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208.22020194751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2> 고구려의 꼬치구이, 중국 입맛을 사로잡다

"고구려 꼬치구이에 귀족까지 미쳐 있으니 중국이 곧 망할 지경이다"

      - 서기 3세기 중국 역사책 '진서' 기록 중

날고기 장작불에 간편하게 요리…초원민족의 패스트푸드였던 셈

오늘날 중국·러시아서도 인기

고구려 고분벽화·부뚜막 유물 등 불고기 유행의 역사 고스란히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2-07 19:55:59 |  본지 20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불고기가 꼽힌다. 달구어진 석쇠에 즉석에서 구워 먹는 불고기는 우리 현대문학에 자주 등장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에 병이 걸려 누운 아내를 두고 돈 벌러간 인력거꾼이 일을 마치고 선술집에 들렀을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석쇠에서 빠지짓 빠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 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안주에 김첨지는 견딜 수 없었다'. 누워있는 아내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선술집에 주저앉고 마는 김첨지의 마음은 고깃집의 유혹에 퇴근길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요즘 샐러리맨 마음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차의 종착역인 마포에서 내려 영등포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며 한 점 불고기에 대포 한잔 들이켜는 것이 서민들 낙이었다. 바비큐처럼 숯불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풍습은 자고로 초원민족의 전매특허인데, 어찌해서 불고기가 농경민족인 우리의 대표 음식이 되었을까? 불고기에 얽힌 우리 속의 초원문화를 살펴보자.


■초원의 패스트푸드


고구려 시대 무덤인 안악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부엌과 고기를 걸어놓은 창고.


고기를 직접 불에 구워 먹는 불고기는 중앙아시아와 초원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풍습이다. 별도의 솥이나 그릇이 필요 없이 그냥 그날 잡은 고기를 장작불 위에 걸어놓고 배고프면 칼로 쓱 베어서 곧장 구워먹는 식이다. 아마도 가장 간단하며 널리 퍼져있는 요리법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꼬치구이인 샤슬릭은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풍갈 때 김밥을 싸가듯 놀러 갈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다.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식초에 절였다가 쇠꼬챙이에 줄줄이 끼워 양파를 곁들여 먹는다. 샤슬릭은 이동 중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고속도로 휴게소나 기차역 근처에는 언제나 샤슬릭 노점상이 즐비하다.


또 중국에서도 뀀구이(串)점은 인기 중 인기다. 어느 도시를 가도 시장통에는 매캐한 연기를 풍기며 사람을 유혹하는 꼬치구이점들이 성업이다. 중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가 가미된 것이 조금 거슬리지만, 그래도 두툼한 고기 한 축에 한국돈 200~300원 꼴로 매우 싸다. 중국에 조사를 다니면, 아무래도 전공이 고고학이니 대도시보다는 허름한 시골로만 다니게 된다. 그래도 저녁에 허름한 시장통에서 맥주 한 잔과 꼬치구이 한입 하는 맛은 참 각별하다. 거기에다 값까지 놀라울 정도로 싸니 자리를 파할 때에는 서로 자기가 내겠다는 '흐뭇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러시아건 중국이건 초원민족의 음식인 꼬치구이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아마도 빠르게 먹을 수 있다는 간편함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꼬치구이가 현대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불고기가 중국을 위태롭게?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서 나온 고구려 시대 철제 부뚜막. 혹시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니면서 고기를 굽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불고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서기 3세기 께의 중국 역사책인 '진서'다. 이 책에는 진무제(晉武帝·265~274) 때 고구려의 밥상(맥반)과 꼬치구이(맥적)를 귀족들까지도 좋아하니 곧 중국이 망할 것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맥적에서 '맥(貊)'은 고구려를 뜻하고 '적(炙)'은 불(火)위의 고기(夕=肉)를 의미하니, 맥적은 곧 꼬치구이다. 실제로 서진(西晉)은 그 경고대로 316년에 남흉노에게 망하니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아니라 경국지육(傾國之肉)이 된 셈이다.


맥적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고구려인들은 만주지방이 원산지인 콩을 이용해서 된장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다. 반농반목을 했던 고구려이니 장류와 여러 가지 채소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맥적은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독특한 장류를 섞어서 잰 고기였을 것으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맥적의 실물자료는 거의 없지만,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의 부엌그림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부뚜막에 솥이 걸려있는 주방과 그 옆의 창고에 갈고리에 꿴 고기를 주렁주렁 걸어놓은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시베리아에 발굴 가서 그 용도를 짐작하게 되었다. 발굴 중에 가끔씩 근처 농민이 기르던 염소나 사슴을 잡아오면 보드카 2~3병을 주고 바꾸었다. 이 고기를 장작불 위에 걸어놓으면 자연스럽게 훈제가 되고, 출출할 때면 한 점씩 떼어서 소금 약간 뿌려서 구워먹곤 했다. 특히 1997년에 에벤키족 조사를 나갔을 때에 먹었던 순록의 뒷다리 꼬치구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안악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의 외양간.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서 조사된 고구려 고분 중에 궁녀(宮女)의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에서 특이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로 길이 67.2㎝인 철제 부뚜막이다. 흙으로 구운 보통의 부뚜막보다 작지만 철로 단단하게 만들어 실제로 쓰는 데 부족함이 없다. 굳이 부엌의 부뚜막을 무덤에 가져갈 리는 없으니 특수한 용도였을 것이다. 혹시 맥적 같은 꼬치구이를 야외에서 구웠던 일종의 이동식 불판은 아니었을까. 굴뚝은 옆으로 빠지게 되어있으니, 고기라도 굽는다면 연기를 옆으로 빼기 용이했을 것이다. 더 상상력을 보탠다면, 무덤 주인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여행갈 때 야외에서 고기를 굽는 것을 전담하던 궁녀는 아니었을까?


맥적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불고기)로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때에 지나친 불교정책으로 고기요리의 명맥이 끊길 뻔한 적도 있었다.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고기를 제대로 도축할 줄을 몰라서 요리한 고기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냄새가 났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왕실과 귀족의 얘기였을 것이며, 민중들은 꾸준히 불고기의 전통을 계승했을 것이다. 몽골군인들이 100여 년간 주둔하면서 소를 잡아먹자 황해도 지역 주민들도 그 습관을 따라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몽골의 침입도 불고기문화에 일정한 활력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로 전파된 '초원+농경'의 맛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대표적인 꼬치구이 요리인 샤슬릭.


중국에서 유행했던 불고기는 중국 북방의 흉노 돌궐 선비 같은 초원민족이 즐긴 '원조' 꼬치구이가 아니라 고구려의 맥적이었다. 아마도 반농반목이었던 고구려 특유의 음식기술로 초원지역의 고기를 농경민족의 입맛에 맞게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기만 구워먹는다면 아무래도 느끼하고 금방 질릴 것이다. 하지만 맥적은 요즘 산적처럼 마늘이나 다양한 야채를 곁들이고 여러 양념을 해서 누구나 먹기 좋은 음식으로 바꾸었다. 맥적은 후에 너비아니처럼 넓적하게 고기를 잘라서 다양한 양념을 재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다양한 양념이 잘 배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 같다. 다른 유목민족을 제치고 고구려의 맥적이 중국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는 특유의 양념과 다양한 구이 기술에 있었으니, 이게 바로 고대의 한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의 불고기는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어 '야키니쿠'가 되었다. 야키니쿠는 불고기를 뜻하는 일본어로 일제시대와 일본 패전 직후 힘들게 살던 재일교포가 개발한 요리다. 심지어 일본사람은 먹지 않는 곱창이며 내장을 구웠으니 연기가 독하고 냄새가 심해 천한 음식이라고 깔보았다. 하지만 일본 야키니쿠도 서진 때의 맥적처럼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의 입맛을 사로잡은 불고기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불고기가 세계적으로 호평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초원과 농경민족의 요리법을 한데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즉, 고기를 좋아하는 서양사람이건, 채식을 주로 하는 동양이든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단백질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회는 고기를 잡고 요리하는 것을 천대했다.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천민들로 전락했다. 그러한 천대 속에서도 우리 음식문화 속에서 불고기는 끊어지지 않았고, 국제화된 한국의 음식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불고기의 열풍 뒤에는 2000여 년 전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초원과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재창조한 고구려의 힘이 숨어있다.


바닷가인 부산의 근처에도 언양, 봉계, 철마 등 고기가 유명한 곳이 많다. 비교적 산이 잘 발달한 경남의 지형 덕에 질 좋은 고기가 많이 난다. 필자도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광안리의 불고기골목으로 데려간다. 바닷가에서 즐기는 고기는 남다르다. 오장육부를 자극하는 냄새와 함께 타오르는 불고기 한 점에서 초원과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생각해본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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