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027.22020192704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6> 고구려의 무사와 파르티안 사법

무용총 수렵도 활쏘기는 초원 기마인들의 기법과 똑같아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0-26 19:36:21 |  본지 20면


-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한 활시위 기법…로마 물리친 파르티안의 전법과 동일

- 흉노에서 기원해 선비로 이어진 철제무기, 기마술 받아들여 거대한 제국 건설

- 유목민족 장점 취해 거대한 제국 중국에 맞서 초원의 실리와 정착민 문명의 조화 이뤄내


고구려 벽화무덤 무용총에는 무사들이 사냥개를 데리고 숲속을 헤치면서 호랑이, 사슴들을 사냥하는 수렵도가 있다. 고구려의 벽화를 대표하는 이 수렵도에는 당시 북방지역과 교류했던 고구려 기마인들의 숨겨진 모습이 숨어 있다. 이 벽화의 가장 위쪽에서 사슴을 겨눈 무사는 질주하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채 흐트러짐 없이 뒤를 겨누고 있다. 그는 왜 뒤를 돌아서 활을 쏘았을까.


■파르티아, 로마를 무찌르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 '수렵도'. 위쪽에 그려진 전사는 뒤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화살을 쏘는 법은 파르티안 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아와 로마의 유명한 '카라이전투(battle of Carrhae)'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53년 수레나(Surena)가 이끄는 파르티안 제국의 군대와 크라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라이에서 전면전을 펼쳤다. 로마인은 숫적으로 압도인 우세를 점했음에도 1000여 명의 중갑병과 9000여 명의 파르티아 군에게 대패했다.


당시 로마는 방패로 사방을 둘러싸고 천천히 보병을 전진시키며 적의 대오를 깨는 다소 구태의연한 전법이었다. 반면 파르티안은 날렵하게 무장한 궁사들이 마치 야구의 '히트 앤드 런'처럼 공격하고 후퇴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도망치던 파르티아 군사들은 고삐를 놓아둔 채로 갑자기 상반신만 돌려 추격하는 로마군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적이 도망간다고 추격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의 군대가 우왕좌왕할 무렵 1000여 기의 파르티아 중갑병이 돌진하여 로마의 군대는 졸지에 오합지졸이 되어 허망하게 패배했다.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군대의 진법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주로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목민족들로 구성된 기병들로 군대를 보강했다. 로마군대는 파르티아를 얕보았던 반면에 파르티아 군사는 로마군대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법으로 무장했으니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패배가 비겁한 적의 습격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 때문인지 '파르티안 사법(parthian shot)'은 지금도 잘 놀고 헤어지면서 친구에게 뒤통수치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배신당하는 꼴을 대표하는 것이다. 새로운 전술로 자신들이 패한 것을 마치 비겁한 적의 계략 탓으로 돌렸고, 그 때문에 파르티안 사법은 안 좋은 의미로 남게 되었다.


■로마에서 고구려로


서기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2세가 사냥하는 장면을 새긴 은제그릇. 말 등에서 뒤로 돌아 활을 쏘고 있다.


용어는 '파르티안' 사법이지만 파르티아인들이 이 활쏘는 법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기원전 7~3세기의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이러한 사법이 보이며, 이후 흉노에서도 널리 쓰였다. 즉, 파르티아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초원의 말을 타던 사람들이 쓰던 기법을 파르티아가 도입하여 로마에 써 먹은 것이다.


고구려의 파르티안 사법은 파르티아보다는 흉노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고구려의 발달된 철제무기와 마구는 흉노의 영향을 받은 증거가 여러 군데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화상전에도 기원전 1세기경부터 파르티안 사법이 보인다. 역시 흉노의 영향이다. 그런데 중국의 파르티안 사법은 신선이 하늘 위에서 환상적으로 표현된 호랑이나 기린에게 화살을 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그런데 파르티안 기법은 몸을 완전히 뒤로 돌리는 사법이다. 즉, 두 손을 완전히 고삐에서 놓은 채로 뒤로 돌아서 시위를 당겨 표적을 조준해야 한다. 힘들게 뒤로 돌아서 활을 겨눈다고 해도 몸의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이러한 사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면 달리는 말에서 기사들은 어떻게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 이후에는 등자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파르티아나 흉노가 발흥할 때에 아직 금속제 등자는 발명되지 않았다. 즉, 등자가 없이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려면 초인적인 노력으로 양 허벅지에 힘을 주어서 말에 몸을 밀착할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려서부터 기마에 익숙해야 가능하다. 실제로 알타이의 스키타이시대 고분을 발굴해서 그 인골을 검토해보니 대퇴골이 O자형으로 휘어진 흔적이 나왔다. 바로 이러한 꾸준한 노력을 방증한다.


■로마군, 승리 대신 비단을 얻다

스키타이 전사의 파르티아 사법을 그린 그림.


이제 고구려의 벽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날렵하게 차려입은 무사들은 등자에 발을 걸고 있다. 복장으로 볼 때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라기보다 귀족 또는 무사로 일종의 의식 또는 경기 중 하나로 사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파르티안 사법'은 적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는 무사는 사슴을 향해서 시위를 겨눈다. 초식동물인 사슴이 사냥하는 무사를 뒤에서 공격할 리는 만무하다. 정상적인 사냥에서 힘들게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곧 당시 고구려의 무사들이 사냥을 통해서 파르티안 사법을 훈련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이미 등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장기간 허벅지에 힘을 길러서 마상술을 조련하지 않은 사람들도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사들은 파르티안 사법을 연마했고, 그 본보기로 사냥에서 선보인 게 아닐까? 좀더 상상을 한다면 무덤벽화의 주인공이 젊은 시절 무술 경연대회를 하던 장면일지도 모른다.


평양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의 파르티안 사법의 기마인이 새겨진 청동관.


카라이 전투에서 로마는 파르티안 사법으로 패배한 대신에 의외의 선물을 얻었다. 바로 비단이다. 당시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티아의 궁병들을 쫓던 로마의 군사들은 매복해 있던 파르티안의 중기병과 조우했다. 파르티안의 중기병들은 중갑 위에 붉은 비단을 걸치고 있어서 비단을 처음 보는 로마인들에게는 마치 불의 전사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전쟁을 통해서 로마에는 비단이 알려졌고, 귀족층 사이에는 비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아는 중국 기록에 안식국으로 기록되었다. 실크로드의 카라반(대상)들이 목숨을 건 여정을 통해 로마에 비단을 전했고 동서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로마는 카라이 전투를 거울삼아 새로운 초원민족의 기마전술로 군대를 양성화하는 대신에 적의 비단에 혹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여인들은 동아시아의 첨단 명품인 비단에 마음이 녹아서 엄청난 돈을 지불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로마가 멸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 상무정신으로 무장하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300'은 현대의 마초이즘을 고전세계라는 무대로 풀어낸 것이다. 스파르타의 300명이 잔인하고 무식한(?) 아시아의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는 내용이다.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부대는 각종 괴물에 동물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하는, 규모만 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개인으로 묘사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로마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초원민족의 기마술을 비롯해 아시아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착용'이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랑캐의 바지를 입고 기마술을 채용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기술 도입으로 조 무령왕은 북방의 이민족과 맞서며 중원을 제패할 수 있었다.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다. 흉노에서 기원하여 선비로 이어진 발달된 철제무기와 기마술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실리를 취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명분을 몰라서가 아니라 넓은 시야에서 냉철하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파르티아와 고구려는 각각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위치한 제국들이었다. 이 두 나라는 초원지역과 이웃한 나라를 건설해서 유목민족의 장점을 취해서 당시 거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와 중국에 대응했다. 바로 초원의 실리와 정착민의 문명을 한데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바로 고구려 귀족들이 꾸준히 말 타는 기술을 익히는 장면인 것이다. 한가롭게 사냥을 하는 듯한 벽화에서 상무정신으로 무장하여 주변과 대적한 고구려 천년의 지혜를 배운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