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822.22017205253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22> 연해주의 한국 지명들
한국 뜻하는 `까레야` 붙은 지명 모두 사라져
대국 틈바구니 속 고려인들 삶의 흔적 역사 속으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8-08-21 20:53:31 | 본지 17면
한씨마을 근처에 흐르던 두만강의 지류에 지금은 마야치노예 강이라는 팻말이 놓여있다.
필자가 쓴 글을 보거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어려움은 지명들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니꼴라예프스꼬예' '자이사노프까' 등 한국말로는 6,7자가 넘는 게 보통이니 말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는 어미의 변화가 극도로 심해서 하나의 어원으로 나올 수 있는 변화형은 수십개다. 예컨대 '이바노프'라는 성이 있으면 이바노프스꼬예 이바노프까 이바노프스까야 등으로 불리운다. 그러니 한국말로 옮길 때 무의식적으로 변화형을 따라서 적다보면 같은 지명도 한국사람한테는 서로 다른 말이 된다. 게다가 표기법도 통일되어있지 않다. 전 대통령 '푸틴'도 '뿌띤' '뿌찐' 등으로 쓸 수 있다. 또 러시아어에는 강세가 있어서 '모스크바'도 읽을 때에는 '마스끄바'가 된다. 러시아어를 음차할 때는 지명을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하고 쓰는 대로 적기도 하니 정말 난해할 수밖에 없다. 사람 이름의 경우 같은 철자라도 각 가문의 습관에 따라 강세가 서로 다른데, 그런 것은 사전에도 안 나와있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 '호흘로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호홀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쓰는 모자를 뜻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출신 사람들에 대한 속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베리아 출신의 호흘로프는 대체로 호흘로프라고 읽고 모스크바 출신들은 하흘로프라고 주로 읽는다. 그러니 러시아 사람들조차도 강세나 변화형을 제대로 지켜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의 경우는 러시아어의 특성 때문에 골치 아픈 경우이니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먼 북해나 동유럽의 지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연해주로 온다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19세기부터 연해주 이곳 저곳에는 고려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만주인과 이 지역의 원주민들이 거주했었다. 또 러시아 사람들이 새로 개척한 동네는 러시아식 이름이 붙여졌다. 연해주의 지명들은 한마디로 근대 이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공존했던 이곳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에 다만스키섬을 두고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중국식의 지명이 향후 영토분쟁의 근거가 될 것을 염려해서 모든 지명을 러시아식으로 바꾸었다. 중국이건 러시아건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후였기 때문에 지명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찾는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국들의 싸움 속에 수천 개의 지명이 일순간에 바뀌게 되었고, 그 와중에 여기에 거주하던 원주민이나 한국인들이 붙인 지명도 같이 사라졌다. 연해주의 곳곳에는 한국을 뜻하는 '까레야'가 붙은 산이며 계곡이 상당히 많았으며, 블라디보스토크시에는 거리이름 마저 '한국'이 있었다. 이들 지명도 지금은 다 바뀌어졌다.
두만강이 러시아쪽으로 들어가는 지류는 '안개'를 뜻하는 '뚜만나야'로 바뀌었다. 원래 이름과 비슷한 노어로 바꾼 것이다. 한·러 국경인 핫싼지역의 지명은 고려인들이 살았던 탓에 대부분 한국계였지만 모두 1970년대의 개명바람에 없어졌다. '삼거리'라고 불리웠던 동네는 '글라드까야'로 바뀌었고 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붙여진 한씨 마을은 '마야치노예'로 바뀌었다. 그밖에도 '남재거리' '고개' 등 많은 이름 들이 있었다.
옛 기록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한국계 지명들은 러시아어로 음차되어 표기되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어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그 원뜻을 모두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지명들이 필자가 조사하는 한·러 국경지역 곳곳에서 발견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는 끄라스끼노 발해 성지에서 발굴 중이다. 끄라스끼노의 발해 성터는 바닷가의 너른 평야인 탓에 고려인들이 경작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발굴하면서 당시 고려인들의 경작지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현지인들도 옛 이름대로 고려인들이 부르던 연추리(끄라스끼노), 얀치헤(쭈가노프까 강)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한·러 국경지역의 고려인들은 국적없이 살면서 한국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고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다툼에서 러시아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의 유일한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명들마저 러시아와 중국의 다툼에 사라져버렸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정작 우리는 잃어버린 연해주의 옛 지명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독도며 꾸릴섬이며 사방의 섬들에 대해 없는 연고도 만들어가면서 억지로 주장하는 마당에 우리는 150여 년 전에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를 그냥 흘려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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