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0327.22032203724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51> 연해주에는 왜 고인돌이 없을까
옛 연해주는 패총 위주 생활이었기에 공동의 힘 필요한 고인돌 못만들어
이 일대 청동기 사람들은 돌무덤 만들어 고인돌 추정 대부분 여진 이후 석조물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03-26 20:38:02 | 본지 32면
연해주의 고고학자 Yu.E. 보스트레초프 씨와 그가 발견한 '고인돌'.
세계지도에서 보면 작디 작은 우리나라인지라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같이 거대한 피라미드나 황금이 수두룩한 고분은 별로 없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선사시대는 고인돌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고인돌의 수가 분포한다. 특히 전남에서 확인된 것만 2만여 기가 넘는다.
실제로 전남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논이나 구릉지대에 고인돌이 놓여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근래의 경지정리나 건물들을 지으면서 파괴된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수가 분포한 셈이다. 평양 부근에서도 1만6000여 기가 나왔다고 하니 전국적으로는 수만 기가 분포한 셈이다. 실로 고인돌 왕국이라고 불릴 만하다.
고인돌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요동과 길림지역에도 다수 분포하며 황해를 끼고 중국의 해안가를 따라서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함경북도~연해주~연변을 둘러싼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전혀 없다. 선사시대 이래로 동해안을 끼고 우리나라와 다양한 교류를 한 이 지역에서 고인돌이 없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해주 학자들도 그 점이 고민이었던 모양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끔씩 고인돌 비슷한 것이 발견되면 필자에게 고인돌이 맞지 않은가 하며 문의를 심심치 않게 해오기 때문이다. 한번은 극동대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콜로미예츠 씨가 옥저인들의 유적으로 유명한 크로우노프카 유적의 뒷동산에서 고인돌 비슷한 돌들이 많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실제 사진으로 보니 고인돌과 많이 유사해보여서 2003년 2월에 답사를 했다. 영하 20도는 족히 넘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눈을 헤치면서 '고인돌' 유적을 찾아보았다.
야트막한 언덕위에 놓인 돌들을 먼발치에서 보는 순간 고인돌과 너무나 유사해서 순간 필자는 추위도 잊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돌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석판 같은 것으로 고임돌을 세우고 위에 석판을 얹어서 고인돌의 형상을 한 것이 보였다. 그런데 한국 것보다는 너무 작아서 무덤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더 자세히 보니 고인돌 특유의 돌을 쪼아낸 흔적이나 성혈(性穴)은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금속으로 돌을 쪼아낸 흔적이 있는 게 아닌가.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도 있었지만 크기나 형태로 볼 때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게다가 돌 한쪽은 마치 거북이 머리처럼 튀어나오게 만든 것도 보였다. 고인돌이 아니라 중세시대, 아마도 여진시대 이후의 석조물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그때까지 못 느꼈던 추위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크로우노프카 '고인돌' 중 한 개를 골라서 주변을 발굴해보니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고인돌'은 몇 번 더 발견되었다. 어떤 학자는 나홋트카 시 근처의 어느 산 꼭대기 근처에서 자연적으로 바위가 깨진 것을 고인돌이라고 하기도 했고, 사진으로만 봐서는 고인돌처럼 보이는 것도 몇 개 있었지만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북한의 새로운 자료를 보니 그동안 없다고 생각했던 함경북도 성진시(지금의 김책시)에서 고인돌이 발굴되었고, 무문토기와 석기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함경북도 건너편인 연해주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만약 고인돌이 발견된다고 해도 남한만큼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나 만주는 집약적인 농경에 근거한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당시에 연해주는 바닷가에서 패총을 영위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또 농경을 한 내륙의 주민들도 수렵이나 채집의 비중이 높아서 공동으로 고인돌을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농한기와 같은 때에 축조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나일강이 범람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연해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겨울이 지나치게 길어서 돌을 떼어내고 옮기는 작업을 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연해주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고인돌 대신에 돌무덤(석곽묘)를 만들어 사용했다.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해서 육탈시킨 후 뼈만 따로 모아서 한 무덤 안에 여러 사람의 인골을 같이 묻었다. 일종의 가족묘인 셈이다. 한반도와 만주 전역에서도 돌무덤은 자주 발견되니 연해주 역시 동아시아의 돌무덤문화의 일부인 셈이다. 연해주의 자연지리적 환경 때문에 고인돌을 축조할 수 없었을 뿐 청동기시대 연해주도 한반도와 비슷한 문화를 공유했었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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