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427.22022201304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2> 초원의 늑대인간

야만으로 변색된 늑대신앙, 초원과 사막을 지배한 강자의 상징

흉노에서 신화 시작, 4~7C 알타이 중심 유라시아로 퍼져

동아시아와 로마 늑대신화 구조 유사

서양의 근대문화 초원문화 야만 규정, 원래의 의미 왜곡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4-26 20:19:12 |  본지 22면


대체로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지역과 시베리아의 삼림지역, 즉 초원보다도 더 추운 북쪽에는 곰숭배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도 바로 시베리아의 곰신화문화권의 일부다. 한편, 시베리아 초원의 유목민족들 역시 동물을 숭배하는 문화가 매우 강했다. 초원을 대표하는 유목문화인 스키타이문화의 3요소 중 하나를 동물장식으로 꼽을 정도로 동물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초원의 전사들이 선호한 동물은 독수리 표범 늑대 같은 맹수와 맹금이 주류를 이룬다. 알타이의 황금문화인 파지릭문화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라는 별명답게 맹금류를 자신의 상징으로 했다. 이후 흉노를 거쳐 돌궐에 이르면서 그 상징은 늑대와 늑대의 신화로 바뀌어갔다.


■늑대, 돌궐과 로마의 은인이 되다


초원문화권인 중국 북부 영하성에서 출토된 청동상. 양을 잡아먹는 늑대를 표현했다.


흉노에서 시작된 늑대신화는 서기 4~7세기에 알타이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진다. 우리 '혈맹'인 터키의 조상 돌궐(투르크)족의 건국신화에도 늑대가 등장한다. '주서(周書)'의 '돌궐전'에 따르면 그들 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간신히 한 어린아이가 살아남았는데, 그는 늑대들 속에서 자라고 암늑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를 기념하여 뒤에 돌궐족은 자신들의 깃발에 늑대를 그려넣었다 한다.


한편, 또 다른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국가인 고거(高車)국도 자신을 늑대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들 돌궐계 부족은 모두 흉노제국의 일파였으니, 늑대를 숭앙하고 자신의 선조로 보는 풍습은 흉노에서 기원해 이후의 여러 초원민족들로 퍼져나간 셈이다. 늑대와 관련된 탄생신화는 멀리 로마에서도 보여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숲에 버려진 뒤 암늑대가 젖을 먹여서 키웠다고 한다.


고도의 문명국가였던 로마의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될 정도로 늑대신화는 널리 유행했던 것 같다. 전남대 최혜영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동아시아와 로마의 늑대신화는 구조적으로 아주 유사하다고 한다. 고고학과 달리 신화학은 구체적인 물증으로 증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고대 동서문화 교류의 실마리가 되는 또 다른 주제임은 분명하다.


로마 건국의 주역인 로물루스 형제가 어릴 적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조각상.


한국이나 시베리아 삼림지대의 경우 곰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실제로 청동기나 암각화 등에 구체적으로 곰이 표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초원지역에서는 수많은 동물장식이 등장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동북쪽에 거주하는 네우리(Neuri)라는 부족은 9년에 한 번씩 늑대로 바뀌었다. 아마 자신을 늑대로 의인화시키는 의식을 표현한 것 같다.


굳이 헤로도투스가 아니어도 동물장식은 바로 초원을 대표하는 청동유물이었다. 기원전 8~3세기에 초원지역에 번성한 스키타이문화에서 발달하게 된 동물장식은 이후 흉노로 계승되었다.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칼과 같은 무기와 허리띠의 장식으로 주로 동물장식을 썼다. 실제로 초원의 기마인들은 아래로 늘어지는 상의를 입고 그 겉에 허리띠를 둘렀다. 그러니 전사의 허리 가운데서 반짝거리는 허리띠와 그 옆에서 반짝거리는 동검이야 말로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동검을 맹수나 맹금류로 장식했으니, 동물장식은 '장식'을 넘어서 일종의 계급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기호보다는 부족의 상징과 신분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었다. 기원전 3세기 대에 흉노가 중국의 조공을 받으면서 중국의 장인들이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을 납품한 증거도 있어서 동물장식은 바로 흉노인들의 신분증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속의 늑대, 중세유럽의 늑대


구약성서에서 신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늑대인간이 된 것을 그린 그림. 늑대와 초원문명에 대한 서양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초원의 전사들이 자신을 늑대와 동일시하는 이유는 험난한 사막과 초원지역에서 강하게 살아남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후 초원문화를 백안시하는 서양문명의 등장과 동시에 야만의 상징으로 바뀌어갔다.


1970년대 크게 유행한 디스코 음악인 보니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는 30대 이상의 독자라면 친숙할 것이다. (요즘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포수 강민호의 응원가로도 사랑받는다) 이 노래의 가사는 성경 시편 137편에 근거한 것으로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이 신바빌론왕국의 느부갓네살(영어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귀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바빌론유수'의 한 장면이다.


신바빌론왕국의 느부갓네살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만들었으며,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느부갓네살의 이탈리아어 준말임)'의 주인공이다. 사담 후세인이 미군에 쫓기면서도 자신을 느부갓네살에 비유하는 글을 남길 정도로 근동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힌다. 반면 느부갓네살은 서양 문명에서 야만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늑대인간'이 된 최초의 예라고도 알려져 있다. 구약의 다니엘서에는 이 왕이 교만에 빠져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7년 동안 반짐승처럼 미쳐 궁 주변을 날뛰었다고 한다. 이를 들어서 고병리학자들은 낭광증(狼狂症 Lycanthropy: 자기를 늑대 또는 이리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병)의 첫 케이스라 한다. 서양문명에서 마녀와 함께 금기시됐던 늑대인간은 흔히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해 사람들을 해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저주에 의해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다소 다르다. 낭광증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한 정신병이다. 성경의 사해사본에는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다른 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그가 7년 동안 미친 채 궁정을 돌아다녔다면 실제로 바빌론왕국이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짐승처럼 살았다고 전해지는 왕들의 기록이 제법 있으니, 아마 그러한 기록들이 와전된 것 같다. 이 왕들은 정신병이 아니라 벌판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괴력을 과시하며 다닌 것을 이민족들이 늑대처럼 살았다고 기록한 결과인 것 같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다


낭광증과 늑대인간에 대한 공포는 서양의 근대문화가 초원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면서 등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늑대인간은 영어로 '웨어울프'(werewolf), 러시아어로는 '오보로찐'이라고도 한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유행한 '구미호'와 유사한 듯 하지만 한국의 구미호는 죽은 처녀의 상징으로 다소 낭만적(?)인 반면 늑대인간은 그 피해를 입은 사람도 같이 늑대인간이 되어버리기에 더 공포스럽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피가 섞이거나 밤만 되면 짐승으로 변하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나 드라큘라 같은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자신을 동물로 착각하거나 동물처럼 행동하는 낭광증은 정신분열이나 우울증의 일종으로 요즘에는 늑대뿐 아니라 개 말 호랑이 고양이 등 다양한 동물로 표현된다고 한다. 실제로 늑대인간의 설화가 널리 퍼지는 시기는 17~18세기로 당시 유럽은 소빙기시대(little ice age)로 아주 추운 겨울이 지속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미신이 성행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늑대인간 소동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와 혹독한 환경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열을 일으킨 소산이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하필 늑대였던 이유는 당시 늑대는 초원과 야만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동물과 함께 살며 동물의 다양한 힘을 얻고자 한 것은 초원 전사들의 열망이었다. 자신들을 늑대의 후손으로 자처하며 강인한 정신과 신체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착하고 국가를 이루는 등 문명화하면서 그런 야성적인 모습을 점차 잃게 되었다. 쿠빌라이칸을 비롯하여 모든 초원제국의 왕들이 자신의 궁궐에 거대한 숲을 만들고 사냥터를 가꾼 것도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초원을 잃어버린 요즘 사람들은 또다른 늑대인간을 꿈꾼다. 20세기 이후 영화나 만화에서는 헐크, 슈퍼맨, 배트맨, X맨 등 괴력을 가진 초현실적인 인격체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현대사회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라도 초월적인 힘으로 돈과 권력을 가지려는 '늑대인간'들이 너무 많고, 또 서민들에게는 달콤한 말로 '슈퍼맨'이 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진정한 늑대인간은 자연과 하나 되면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나간 자랑스러운 초원의 전사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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