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581587
조선 청년들이 중국 혁명에 참여한 이유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임정로드'를 떠나다] 열네 번째 이야기, ‘광주기의열사능원’에서
조종안(chongani) 등록 2019.10.31 09:47 수정 2019.10.31 09:47
▲ 광주기의 기념탑 ⓒ 조종안
기록에 따르면 광저우는 주강(珠江) 삼각주 북부에 자리한 하항(河港)으로 홍콩과는 140km 거리에 위치한다. 중국 근대화 과정에서 중대한 혁명적 사건의 발상지가 됐으며, 청나라 초기에 시작된 유럽 각국과의 교역으로 일찍부터 현대화가 진행된 도시로 알려진다. 혁명의 바람을 세차게 내뿜었던 중국 근대사에서 태풍의 눈과 같은 역할을 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장제스의 청당(淸黨) 운동으로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 12월, 광저우 공산당 세력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에 맞서 무장봉기(광주기의)를 단행한다. 농민과 노동자 주축으로 '광동 코뮌'을 일으킨 것. 그러나 삼일천하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가 5000여 명 발생했는데,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묘지공원이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이다.
묘지공원 이름에서 기의(起義)는 '의로운 항쟁'이란 뜻으로 광저우시 지방정부는 공산당 무장봉기를 '의거'라 하고 희생자들을 혁명 열사(烈士)라 칭한다. 놀라운 사실은 조선 청년도 150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 조선인 희생자들은 중국의 혁명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참여한 황포군관학교 출신과 중산대학 재학생이 대부분으로 알려진다.
중국과 조선 인민의 피로 맺어진 우의를 기리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란 정자가 광주기의열사능원에 세워진 것도 그에 연유한다.
국립현충원 참배 때처럼 숙연해졌던 '광주기의열사능원'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다섯째 날(5일)은 광둥성 성도 광저우에서 시작했다. 오전에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동산백원'과 '동교장'을 돌아보고 중산2로 부근에 자리한 '광주기의열사능원'으로 이동했다(관련 기사 : '건국절 논란' 한 번에 격파시킬 수 있는 '동교장').
▲ 혁명열사 인물상이 전시된 영웅광장 ⓒ 조종안
▲ 군복 차림의 섭검영 소상 ⓒ 조종안
3~4분 걸었을까. 혁명 영웅들 소상(塑像)이 안치된 '영웅광장'이 나타난다. 황금색 안내문이 양각된 거대한 표지석이 예사롭지 않은 공간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잘 가꿔진 화단을 따라 세워진 전투복 차림의 군인, 오른손에 권총을 쥔 청년, 손목에 수갑을 찬 민간인, 팔짱을 끼고 먼 곳을 응시하는 중년 남자 등 다양한 인물상에서 '광동 코뮌'의 기운이 느껴진다.
군복 차림의 인물상 앞에서 잠시 멈춘다. 1927년 대병력을 이끌고 '광주기의'를 주도한 섭검영(葉劍英·1897~1986)이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국공내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역할을 하였다. 문화혁명 때 각종 박해를 모면했고 마오쩌둥 사후에는 화궈펑(華國鋒)을 도와 천하 대란을 평정시켰으며,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76~83)를 지낸 인물이다.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광장을 지나니 곧바로 기의열사능원이다. 주황색 기와 건물과 네 개의 기둥에서 웅혼한 기운이 감돈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다. 손으로 장총을 쥔 모습을 형상화한 기념탑이 객들을 반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모습이 옛날 한국 농촌에서 집안의 액막이와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어귀에 세웠던 솟대를 떠오르게 한다.
▲ 신라 왕릉보다 크게 보였던 광주기의열사 묘 ⓒ 조종안
큰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니 삼국시대 왕릉보다 더 크게 보이는 거대한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1927년 12월 광저우 무장봉기(광동 코뮌) 때 숨진 5000여 명의 혁명 열사들이 합장된 '광주기의열사 묘'다. 중국 대혁명의 물결을 타고 조국 독립을 이뤄보려다 숨져간 조선 청년 150여 명도 잠들어 있어서 그런지 국립현충원에 온 것처럼 숙연해진다.
"조선 청년들이 남의 나라 봉기에 왜 참여했냐. 그해(1927) 여름 국민당의 청당운동에 반발해 광동 코뮌이 일어납니다. 청당 운동은 장제스가 당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국민당 내부 좌파와 공산당 세력을 척결하는 과정을 말하죠. 그 반발로 광주 코뮌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조선 청년들은 왜 참여했을까요. 혁명에 동참하는 것이 조국 독립에도 도움받을 것으로 믿었던 겁니다. 당연하게..."
김종훈 기자는 "당시는 지금처럼 남북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강대국에 의해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이니, 중국 혁명에 참여하면 조국 광복의 길도 열릴 것으로 믿었을 것"이라며 "1910년 나라를 잃은 예관 신규식이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 쑨원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여한 이유와 같다고 본다. 예관 역시 중국 혁명에 힘을 보태면 조국 독립도 이룰 것으로 믿었다"라고 덧붙인다.
당시 공산당 피해는 알려진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1년 동안(27년 7월~28년 7월 20일까지) 광동(항저우) 지방정부 관내 33개 현(縣)에서 발생한 공산당 피해는 다음과 같다. 살해된 자 3만 6000여 명, 가옥 파괴 및 소신(燒燼) 5만 6000여 채, 가옥 소실, 약탈 등으로 발생한 이재민 30만 8000명, 피해액 8000만 원(추산) 등이었다.
다시 평가받아야 할 귀한 장소 '중조인민혈의정'
일행은 "중국이 우리나라 희생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지 보여드리겠다"는 김종훈 기자를 따라 '중조인민혈의정'으로 이동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저기 보이는 정자 현판에 '중조인민혈의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 그대로 광동 코뮌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조선 청년들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크고 귀한 장소를 마련해뒀어요. 저곳에 가면 조선인들이 희생당했다는 기록(비석)이 있습니다. 그것도 황금색으로요. 그런데 이분들 중에 우리가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죠.(안타까운 표정)
더 안타까운 점은 황포군관학교에서 함께 훈련받고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동지들이 서로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청년 150여 명이 처참하게 죽어 나갔죠. 그 누구도 이름 하나 남겨진 게 없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에 찾아온 겁니다. 다시 평가받아야 할 귀한 장소죠."
광저우 무장봉기는 중국 공산당 소속 섭검영이 이끄는 제4 교도대 병력 2000여 명이 중심에 섰다. 그중 80여 명이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이었다. 공산당은 치열한 전투 끝에 국민당에 승리한다. 공산당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 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이 '광동 코뮌'이다. 그러나 화력을 재정비, 반격에 나선 국민당 군대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삼일천하로 끝난다.
혁명에 가담했던 공산당 세력은 무참히 처형당한다. 그 수가 무려 5000명을 넘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150여 명이나 됐다. 중국은 당시 처형당한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1964년 10월 '중조인민혈의정'이란 정자를 세운다.
▲ 중조인민혈의정 중앙에 세워진 기념비 ⓒ 조종안
정자 중앙의 기념비 앞면에는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의여 오래오래 푸르러라!'라는 뜻의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이 황금색으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조선 청년 150명이 중국 전우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고, 최후에 사허 전투에서 진지를 사수하다 대부분 희생됐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중국 지린성 용정(龍井)이 고향으로 어렸을 때 친구들과 일송정에도 자주 오르고.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 의사 흉내도 내면서 놀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이(가이드) 생활을 10년 넘게 했지만, 기의열사능원 방문은 처음이다. 조선 청년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 혁명에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송구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현지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조선족 출신 가이드도 처음 방문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광주기의열사능원, 홍보와 더불어 수만 리 타국에서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간 조선 청년들에게 이름 석 자라도 찾아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꿈이나 사상, 이념과는 무관하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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