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허망한 붕괴가 한반도 분단 단초 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⑩ 멸망하는 제국과 분단
이덕일 | 제313호 | 20130310 입력 
 
그릇된 과거의 족쇄를 끊지 못한 사회는 미래로 갈 수 없게 된다. 현재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뿌리는 일제 말기 군국주의 세력이다. 미국이 승전 후 천황제를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 세력을 해소하지 못한 결과 그 후손들이 지금껏 고통을 받는 것이다.

1945년 3월 10일 미군이 대공습을 가한 직후 초토화된 도쿄 시내의 전경. 미 항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들(오른쪽 작은 사진).


1945년 1월 8일 일본 궁성 앞 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이 거행되었다. ‘대원수 폐하’로 불리던 일왕 히로히토가 참석한 연례행사였지만 이날의 관병식은 서둘러 끝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B-52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미 제공권(制空權)을 상실했다.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등장시켰던 44년 10월의 레이테 만(灣) 해전에서도 패배해 제해권(制海權)도 빼앗겼다. 미군 잠수함 때문에 수송선(輸送船)도 보낼 수 없었기에 불과 몇 개월 전 기세 좋게 동남아를 점령했던 일본군에선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관병식 다음 날인 45년 1월 9일 미군은 필리핀 북부 루손 섬에 상륙해 필리핀 함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6%에 불과했던 성공률로 2500여 명의 젊은이만 희생시켰을 뿐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일본이 발악하자 미국은 45년 1월 인도와 중국에서 폭격기를 지휘했던 폭격전술의 명장 커티스 머레이 중장을 마리아나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45년 3월 10일 도쿄에 대대적인 야간공습을 실시했는데 과거와 달리 저공 공습이었다. 폭격 후 현장을 시찰하던 히로히토가 시종장 후지타 히사노리(藤田尚徳) 전 해군대장에게 ‘관동대지진보다 훨씬 비참하다. … 도쿄는 초토화되었구나’라고 탄식했을 정도로 제국의 수도는 커다란 피해를 봤다.

히로히토가 이때 항복했다면 5개월 후 원폭 투하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대본영(大本營)에서 주창하는 ‘본토 대결전’에 기대어 천황직 유지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를 찾아간 히로히토. 현인신(現人神)이었던 히로히토가 맥아더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일본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일제, 황당한 ‘본토 대결전’ 계획 집착

자칭 무적황군(無敵皇軍) 대본영의 ‘본토 대결전’ 계획은 군사적 전문성이 결여된 황당한 것이었다. 대본영은 44년 7월께면 이미 본토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서 도쿄로 들어올 수 있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도시 몇 곳에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하고 7월 24일에는 ‘육해군의 이후 작전대강(作戰大綱)’을 하달해 ‘필리핀·쿠릴열도·대만·본토’ 네 방면에서 결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이미 ‘본토’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은 상황이 절망적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때 전세가 뒤집히는 줄 알고 환호했던 사건도 있었다. 44년 10월 대본영은 미군의 오키나와·대만 공격에 맞서던 일본의 기지항공대가 항공모함 10척과 전함 2척을 격침시켰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국민에게 술까지 배급하면서 환호했지만 미숙한 탑승원의 관측 실수에 불과했다. 일본은 45년 1월 20일에는 ‘제국 육해군 작전계획대강’을 작성해 쿠릴열도,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오키나와 이남, 대만 등지를 전연지대(前縁地帯·외곽지역)로 설정했지만 이미 의미 있는 방어 능력을 상실한 지역들이었다.

대본영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시기를 가을께로 예측했다. 그래서 45년 2월 22~25일 『본토결전(本土決戰) 완수 기본요망』을 작성해 3월 말까지 31개 사단, 7월 말까지 43개 사단, 8월 말까지 59개 사단으로 확대하고 국민의용군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투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군인으로 마구 편제 하는데 불과했을 뿐 그들을 무장시킬 총검도 없었다.

미군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한 대본영의 작전 계획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미군의 제1진을 격파한다’는 단순한 것이다. 모든 수단 중에는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인해전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45년 초가 되면 미·영 등의 연합군과 소련군 중 누가 먼저 베를린을 점령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유럽의 파시스트 히틀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일본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독일은 결국 5월 8일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45년 2월 4~8일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은 3거두 회담을 열었는데, 이때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독려했다. 일본이 발악하면서 미군의 희생도 급증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면서 그 대가로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극동 이권의 반환을 요구했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외피를 쓰고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조국을 자처했지만 속내는 슬라브 민족주의의 재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은 한 번도 자국의 이익을 세계 사회주의 전체의 이익을 위해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이권을 되찾으려면 장개석이 중국 영토 일부를 내주어야 했다. 장개석이 거부하자 스탈린은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트루먼이 뒤를 이었다. 더 큰 변수는 7월 중순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었다. 7월 말께 태평양의 일본 해군은 모두 궤멸당했지만 처칠이 “일본제국의 권력은 아직도 패배를 수락하기보다는 집단 할복자살을 택하기로 결정한 군부의 손에 있다”고 말했듯이 일본의 전쟁 기계들은 모두 같이 죽자는 ‘1억 옥쇄’를 전략이라고 내세웠다.

7월 26일 트루먼, 처칠, 장개석, 스탈린이 일본에 최후통첩을 한 장소가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소련은 아직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지만 ‘군국주의를 일소하고,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하며, 한국을 해방시키고, 대만과 만주국은 중국에 반환하며, 남(南)사할린을 소련에 반환하고, 전쟁범죄자를 처벌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확립한다’는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포츠담 선언에 대해 도조에 이어 총리가 된 스즈키는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들은 전쟁 완수를 위해 노력한다”고 오기를 부렸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외무대신은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협상하려 했는데, 일본 공격 시기를 저울질 중이던 스탈린을 중재자로 여겼다는 자체가 일본 외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번스, ‘천황제 유지’ 조건부 항복 거부

미국은 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을 투하했다. 대본영은 원폭이란 말 대신에 ‘신형폭탄’이라면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고만 발표했다. 8월 9일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 다시 원폭을 투하했다. 스탈린은 참전 조건을 놓고 장개석과 실랑이하다가는 아시아에서 아무런 이권도 챙기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해 8월 9일 전격적으로 참전했다.

놀라운 사실은 무적 황군(皇軍)을 자처하던 관동군이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해체되어 버린 것이다. 지휘체계 자체가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것이 자칭 무적 관동군의 실체였다. 히로히토를 비롯한 동양의 파시스트들은 두 차례의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8월 10일 일본은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 아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한마디로 천황제만 유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 번스는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지휘관에게 종속된다. 일본국의 최종 통치 형태는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며 거부했다.

8월 12일 일본 군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로히토는 종전을 결심했다. 자리는 둘째 치고 도쿄에 원폭이 투하될 경우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목표 지역에 도쿄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히로히토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8월 14일의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이때 맥아더가 번스의 답변에 따라 ‘천황제를 해체하고 일왕을 전범으로 처벌’했다면 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현재 동아시아 상황의 원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는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臣民)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은 육군 140만여 명, 해군 41만여 명, 군인 및 군속 155만여 명, 일반 국민 185만여 명을 합쳐 도합 521만여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단 한 평의 영토도 넓히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는 관동군이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한반도가 분단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관동군이 흩어지면서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이 시간문제가 된 것이다. 미국은 전략회의를 열고 한반도 분할 점령선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 참여했던 참모본부의 딘 러스크는 이 회의에서 소련에 ‘38도선을 권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미군이 현실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지역보다 훨씬 북쪽이지만 미군 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딘 러스크는 ‘소련이 38도선을 승낙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나는 그들이 더욱 남쪽 선을 주장하리라고 생각했다(『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고 말했다.

스탈린은 원자폭탄을 가진 미국과 정면대결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챙겨야 할 전리품은 유럽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방과 동시에 남북 분단이 결정되면서 한반도의 해방정국은 실타래처럼 엉키게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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