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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8> 초원과 파라다이스

벽안이 꿈꾸었던 동양의 몽환적 지상낙원 '제너두'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1-18 20:11:29 |  본지 22면


- 인공호수와 개울·광활한 초원 정원 쿠빌라이 칸의 여름궁전 '상도'…동방견문록 기록

- 서양문학 등장 후 천국의 대명사로

- 중국 정부 발굴조사…원제국 中역사 편입


사람은 이상향을 꿈꾼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쉬 서사시의 딜문동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 등 이상향은 힘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중세 이후 서양 사람들은 황량한 초원 벌판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몽골이 만든 성지를 낙원으로 묘사했다. 그들이 꿈꾸었던 초원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실제로 초원에 낙원은 있었을까?


■동방견문록 속의 낙원


원나라의 여름수도였던 상도의 지금 모습. 상도는 서구에서 '제너두'라 일컬어졌으며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다.


서기 13세기에 아랍을 거쳐서 몽골제국에 가서 살았던 마르코 폴로가 구술한 '동방견문록'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수십 번은 들었음직한 고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수많은 신기한 기록은 지난 수백 년간 서양인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는 쿠빌라이 칸 시절 몽골제국이 다스린 여러 지역의 풍습과 지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실제로 마르코 폴로가 본 것을 기록한 것인지 논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책은 중세 서양사람들이 동양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중 특히 서양인의 관심을 끈 대목은 쿠빌라이 칸의 여름궁전인 상도(上都·서양에서는 '제너두'라고 더 많이 알려짐)에 대한 구절이다. 몽골제국 제3대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은 평소에는 현재의 북경인 대도(大都)에서 정사를 보고, 여름에는 상도로 옮겨 국정을 보았다. 황제 일행은 춘분에 상도로 출발해서 추분이 될 때에 머물다가 다시 대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수년간 지구 곳곳을 돌아다닌 마르코 폴로가 보기에도 상도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건설한 지상낙원이었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상도 주변에는 인공호수와 개울을 만들었으며 수백 마리 동물과 해동청을 풀어놓아 왕이 사냥하는 정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내성 안의 궁전은 벽에 금칠을 해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또 건물 벽은 대나무로 지어서 여름 궁전에서 떠날 때는 건물을 해체·정리했다고 한다. 왕이 살던 궁전에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막과 부속 시설들이 있었을 것이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칸의 초상.


황량한 초원 위에 세워진 상도는 곧 서양에서 지상낙원 또는 천국의 대명사로 널리 쓰였고, 지금도 이상향의 상징으로 통한다. 상도가 서양 문학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 활동한 영국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코울리지의 시 '쿠블라(쿠빌라이) 칸-꿈 속의 모습'부터이다. 이 시는 '제너두'(상도)에 그는 위엄있는 환락의 궁전을 세웠으며'로 시작해서 '그는 천국의 우유와 꿀을 마셨다'는 구절로 끝맺는다. 이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하는데, 사실 코울리지가 아편에 취해서 본 여러 가지 환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 코울리지가 환상 속에서 본 상도의 모습은 18~19세기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청나라의 정원 모습에 가까우며 실제 사냥터로 만들어놓은 원나라 상도와는 거리가 있다. 어쨌든 '제너두'는 1980년대의 디스코음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일 정도로 서양문화에서 환상적인 낙원의 상징이 되었다.


■중화주의, 초원의 낙원 발굴에 나서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뮤지컬 '제너두'의 포스터.


실제로 상도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270㎞ 지점인 내몽골 자치구 시린골 맹(몽골어로 시린골 아이막) 쩡란치(正藍期·몽골어로 훌룬 호트)에 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직전인 1256년에 건설되어 원나라 말기인 1358년 홍건군(紅巾軍)에 의해 불타기까지 100여 년간 몽골제국 칸의 여름궁전으로 쓰였다. 이 성은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둘레가 2.2㎞이며 실제 왕이 거주한 내성은 둘레가 1.4㎞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후 쿠빌라이 칸은 성 바깥으로는 넓은 정원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과 동물들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홍건군에 의해 불태워진 이래 상도는 폐허가 되었고 화려한 궁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대로 가을이 되면 천막을 걷었기 때문에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기 어려운 초원지역이었으니 몽골제국의 멸망과 함께 급격히 퇴락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상도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와 관광자원화 정책에 따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중국은 최근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에 따라 칭기즈칸이 세운 광대한 원제국을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상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상도를 발굴하고 있다. 특히 작년에는 상도의 주요 건물인,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정사를 보았던 '목청각'이 발굴되었다. 이 건물의 전체 면적은 600㎡에 달하지만, 이미 홍건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린지라 겨우 건물의 주초석만 발견되었다.


한편 호수로 이어지는 배수시설도 확인되어 주변에 초목이 우거지고 동물들이 뛰어놀던 그야말로 사막 위의 낙원이었다는 기록이 실제였음이 밝혀졌다. 실제 기록에도 상도에는 약 10만 명이 살았고 사통팔달의 역참이 정비되어 있다고 하는데, 주변지역을 조사한 결과 모두 8개의 길이 뻗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국이 발해 유적을 정비해서 유네스코에 단독으로 등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제국의 유적도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것은 탐탁치 않다. 하지만 발굴이 지속되면 상도의 진면목이 밝혀질 것이다.


■서양인 뇌리에 '동양의 환상' 주입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또다른 천국 알라무트 요새. '산위의 노인'이 암살단을 운영했던 장소로 기록돼 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상도에 가기 위해선 수십 일 사막을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고생 끝에 초원 속에서 호수와 정원이 있는 거대한 궁전을 보았다면 낙원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원 속의 낙원은 유목민족의 문화는 아니다. 끊임없이 이동했던 유목민들에게 이러한 낙원은 필요없었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보다 약간 빠른 시기인 1240~1250년대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갔던 카르피니나 루브룩의 기행문에 몽골의 수도는 거친 유목민의 모습으로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상도가 그렇게 화려했던 이유는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제국이 초원의 국가에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인 제국에 걸맞게 정착문명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해 세계 제국으로 나아가는 몽골의 상징적인 기념물이었다. 상도에 대한 서구에서의 환상은 19세기 이후 막 알려지기 시작한 동양의 이미지가 투영된 결과였다. 또 동양 어딘가에 낙원이 있다는 믿음은 결국 르네상스 이후 동양 여러 지역을 경쟁적으로 식민지화한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콜롬버스를 비롯한 대부분 서양탐험가들은 황금이 지천에 널린 낙원을 찾아 전 세계를 누볐고, 그 와중에 원주민들은 끝없이 희생되었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낙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그들이 낙원이라고 믿었던 곳에는 폐허뿐인 유적과 소멸되어 가는 소수민족만이 남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책에는 또 다른 지상천국이 나온다. '산위의 노인'(실제로는 시아파에 속하는 '알라 웃 딘 무함마드')은 산 위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갖춰놓고 중세판 '주지육림'을 만들었다. 이 노인은 테러리스트가 될 만한 청년을 납치해서 며칠간 자기가 만든 낙원에서 열락을 누리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세상으로 돌려다 놓으면서 신의 명령(테러)을 수행하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쳤다. 가짜 천국을 믿은 암살단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산위의 노인은 이 청년들이 천국에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기 위해 대마계통의 마약을 썼다고 한다. 현대 영어에서 암살자를 뜻하는 '어쌔신(Assasin)'과 대마초 계통의 마약인 '하쉬쉬'가 바로 이 암살단에서 기인한 말이다.


산위의 노인이 마약을 먹여서 가짜 천국을 만들었으며, 코울리지도 아편에 의지해 쿠빌라의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초원국가가 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거칠고 황량한 초원에 살면서 갖추게 된 강인함 덕일 뿐, 초원이 살기 좋은 낙원은 결코 아니었다. 막연한 환상과 기대로 초원을 치장하는 것은 초원민족을 야만의 이방인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노마디즘과 초원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기대는 곤란하다.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낙원'을 꿈꾸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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