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artid=201510011659591


역사학자가 말하는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

2015년 10월호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성 위인 신사임당.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화폐의 모델이 됐다. 11년 만에 연기자로 복귀한 이영애가 선택한 인물도 신사임당으로 결정되면서 새삼 역사 속 인물 신사임당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그녀만큼 뒷말이 많은 위인이 있을까? 신사임당이 5만원권의 인물로 지정됐을 때는 ‘현모양처’라는 이유만으로 여성 위인을 대표할 수 없다며 여성계가 반발했고, 또 실제로 친정살이를 20년 동안이나 해왔던 행적을 들먹이며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역사학자가 말하는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


내년에 공개될 SBS-TV ‘사임당, the Herstory’라는 드라마는 스타 이영애를 등에 업고 촬영 전부터 중국, 일본을 비롯해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6개국에 역대 최고가 선판매를 확정 지었다. 역사 속 인물인 신사임당을 어떤 모습으로 그릴지 사뭇 기대가 된다. 이런 뜨거운 관심 속에 우리는 신사임당을 한 번 더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대의 위대한 화가이자 대학자 율곡을 키워낸 어머니로 칭송받는 위인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비판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여성 역사학자 임해리씨는 여기저기 언급된 신사임당의 자료들을 흩어진 구슬을 찾아 모아서 꿰듯 연구해 최근 「사임당」이라는 역사 평전을 냈다. 그녀를 만나 사임당 신씨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본다.


다시 일어난 사임당 비판

결혼 후 20여 년간 친정살이한 사임당, 진정한 현모양처라 할 수 있나


신사임당은 결혼한 뒤에도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고 많은 세월을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 나중에는 평창에 집을 지어 시댁과 본가를 번갈아가며 생활했다. 한 역사학자는 혼인 후 3년 만에 비로소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나고 시집살이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인물이 현모양처의 대표적인 여성으로 불릴 수 있는가에 의구심을 제기한다. 오히려 악처에 가깝다고 혹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 시대적 상황을 잘못 이해한 오류일 수 있다. 사임당은 1504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부인 사이에서 난 다섯 딸 중 둘째였다. 19세에 혼인하기 전까지 사임당은 유복한 집안에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경서를 읽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둘째 딸의 총명함과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는 딸을 곁에 계속 두고 싶었을 것이다. 딸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문보다 낮은 집안의 자제 이원수를 딸의 혼처로 맞았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 임해리씨의 추측이다. 실제로 신명화는 사위인 이원수에게 “내가 여럿의 딸을 두었지만, 네 처만은 내 곁에서 떠나게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씨는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처가살이는 드문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조선시대 전기에 속한다. 보통 조선시대 하면 남존여비 사상을 떠올리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여성이 재산권과 상속권을 잃고 남녀가 불평등해진 것은 17세기 중엽부터였다.


역사학자가 말하는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


“처가살이는 고구려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서옥제라고 불렸어요. 양쪽 집안이 혼인에 합의하면 신부의 집 뒤뜰에 ‘서옥’이라는 별채를 지어 신혼집으로 사용했고, 아이가 장성하면 비로소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제도지요. 이 풍습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초기까지 남아 있었던 거죠. 사임당의 경우도 외조부 이사온이 강릉 오죽헌에서 처가살이를 했고, 아버지 신명화도 그곳에서 사위로 처가살이를 했으며 훗날 넷째 사위에게 오죽헌을 물려줬어요. 따라서 사임당이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한 것은 당시 아주 일반적인 풍습이었던 거죠.”


조선 초기 여성에게는 상속권과 재산권이 있어 딸이 혼인을 해도 다른 자식과 마찬가지로 균분 상속했다. 또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이 아닌 부인이 호주를 승계했을 정도로 여성 인권이 높은 시대였다.


“게다가 사임당이 시댁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에요. 38세에 한양 시집으로 들어와 노쇠한 시어머니 홍씨를 성심을 다해 봉양했다고 해요. 율곡의 기록에서 보면 시어머니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을 꿇고 물음에 답했으며, 말씀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색은 늘 온화했다고 남아 있죠.”


요즘 강남 맘 못지않은 교육 극성 엄마였다


신사임당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혼인해 자식을 4남 3녀 7남매를 낳아 키웠다. 셋째 율곡뿐 아니라 맏딸 매창은 시와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작은 사임당’이라 불리고 있다. 넷째 아들 이우도 진사에 급제해 군수까지 지냈다. 확고한 교육철학에 따라 자녀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사임당을 극성 엄마로 치부하는 건 심한 매도가 아닐까?


“사임당의 교육법은 독특했어요. 그녀의 교육법을 다룬 논문 주제가 100편이 넘을 정도예요.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라든가 자녀와의 대화법 등 현대 교육학에서도 주제로 다룰 만큼 유효한 것들이죠. 사임당의 교육관은 공자의 ‘인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강조하며 그러한 마음 씀씀이가 다른 사람에게도 미쳐서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본주의’를 아이들의 교육철학 이념으로 삼았어요. 요즘 엄마들이 자녀의 입신이나 출세를 위해 공부를 강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사임당의 교육론은 율곡을 통해 고스란히 전수됐고, 그런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 같은 교육서는 조선시대 학동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혔다고 한다.


역사학자가 말하는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


신사임당, 역사 속에서 이용당하다

율곡의 제자, 노론들에 의한 ‘성현의 어머니’로


사임당은 당대에도 유명한 여성 화가였다. 유명 문인이나 학자들의 글에서 종종 그녀의 그림을 칭송하는 글귀가 전해진다. ‘오성과 한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항복도 사임당을 ‘대나무 그림의 대가’로 평했고, 그림에 조예가 깊던 조선 19대 왕 숙종 또한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집에 걸린 사임당의 ‘초충도첩’을 보고 이를 똑같이 모사해 감상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사임당이 화가가 아닌 ‘율곡의 어머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후대인들에 의한 이미지 작업이 시작된 것. 먼저 우암 송시열은 정신적인 스승인 율곡을 드높여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자신이 성리학의 정통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사임당 역시 중국의 후부인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높임으로써 권위를 강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임당의 초충도는 그림 자체의 예술적 가치보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가 그린 작품이라는 의미가 더 부각되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대의 여성 화가는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 거예요.”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현모양처 이미지 그리고 군국의 어머니


일제강점기가 돼서도 또 한 번 사임당의 이미지기 왜곡됐다. 폐쇄된 사회라면 공통적으로 의식화 교육이 필요했고 관련 공연은 하나의 도구였다.


“식민지 교육을 시키는 데 일본의 현모양처 개념을 들여온 거죠. 우리나라에는 ‘열녀효부’는 있어도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일제강점기 양규의숙이란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설립취지문에 그 단어가 처음 등장해요. 일제강점기의 현모양처라는 개념은 여성 개인은 중요하지 않고, 여성의 역할을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그 역할을 통해 국가에 공헌할 것을 기대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였죠.”


1945년 국민 연극 공연 대회가 열렸는데 친일 극작가 송영의 연극 ‘신사임당’이 동양극장에서 공연됐다.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국민 연극 공연 대회의 참가 요건은 ‘일본 정신을 투영’한 각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병사로 보낼 아들을 길러내는 충성심을 가진 강직한 어머니상을 제시한다고 신사임당을 이용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이렇게 일제에 의해 사임당은 ‘군국의 어머니’로 또 하나의 철가면이 씌워진 거죠. 사임당은 정의와 불의에 맞서는 위인이었는데, 저승에서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역사학자가 말하는 신사임당의 진짜 얼굴


1970년대 이후 이용된 사임당의 모성 이념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전개시켜나갔다. 그중 하나가 사임당과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


“독재 정권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성역화 사업이죠. 특히 역사 속 위대한 인물과 사적지를 성역화함으로써 체제 유지를 위한 명분을 갖는 겁니다. 처음으로 사임당에 대한 책을 펴낸 이은상씨에 의하면 박정희는 1960년부터 율곡에 관심을 갖고 1965년 강릉 오죽한 경내에 율곡기념관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76년 대통령령으로 주문진에 개원한 사임당교육원에서는 전국 여고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사임당교육원의 교육목표와 내용은 국가주의 이념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임당의 얼과 덕성을 이어받아 한국의 여성상을 정립하고 애국애족 의식이 투철한 민족중흥의 역군을 기른다.’ 이것이 당시 사임당교육원의 설치조례 1조 내용이었어요. 또 사임당 교육의 중요 내용은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첫째로 꼽고 있죠. 사임당을 오직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강조한 거예요. 한편으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양처나 국모로 사임당과 동일시하는 이미지 메이킹을 언론을 통해 전개시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죠.”


임씨는 신사임당이 역사적으로 보면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왜곡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임당의 생애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녀는 가족주의 틀에 갇힌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을 깨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갔던 인물이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만 규정짓는 것도, 율곡의 어머니로만 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시각이다. 또 임씨는 유교적 맥락이나 가족주의 틀에 갇힌 여성이라는 견해는 전적으로 사임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오류이므로 2009년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됐을 당시 일었던 여성계의 반발 역시 오류를 바탕으로 한 잘못된 주장이라고 보고 있다. 사임당을 연구해온 이은선 역사학자도 “신사임당은 가정에서 어머니로서, 딸로서, 종부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다중적 역할을 뛰어나게 통합한 모습이었다”라고 주장하며 현대 여성들이 오히려 다시 배워야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이제 신사임당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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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임해리는…

동국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문화콘텐츠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에는 영화진흥위원회 후반기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육갑 짚는 여자」로 입선했다. 저서로는 「누가 나를 조선여인이라 부르는가」, 「우리 역사 속 못 말리는 여자들」(조선 편과 근대 편),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사」 그리고 최근작 「사임당」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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