란 다나카가 자동차를 향해 달아나자 이번에는 김익상이 총을 겨눴지만 다나카의 모자만 뚫었다. 이번에는 우왕좌왕하는 군중을 헤치고 이종암(1896~1930)이 폭탄을 던졌다. 앞바퀴에 맞았는데 바로 터지지 않자 옆에 서 있던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버렸다.
이종암은 피신했지만 김익상과 오성륜은 붙잡혔다. 앞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것이 김익상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일제 재판정에서 판사가 “마지막이니 무엇이나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김익상이 답했다. “나에게 이익 되는 점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다.” 사형이 확정됐다. 당시 김익상은 젊은 아내와 세살배기 딸이 있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1943년에 투옥된 지 21년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얼마 뒤 조선총독부 형사에게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영화 <밀정>의 첫 장면은 의열단원 김상옥(1989~1923)의 1923년 1월 서울 총격전을 모델로 삼았다. 경성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옥은 1월12일 저녁 8시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유치장 창문이 깨지고 건물 앞을 지나던 기자 등 7명이 다쳤다. 남산 기슭 삼판동(현재 후암동) 민가에 숨어 있던 김상옥을 경찰이 찾아낸 것은 닷새 만인 1월17일이었다. 피습당한 그날 조선총독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경찰은 김상옥의 은신처를 에워싸고 경찰 4명을 집 안으로 보냈다. 방 안에서 권총 탄환이 쏟아졌다. 경찰 3명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매복해 있던 다른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김상옥은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행방은 사라졌다.
잠적했던 김상옥의 발자취는 1월22일 종로5가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발견됐다. 효제동이었다. ‘수백명’의 무장 경관이 일대를 수십겹으로 포위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작전에 들어갔다. 벽장에 숨어 있던 김상옥은 총상을 입고도 벽장 뒷벽 흙담을 뚫고 도망쳤다. 재래식 뒷간에 숨어들었고 경찰은 3시간이나 총탄을 퍼부었다. 마지막 총탄이 남았을 때까지 싸우다 김상옥은 최후의 선택을 했다. 검시관에 따르면, 그의 몸에는 총탄 여러개가 박혀 있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오른손 둘째 손가락은 권총의 방아쇠를 꽉 쥐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시가전으로 죽은 일제 경찰은 15명이었다.
일제의 첩보자료에 따르면, 이 무렵 의열단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단원이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임시정부에 불만족하는 사람 및 러시아국의 후원을 믿기에 부족함을 간파한 사람들로부터 의열단에 참가하는 자는 점점 증가해오고 있는데 이제야말로 한국 내외에 걸쳐 극력 비밀 선전에 힘쓴 결과 단원이 천인을 헤아리게 되었다.”(1923년 8월30일치 상하이 일제 총영사 첩보)
1919년 의열단 창립 단원인 신철휴가 잠든 국립대전현충원 묘소에 앉아 있는 아들 신홍우씨. 신홍우씨 제공
“폭탄을 먼저 들겠다고 제비를 뽑아”
명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의열단장 김원봉은 암살·파괴·폭동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행동만 있고 선전이 뒤를 따르지 않을 때, 일반 민중은 행동에 나타난 폭력만을 보고 그 폭력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폭력과 함께 또한 꾸준한 선전과 선동과 함께 계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 1947)
1922년 겨울 김원봉이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만나 ‘의열단선언’을 요청한 이유기도 하다. 의열단의 비밀참모였던 류자명(1894~1985)이 교섭을 맡았다. 신채호는 일제와의 끝장 싸움, 무력투쟁 사상을 펼쳐온 터라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민중이 중심이 돼 파괴와 폭력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 직접혁명의 길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의열단의 무장투쟁 활동은 계속됐다. 1923년 9월 ‘일왕 부자 처단 시도’, 1924년 1월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 투척’, 1926년 12월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 습격’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의 회고록 <아리랑>에서 조선인 독립투사 김산(1905~1938)의 스승으로 소개된 김성숙(1898~1969)은 당시 의열단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 젊은 사람들은 서로 내가 먼저 죽으러 국내로 들어가겠다는 자세였다. 폭탄을 들고 먼저 나가겠다는 것이지. 그런데 국내로 한번 나가려면 여비도 있어야 되고 돈도 많이 들어야 되지 않나? 그러니 나가겠다는 사람을 모두 내보낼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제비를 뽑기도 했다. 먼저 죽으러 (가는) 일이었는데도.”
엉뚱한 부작용도 발생했다. 의열단이 국민의 환호를 받자 의열단 행세를 하는 사이비가 등장해 독립운동기금을 갈취한 사건이 잇따르는 등 자금 마련도 어려워졌다. 김원봉은 노선 변경을 택했다. 1926년 중국국민당 총리 쑨원이 세운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학교는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다수의 소련 군사고문단 등도 참여해 명실상부한 ‘국공합작’의 형식을 갖춘 곳이었다. 또 1927년 의열단의 조직을 개편했다. 의열단 이론가였던 류자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의열단 단원들은 과거와 같은 단순한 폭렬운동으로는 혁명을 완성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혁명정당’을 성립하게 된 것이다. 여러번 회의를 열고 토론한 결과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이라 하고 당의 강령과 정책을 결정하였다. 의열단은 ‘민족혁명당’으로 전면되었다.”(<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사실상 의열단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10일 창설됐다. 이날 오전 10시께 한커우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거행된 결성식에는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조선인과 중국의 군·정·관계 인사들, 대원 100여명이 참석했다.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차정, 한평생 독립운동의 길
항일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해나갔다. 1930년 베이징에 비밀 정치학교(레닌주의정치학교), 1932년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창설해 3년 만에 수백명의 혁명간부를 키워냈다. 초기 의열단원은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애국심 하나로 적진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희생자가 많았다. 하지만 혁명간부학교에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졸업생은 국내와 만주로 투입돼 특무활동을 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졸업생 중에는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도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의열단에 가입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 가까이 옥살이도 했다.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이름을 ‘육사’로 지었다. 그는 서울에 잠입했다가 1934년 9월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여성부 교관은 박차정(1910~1944)이었다.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하기 전부터 그는 여성 항일투쟁 연합 단체인 근우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근우회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와 인신매매 및 공창제 폐지 등을 행동 강령으로 내세웠다. 결혼한 뒤 박차정은 무장항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무술과 사격, 승마 기술 등을 연마했다. 그리고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어깨에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전장을 누비다가 1944년 5월 부상 후유증으로 숨졌다. 박차정의 조카 박의영(70)씨는 “고모는 독립운동 집안에서 자라 10대 때부터 여성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평생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 탓에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단절되고 왜곡됐던 독립운동사가 이제라도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했다.
1935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고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조선이 무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셈이다. 의열단이 13명으로 창단된 지 19년 만이었다.
김삼웅 전 관장은 “외침 때면 어김없이 일어났던 의병의 전통을 이어받고 이를 실행한 우리 역사의 정맥사상이 발현된 것이 의열단”이라며 “열악한 무기(권총과 폭탄)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폭탄이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때(1932)의 성능 정도였다면 우리 독립운동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숙의 외손자이자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사무국장인 민성진(57)씨는 “의열단은 김원봉 단장뿐만 아니라 류자명, 신채호, 김성숙, 이육사 등 많은 단원이 목숨을 걸고 활동했는데 보수세력의 이념 공세 탓에 지난 100년간 제대로 조명받지도 못했다”며 “이제라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활발히 펼쳐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무장투쟁 단체로서 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열단 기념사업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의열단 투쟁 이론을 정립한 류자명의 경우 그의 고향인 충주시에서 전시관 건립과 생가 복원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10년이 넘도록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2006년에 육필원고 등 유품 200점을 유족에게 기증받고도 시장이 바뀌었다며 박물관 창고에 쌓아놓은 탓이다. 류자명의 손자 류인호(83)씨는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인 행세를 하며 자녀들한테도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된 뒤에는 중국에서 원예학자로 3천명의 제자를 길러냈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1985년 후난성 창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고향 땅에서조차 그의 항일 행적을 되새기는 데 무관심한 것이다. 2019년 100주년을 맞은 의열단의 현주소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남에서도 북에서도 소외된 독립투사
의열단장 김원봉은 가장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해방 후 월북 행적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북에서는 숙청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제공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을 빼고 독립운동사를 기술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1919년 의열단을 만들었고, 1938년 조선의용대장,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과 국무위원을 지내며 ‘쉼 없는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 직후 그가 돌아왔을 때 경남 밀양 고향 마을은 일제가 김구보다 높은 현상금을 걸었던 독립투사 환영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기념해 지난 2월 말 독립기념관이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특별판)에는 김원봉의 이름이 없다. 편찬위원장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원봉 선생 원고도 준비했는데, 지금 정치적 상황에서 넣었다가는 출간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해 할 수 없이 뺐다”고 말했다.
보훈처 혁신위 서훈 권고에 보수 야당 반발
그가 언급한 ‘정치적 상황’은 ‘김원봉 서훈 논란’이다. 당시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김원봉 서훈을 보훈처에 권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보수 야당은 크게 반발했다.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행적 때문이다. 김원봉은 1948년 4월 김구와 함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석하러 북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58년 숙청당했다.
보수 야당은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라며 “김일성도 독립운동을 했으니 훈장을 줘야 하느냐”고 따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8월 영화 <암살>을 보고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고 쓴 페이스북 글도 소환됐다. 문 대통령은 6월 현충일 추념사에서 “광복군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며 김원봉을 다시 언급하기도 했다.
보훈처는 “현행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기준으로는 선정이 불가능하고, 기준을 개선하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참여정부 때인 2005년 서훈 대상에 포함됐지만, ‘광복 전’으로 제한했다. 지난해 심사기준 개정으로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도 서훈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경우’로 제한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지난 8월22일 기준 개정을 통한 김원봉 서훈 추진 가능성에 대해 “그럴 생각 없다”고 밝혔다.
“건국훈장을 독립·광복·항일훈장으로”
학계에서는 김원봉의 ‘북한 정권 기여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그가 북한 권력의 핵심인 조선노동당 당원이 아니었고 그가 맡은 직책도 영향력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는 의견과, 정권에 참여했으니 당연히 기여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다. 9월19일 열린 ‘조선의열단 학술대회’에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남북 양쪽에서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경우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특별조항을 신설해 서훈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국외 항일운동만으로 본다면 김원봉의 공적은 김구와 비견할 수 있지만, 심사기준에서 벗어나 서훈이 불가능하고, 훈장 명칭이 건국훈장이라는 점 때문에 수여가 어렵다”며 “건국훈장 명칭을 독립·광복·항일훈장 등으로 바꿔 대한민국의 포용력을 확장하고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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