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222.22022200554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4> 고구려의 등자, 세계사를 바꾸다

초원을 달려 유럽 중세 병사문화를 자극한 고구려 철갑기병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2-21 20:20:07 |  본지 22면


- 3세기 후반 고구려…모용선비 침략받고 무기 개량시켜

- 말타는 사람 발걸이 철제 '등자' 등장

- 고구려와 밀접했던 유연제국의 유민들 철제무기로 무장, 유럽 떨게 해

- 서양 철갑기병 문화…고구려 영향 받은 시베리아 초원 기원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총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개마무사. 개마무사란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 기병을 가리킨다.


1945년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의 호우총에서는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과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와 서양의 중세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자들의 주의를 끈 유물은 볼품없는(?) 등자 1벌이었다. 광개토왕의 이름이 나왔으니 호우총은 5세기 초엽 고분이고, 고구려벽화에서는 적어도 4세기 대에 이미 중갑병과 등자가 보이기 시작하니 등자가 나온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서양에서 철로 만든 등자와 중갑병은 7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니 조그만 변방의 나라에서 발견된 등자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연 등자는 한국에서 기원한 것인가? 조그만 등자 하나에는 세계사의 획기적인 변화가 숨겨져 있다.


등자란 말을 타는 사람의 발을 거는 일종의 발걸이다. 초원의 기마민들은 어릴 때부터 말타는 훈련을 받아서 등자 없이도 말을 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이 말을 탈 때는 낙마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씩 발걸이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서기 1~2세기께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긴 창으로 적의 대오를 깨뜨리는 중갑병이 출현하게 되었다.


엔간한 화살로 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은 기마부대는 아마 지금의 탱크 같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무거운 철갑을 쓰고 장검이나 창을 휘두른다면 말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중갑병이 낙마라도 한다면 묵직한 갑옷으로 제대로 싸우기도 어려울 테니 그냥 적에게 목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몸 중심을 단단히 지지하는 등자는 중갑병의 위력을 보증해주는 필수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등자의 기원, 고구려인가 중국인가


아바르족의 허리띠 장식.


1950년대에 중국 호남성의 금분령이라는 무덤에서는 악사를 태운 말에 발걸이가 그려진 토용(토제인형)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서기 302년께의 것으로 확실한 연대가 알려진 최초의 등자가 된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근거로 등자의 기원을 중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발걸이와 등자는 다르다. 발걸이는 페르시아, 스키타이,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더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다수 보인다. 세계사를 움직인 발명품은 중갑병이 썼던 철제 등자이기 때문에 발걸이만을 가지고 중원기원설을 주장할 수는 없다.


최근에 요령성의 모용선비에서 다량의 철갑과 등자가 출토돼 새롭게 등자의 기원지로 주목받고 있다. 모용선비는 서기 3~5세기 북중국을 장악한 세력으로 흉노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더 발전시켜 새로운 동아시아 강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철제등자를 개량하고 발달시킨 배경에는 바로 모용선비와의 전쟁이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북쪽에 살던 모용선비가 고구려 근처로 내려와 고구려는 곤경에 처했다. 서기 293년과 296년에 모용선비의 우두머리 모용외는 고구려 서쪽 변경을 침략하고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수세로 몰아갔다. 그러자 봉상왕은 당시 고구려 서쪽 경계인 신성(지금의 요령성 무순시)의 성주로 고노자(高奴子)라는 장수를 파견했다.


고노자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후 모용선비는 더 이상 고구려를 괴롭히지 못했으며 반대로 고구려가 4세기 초반에 주변의 낙랑군, 대방군 등을 멸망시키는 강력한 군사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역에 최초의 금속등자와 개마가 발굴되는 시기가 대체로 3세기 후반께니 이때와 부합한다. 아마도 모용선비의 침략에 놀란 고구려가 등자와 중갑병 중심의 무기로 재편했고, 이 과정에서 금속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게다가 반농반목민이었던 고구려인에게 등자는 초원의 기마민들과 대적하는 데 필요한 도구였으며, 산악지대가 많은 고구려 지형에도 적합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발달시킨 등자는 이후 한반도의 신라와 가야로도 파급되었고, 시베리아 초원으로도 빠르게 파급되어 갔다.


■무시무시한 아바르족은 누구인가


알타이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등자.


1968년 남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 울룩-호룸 유적에서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출토됐다. 중세시대의 고분에서 기존에 발굴된 투르크시대 등자와는 다른 등자가 발굴된 것이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고구려벽화와 무덤에서 발견된 등자와 같은 계통임이 밝혀졌다. 고구려 등자가 시베리아 초원으로 유입된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이후 이 등자는 '고구려식 등자'로 명명되었고, 현재까지 시베리아 초원지역에서 20점 정도가 발견됐다.


시베리아에 고구려식 등자를 수입한 사람들은 유연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유연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고구려의 발달된 철기 기술이 유연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 등자가 등장하는 5세기 중반 이미 모용선비는 세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또한 유연의 뒤를 이은 투르크는 서기 551년 처음 고구려와 전쟁을 한 이래 지속적인 갈등관계였다. 돌궐은 유연제국 시대에 철기를 만드는 일을 했으니, 그러는 와중에 고구려계통의 등자도 같이 수입했을 것이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고구려식 등자는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행진이나 제사 때에만 쓰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라는 선진국가에서 수입한 등자라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바르족 전사의 개념도.


유럽의 중세시대 무사라면 은빛 갑옷을 입고 긴 창으로 결투를 벌이는 기사가 떠오른다. 중세를 누빈 철갑기사는 8세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갑옷을 쓴 기사의 필수품은 바로 등자였다. 서양에 등자와 개마를 처음 도입한 사람들은 아바르족이다. 그렇다면 아바르족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바르족은 유럽의 동쪽 끝 초원에서 왔다고 하니, 시베리아초원에 그 실마리가 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다스리던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린 5세기께 알타이에는 늑대를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초원을 다스리던 유연제국에 복속되어 철기 무기를 만들었다. 이 민족의 이름은 한문으로 돌궐(突厥)이라 쓰는 투르크다. 지금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우방국인 터키의 조상이지만, 당시에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관계였다. 투르크는 유연에 반기를 들고 독립했으며, 552년 결국 유연을 무너뜨렸다. 투르크에 망한 유연의 잔존 일파는 초원 서쪽으로 도망가며 동아시아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6세기께 현재의 불가리아와 도나우 평원지대에 강력한 철제무기와 마구를 갖춘 무시무시한 집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서로마제국의 변경을 괴롭히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로 아바르라고 불렸던 투르크 계통 민족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아바르족이 투르크에 패주한 유연의 일파라고 본다.


■고구려 문화도 초원으로 전파됐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서도 이 점은 뒷받침된다.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아바르족의 초기 무덤자료를 보면 상당수 전사가 몽골로이드였는데, 점차로 백인화한다고 한다. 또 아바르족의 허리띠, 등자, 안장, 무덤 등은 알타이의 중세문화와 아주 유사하다. 실제로 볼가강 유역의 졸로타료프카 유적에서는 고구려식 등자와 함께 시베리아 계통의 장검, 창, 허리띠 등이 대량 출토된 바 있다. 즉, 서양에 등자와 발달된 개마문화는 고구려 개마문화에 영향을 받은 시베리아 초원에서 온 것이다. 결국 고구려 개마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지대라는 장대한 고속도로를 타고 서양으로 전파됐고 서양 중세시대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초원을 따라 유입된 동아시아 문화가 서양사를 바꾼 예는 흉노와 훈족, 칭기즈칸의 몽골, 마자르 족 등이 유명하지만 이제 그 관심을 유연과 아바르로 확대시킨다면 고구려와 유연의 역사가 세계사의 한 축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북방초원지대에서 한반도로 일방적으로 문화가 수입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등자에서 보듯이 일방적으로 초원지역에서 수입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초원은 거대한 고속도로였고 한 나라에서 발명된 선진기술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최근 동구권에서 한국 전자제품과 자동차의 인기는 엄청나다. 필자가 유학할 때만 하더라도 한국의 전자제품은 중저가였는데, 요즘은 상류층의 상징이다. 러시아에서 작고 예쁜 한국의 전자제품들을 보노라면 1500년 전 고구려에서 출발해서 세계사를 뒤흔든 작은 등자가 떠오르곤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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