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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5> 초원의 디어헌터
중국엔 봉황, 서양엔 유니콘, 초원엔 `하늘의 사슴`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3-08 20:35:01 | 본지 22면
- 부족의 표시임과 동시에 전사들의 전공 따라 주어지는 계급장이요 용맹의 상징이었고
- 고기와 가죽 제공하는 사냥감뿐만 아니라 예술의 소재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사슴이 없는 초원을 상상할 수 있을까. 넓은 초원과 언덕을 유려하게 뛰어다니는 사슴은 보기만 해도 참 아름답다. 목축을 하며 살았던 초원민족들에게 양 염소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동물이었다. 초원사람들에게 사슴은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라 예술의 소재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초원전사들의 동반자
몽골 오르도스 지역에 속하는 영하의 하란산 사슴 암각화.
1997년 필자가 초원보다는 북쪽인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을 키우는 에벤키(퉁구스)족을 조사하러 갔을 때 그들의 사슴과 순록에 대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조사팀의 요청으로 촌장은 순록을 잡게 되었고, 촌장은 사슴을 몰던 아들에게 뭐라고 외쳤다. 그 순간 무리 중에서 한 순록이 잡힐 것을 직감했는지 무리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순록을 잡았지만 평소에는 순하디 순한 순록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며 까치발을 곧추 세우며 저항하는 것이 아닌가.
순록을 잡아오자 촌장은 순록 머리위에 보드카를 뿌리며 주문을 외우고 칼등으로 순록의 미간을 때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재빠르게 숨통을 끊어 순록의 고통을 최소화했다. 모든 주민들은 엄숙하게 그 과정을 지켜본 후 재빠르게 고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발목 부근의 가죽은 각반으로, 또 몸통 가죽은 겨울에 천막을 덮는 보온재로 쓰기 위해 무두질을 했다. 고기의 해체는 남자들의 몫으로, 맛있는 부위부터 어른에게 나눠줬고 공평하게 분배했다. 가장 맛있다는 넓적다리는 손님인 우리들의 몫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에벤키인들에게 순록은 단순히 탈 것이나 단백질 공급원이 아니라 그들의 동반자였다.
초원지역도 삼림(타이가)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원지대에 살던 초원민족에게 사슴은 살아나가는 데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했으며, 또 그 날렵하고 재빠른 모습은 초원에서 생존하는 강인한 전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초원의 고대 예술에서 언제나 사슴은 가장 중요한 모티브였으며 또 그들의 삶을 상징했다.
■사슴문신을 한 사람들
알타이 우코크 고원 칼쥔에서 발견된 전사 미라의 몸에 새겨진 사슴 문신의 도판.
기원전 6~3세기 알타이 파지릭문화의 무덤은 고산지대의 영구동결대(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지역)에 위치한 덕택에 의복, 목재 등이 수 천년 동안 고스란히 보존된 채 발견된다. 특히 파지릭문화에서는 당시 전사들의 미라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하나같이 어깨 부분에 하늘을 나는 사슴을 문신했다. 모두 사슴문신을 했지만, 전사마다 문신의 부위며 크기가 달랐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큰 고분인 파지릭 5호 고분의 미라에는 어깨에서 발목까지 사슴이 문신되었다. 또 '알타이의 공주'라고 명명되어 1995년 한국에서도 전시됐던 우코크 고원의 여성 미라는 중형급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사슴무늬는 어깨와 손가락 부분에 있었다.
알타이 파지릭 전사 미라의 어깨에 사슴문신이 새겨져 있다.
한편 1994년 발견된 우코크의 칼쥔 유적에서 발굴된 소형급 고분에서 나온 남성 미라에는 단지 한 마리의 사슴만 새겨져있었다. 무덤이 클수록 사슴문신도 다양해지고 화려해지는 셈이다. 즉, 문신은 무사의 신분을 상징하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문신이 하나씩 추가된 것이다. 그들에게 사슴은 자신이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인 동시에 전공(戰功)에 따라 받은 계급장이요 용맹함의 상징이었다.
파지릭 고분의 미라에서 보듯 당시 초원의 전사는 자기 몸의 문신을 화려하게 드러냈으니, 화려한 문신은 곧 전사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신을 새긴 초원의 전사는 전사들을 표현한 일종의 선돌(立石·menhir)인 '사슴돌'에도 표현되었다. 사슴돌은 높이 2m 안팎의 직사각형 돌을 세운 일종의 거석기념물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고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 이름이 사슴돌인 이유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 빽빽이 전면을 채운 하늘을 나는 사슴무늬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사슴돌을 조사해보니 얼굴 부분에는 귀걸이가, 또 허리부분에는 허리띠가 있고 칼, 숫돌, 전투용 도끼 등도 있다.
■목이 길어서 성스러운 짐승
초원지대인 타가르문화권에서 나온 하늘을 나는 사슴 모양의 청동장식.
즉 기원전 9~5세기 초원에서 살던 전사가 죽으면 그 사람을 기념해 선돌을 세웠고, 그 위에 새겨진 사슴은 바로 전사의 문신이었다. 사슴돌은 케렉수르라고 하는 돌로 만든 제사터 근처에서 주로 발견되며, 암각화의 앞에서도 나온다. 초원의 부족들이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에 있었던 셈이다. 대부분 사슴돌은 주변 풍광이 좋은 데에 위치한다. 필자가 조사한 알타이 아드르-깐의 암각화에도 사슴돌이 있는데, 병풍을 친 듯한 절벽 바로 앞에 있는 사슴돌은 마치 그 거대한 암각화를 지키는 수호신인듯 했다.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문양.
사슴을 숭배하는 유물이 널리 퍼진 스키타이시대(기원전 8~3세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역동적인 동물 장식이다. 초원의 유목민은 청동, 나무 등으로 솜씨 있게 다양한 포즈의 사슴을 묘사했다. 도약하거나 앉아있는 등의 사슴 행태를 묘사한 여러 유물들이 있는데, 이 사슴들의 자세를 분석한 한 러시아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여기 표현된 사슴 종류만 10여 종이 넘으며 매우 정밀하게 사슴 활동상을 포착한 것이라 한다. 사슴이 뛰어오르는 자세만도 마치 활동사진을 한 장면씩 잘라서 보듯 약 20여 가지로 표현했으며 임신 중인 암사슴, 싸우는 수사슴 등 다양한 사슴 행태가 묘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자세는 현대인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것이어서 이 연구가도 고성능 카메라를 이용해 분석해서 결과를 얻었다. 당시 초원민족이 얼마나 사슴과 가까이 살면서 관찰했는지 보여주는 예다. 또한 사슴돌에 새겨진 것처럼 하늘을 날 듯 환상적인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도 있다. 중국에 봉황, 서양에 유니콘이 있다면 초원에는 하늘의 사슴이 있다. 그 뿔은 마치 구름처럼 몸통 위를 뒤덮고, 주둥이는 새의 부리처럼 비죽 나온 것도 있다. 바로 중원의 용문양이 초원지역의 사슴과 결합하여 환상의 동물로 변한 것이다. 노천명의 시는 사슴이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 표현했지만, 초원에서는 반대로 목이 길어지면서 성화(聖化)되어 하늘의 사슴이 된 것이다.
■우리 문화 속 사슴과 영화 '디어헌터'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약 기원전 3~1세기)에 북방 초원계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사슴이 새겨진 청동기들이 등장한다. 대구 영천 어은동과 일본인 오쿠라 씨가 모은 컬렉션에도 사슴이 그려진 청동기가 있다. 초원지역 암각화에서 발견되는 사슴과 그 표현방법이 아주 유사하다. 또 고려가요에도 사슴이 의외의 장면에서 등장한다. '청산별곡'에는 현대어로 풀면 '정지(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 해금(奚琴)을 켜는 것을 듣노라'라고 해석되는 구절이 있다. 고전문학계에서 논란이 많아 이 구절에 대한 정설은 없다. 장대 위에 있는 사슴이라면 서커스를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장대나 칼 손잡이의 끝에 사슴이나 산양이 까치발을 들고 서있는 장식은 초원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보이는 모티브다. 여기에 악기는 해금이니 아마 몽골의 마두금 같이 악기의 끝 사슴장식이 달린, 초원지역에서 건너온 악기를 연주하는 광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의 고대문화에서 사슴이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주로 농사에 의지했기 때문에 사슴과 관련된 문화가 그리 많지 않다.
40대 이상 독자라면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1978년 영화 '디어헌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아름다운 설경과 가난하지만 밝게 살던 러시아계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전반부의 평화로운 장면은 주인공 젊은이들이 사슴사냥을 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곧바로 참혹스러운 월남전으로 장면이 바뀐다. 이 영화의 배경이 베트남이면서도 그 제목이 '사슴사냥꾼'(디어헌터)으로 된 것은 전쟁 속에 비인간화되어서 사슴을 사냥하듯 사람을 사냥하고 또 사냥감이 되어간 미국 하류층 젊은이들을 그린 것이다.
영화 '디어헌터' 속에서 의미없이 스러져가는 젊은이들처럼 현대사회에서 사슴은 보약의 한 종류일 뿐 더 이상 예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의 보약사랑은 알타이 지역에서도 유명했던지, 필자가 알타이 지역을 조사할 때 한국인이 왔다는 소문을 들은 현지 알타이인은 녹용이나 알콜에 담근 녹혈을 사라고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슴은 유라시아 북반구 초원지역 전사들과 삶을 같이 했던 동반자였다. 이제 한국과 초원을 잇는 대표적 동물인 사슴의 진정한 의미를 연구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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